백호(百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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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에 몽골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관직으로, 조선시대 도(道)의 여러 진(鎭)에 딸린 군직.

내용

백호의 기원은 몽골의 지방 제도에서 비롯되는데, 총관부(摠管府) 아래 총관(摠管)천호(千戶)·백호(百戶)를 두어 호(戶)의 규모에 따라 설정된 행정 및 군사 단위에서 기인한다. 이 제도를 모방한 명(明)나라는 백호를 위소(衛所)의 관(官)으로 임명하고 100명의 병사를 관리하게 하였다. 명의 군사 체제는 단위별로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지휘(指揮)는 5,000의 군사를 관장하였고, 천호(千戶)는 1,000의 군사를, 백호는 100의 군사를, 총기(總旗)는 50의 군사를, 소기(小旗)는 10의 군사를 관장하였다.

한편 1378년(고려 우왕 4) 고려의 군사 제도가 서북면 방어에 치중하는 익군체제(翼軍體制)로 확대되면서, 군 조직은 10명을 통할하는 통주(統主), 100명을 통할하는 백호(百戶), 1,000명을 통할하는 천호(千戶)로 지휘 체계가 편제되었다. 고려의 익군 체제는 조선초기 전습되었지만 동·서북 지역에 대한 방비를 누락시키는 허점을 드러냈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정도전(鄭道傳)은 지방 행정 조직의 개편에 따른 익군 체제의 재편을 골자로 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그는 영흥도(永興道)와 길주도(吉州道)을 설정하고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시키고 좌우익(左右翼)에 천호(千戶)·백호(百戶)·통주(統主)를 배치하였다. 또한 수군의 관품이 만호는 3품 이상, 천호는 4품 이상, 백호는 6품 이상의 무관으로 정비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동북면의 각 익의 천호와 백호의 인원이 배정되었는데, 상천호(上千戶)는 5품관 1명, 부천호(副千戶)는 6품관 1명, 상백호(上百戶)는 7품관 1인, 부백호(副百戶)는 8품관 1명이 편제되었다.

1410년(태종 10) 중앙에서 파견된 안무사(按撫使)가 토착적 기반을 가진 제주민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벼슬을 원하는 토관인(土官人)을 안무사의 직관으로 천호와 백호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주 지역에 적용된 천호와 백호에 대한 안무사의 인사권은 1451년(문종 1) 평안도과 함길도의 사례에 따라 병조(兵曹)의 주관으로 이관되었다.

1429년(세종 11)부터 경성(鏡城)과 경원(慶源) 등 방어 요충지에 백호가 신설되면서 1431년(세종 13) 의주에도 백호 7명이 가설되었다. 또한 1438년(세종 20) 함경도에 천호와 백호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는데, 경원부(慶源府)에 천호 4명과 백호 6명, 회령(會寧)에 천호 7명과 백호 12명, 종성(鍾城)에 9명, 경흥(慶興)에는 천호 3명과 백호 6명이 가설(加設)되었다.

그러나 평안도와 함길도는 백호와 천호가 정군(正軍)을 통솔하는데, 타 지역은 총패(總牌)가 시위패(侍衛牌)를 통솔함에 따라 지휘 체계의 통합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1459년(세조 5) 병조가 주관한 병제 개선책에 따라 정군과 시위패는 모두 정병(正兵)이라 통칭하고, 통솔자인 백호·천호 및 총패는 대정(隊正)으로 통합시켰다. 즉 통솔 체제가 대정 1명은 정병 25명을 거느리고 하고, 여수(旅帥) 1명이 125명을 통솔하는 여수-대정-정병 단위로 개편되었다.

한편 조선초기 의금부(義禁府)는 백호 80명이 소속되어 2번(二番)으로 나누어 1년마다 교대하면서 삼경순찰(三更巡察) 및 죄인 체포와 호송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외방에 사는 백호는 농사에 지장이 많다는 점이 인정되어 6개월마다 교대하여 입역하기도 하였다.

용례

兵曹啓 濟州土官百戶千戶 安撫使擅便除授 實爲未穩 乞依元典 安撫使望報兵曹 兵曹依平安 咸吉道土官例 啓聞差下 從之(『문종실록』 1년 8월 29일)

참고문헌

  • 민현구,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한국연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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