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량(崔後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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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6년(광해군 8)∼1693년(숙종 19)= 78세].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고, 봉작(封爵)은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자는 한경(漢卿), 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최혜길(崔惠吉)이며,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는 관찰사이춘원(李春元)의 딸인데, 영의정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되었다. 영흥 부사(永興府使)최기남(崔起南)의 손자이고, 영의정최석정(崔錫鼎), 좌의정최석항(崔錫恒)의 아버지다. 계곡(谿谷)장유(張維)와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병자호란>과 볼모 생활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서울의 사대부집 부녀자들은 거의 모두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당시 21세의 최후량도 동생 최후원(崔後遠)과 함께 양가(養家)와 생가(生家)의 가족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기병(騎兵) 10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남하하여 서울을 공략하였으므로,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오던 양부 최명길과 생부(生父) 최혜길은 모두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1637년(인조 15) 정월에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였다. 처음에 청나라 군사들이 약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후량이 집안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서 어깨동무를 하게 하여, 모두 둥글게 원형을 만들고, 그 가운데 젊은 여자와 아이들을 두어 겁탈을 막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청나라 군영(軍營)의 장수를 찾아가서, “나는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판서의 아들이다. 그의 가족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그를 정승 윤방(尹昉)에게 데려가서 그에 대해 물어보고, 실제로 최명길의 가족인 것을 확인한 뒤에, 그 가족들을 성의 서쪽 민가에다 데려다 두고 자신의 군사들로 하여금 보호하게 하였다. 그때 같이 피난 간 다른 사대부 집안 가족과 강화도 현지 사람 등 남녀 30여 명이 모두 최명길의 집안의 노비라고 일컬어서, 아울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청나라 장수가 강화도를 공략할 때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최명길의 가족이 섬 안에 있으면 잘 보호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이 어린 최후량이 용기를 내어서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서 만났기 때문에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청나라 장수가 말 4필을 내관(內官)백대규(白大圭)에게 주어 최명길 집안사람들을 서울집까지 데려다 주도록 하여, 호란에 전가족이 무사할 수 있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호란 때 강화도에서 최명길의 가족만이 무사한 사실을 당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조선 정부의 3정승 6판서의 아들 한 사람을 심양(瀋陽)에 질자(質子)로 보내도록 강요하여, 최명길의 양자 최후량도 볼모로 잡혀가서 질관(質館)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다. 질관은 질자관(質子館)을 말하는데, 조선에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하여 세자시강원 상하 관원(官員) 등 모두 90여 명이 질관에 묵었으므로, 청나라 사람들은 그곳을 조선관(朝鮮館)이라고 불렀다.

후금(後金) 시대의 조선관은 심양성(瀋陽珹) 남문 안에 약간 북쪽에 있었는데, 후금 갑사(甲士)가 경비를 서고 있었으나, 후금의 담당 관리의 허락을 받으면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최후량은 청년 시절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무려 8년 동안 하였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못하였다. 한편, 최명길은 중 독보(獨步)를 명나라 홍승주(洪承疇)의 군영(軍營)에 보내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부득이 항복한 사실을 알렸는데,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면서 중 독보가 오고간 사실을 고백하였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조선의 영의정최명길을 잡아오게 한 다음 그를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최명길은 모든 것이 자기 혼자 한 일이고, 나라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홍타지는 최명길을 북관(北關)에 가두어 두었는데, 이곳은 사형수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최후량은 파발마(擺撥馬)를 얻어 타고 세 번이나 청나라 담당 장수를 찾아가서 여진말로써 아버지를 적극 변호하여, 최명길의 죄가 경감되었다.

1643년(인조 21) 최명길은 남관(南館)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의 감옥에서 그 앞서 붙잡혀 간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을 만났다. 서로 껴안고 통곡하더니 마침내 화해하였다. 최명길은 3년 동안 갇혀 있다가, 1644년(인조 22)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죽고, 세조(世祖)순치제(順治帝)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北京)으로 천도(遷都)한 다음, 1645년(인조 23) 모든 포로가 석방되자, 양자 최후량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 사이에 1644년(인조 22) 최후량의 생부 최혜길이 동지사(冬至使)로서 심양에 와서 머물렀는데, 최후량은 생부를 조선관에서 모시고, 또 양부를 남관에서 옥바라지하였다. 이렇게 이국에서 세 사람이 기구한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최혜길은 1644년 연경의 조선 사신관(朝鮮使臣館)에 묵으면서 순치제(順治帝)에게 동짓날 하례를 드리고, 그 이듬해 1645년에 귀국하였다.

인조~숙종 시대의 활동

1645년(인조 23) 귀국하였으나, 8년 동안 볼모 생활에서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쇠약해져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이 어두워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1647년(인조 25) 양부 최명길이 돌아가자, 3년 동안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대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 사이 오래도록 병을 치료하여 몸이 조금 회복될 수 있었다.(『약천집(藥泉集)』 권21 「좌윤 최공후량 묘갈명(左尹崔公後亮墓碣銘)」 참고. 이하 「최후량 묘갈명」이라 약칭함.)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남별전참봉(南別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었다. 1666년(현종 7)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이 되었다가, 귀후서(歸厚署)별제(別提)로 승진하였고,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를 거쳐, 공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로 옮겼다. 1670년(현종 11)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임명되어, 임기를 채우고 이듬해 체직되었다.(「최후량 묘갈명」 참고.)

1675년(숙종 1)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에 임명되었으나, 이때 남인(南人)들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을 몰아내자, 그는 병을 핑계대고 자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때 사복시 안의 늙은 아전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본시(本寺)에 첨정으로 임명되어 두어 달만에 사직하는 사람을 이제 처음 보겠다.”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7 참고.) 이어 진산군수(珍山郡守)·면천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79년(숙종 5)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곧 체직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출척(庚申黜陟)>이 일어나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들이 집권하자,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책훈되었고 정사공신(靖社功臣)원훈(元勳)의 적장자로서 회맹제(會盟祭)에 참예하였는데,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1681년(숙종 7)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채우고 1683년(숙종 9) 체직되었다.(「최후량 묘갈명」 참고.)

1685년(숙종 11) 나이가 70세가 되었는데, 두 아들 최석정과 최석항이 조정에서 시종(侍從)의 벼슬에 있다고 하여 추은(推恩)되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고, 완릉군에 습봉되었다.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여생을 즐겼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보사공신의 공훈이 삭탈(削奪)당하고 품급이 강등되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되었다.(「최후량 묘갈명」 참고.)

1693년(숙종 19)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8세였다. 그해 여름에 보사공신의 공훈이 회복되고 품급이 가선대부로 환원되었다.

저서로는 『정수재집(靜修齋集)』이 있다.

질관(質館)과 조선관(朝鮮館)

조선에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를 비롯하여 세자시강원 상하 관원(官員)도 모두 질관에 묵었다. 봉림대군 내외가 질자(質子)로 있을 때 현종이 1641년(인조 15) 2월 4일 질관에서 태어났다. 후금 시대의 질관은 심양성(瀋陽珹) 남문 안에 약간 북쪽에 있었는데, 3정승 6판서의 질자도 여기에 묵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잡혀간 김상헌 등 주전파(主戰派)와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의 3학사(學士)는 북관에 갇혔는데, 이곳은 사형수들을 수용하던 곳이다. 또 남관(南館)·동관(東館)에는 그 밖의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수용하였다.

호란 때 후금·청나라에 사로잡혀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약 30여만 명이 넘으리라고 추산되는데, 심양성의 남문·동문의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나갔다. 조선에서 후금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포로로 잡혀간 가족을 찾기 위하여 조선에서 남은 가족들이 금화(金貨)나 은화(銀貨)를 사신 인편에 붙여 보내어 노예 시장에서 포로가 된 가족을 다시 돈을 주고 사오게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인 포로들은 가족을 찾지 못하고 후금의 관노비가 되거나, 암반[大臣]의 사노비로 전매되었다. 그때 조선의 사절이 사신 가는 도중에 호란 때 사로잡혀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사신 일행에게 자기들을 고국으로 제발 데려다달라고 하소연하는 장면의 사행록(使行錄)과 연행록(燕行錄)에 보인다.

후금 갑사(甲士)가 질관의 경비를 서고 있었으나, 볼모로 잡힌 사람들은 담당 관리의 허락을 받고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생활 용구와 물자는 후금에서 공급하였으나, 자체적으로 채소밭을 일구어 채소류를 생산하였고, 조선의 사신 일행이 수시로 가져 오는 조선의 물화를 사용하였다. 처음에 조선 사절이 사행 중에 물화 매매를 통하여 얻은 은화를 주면, 동문·남문 시장에서 물건을 사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姜嬪)은 조선과 중국의 물화를 교환하는 사무역에 손을 대어 큰돈을 벌어서 조선관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1644년(인조 22) 9월 청나라가 북경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에 조선 사람이 머물렀던 질관인 조선관(朝鮮館)을 옥하교(玉河橋)에 설치하였는데, 자금성(紫禁城) 남문(南門) 안에 있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이곳에 70여 일 동안 머물 때 서양의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이 이곳에 자주 들려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소현 세자와 강빈은 석방되어 귀국할 때 기독교 서적과 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왔다. 1645년(인조 23) 2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석방되어 귀국한 다음에는 조선관은 조선 사신관(朝鮮使臣館)으로 바뀌었다. 조선 사절(使節)이 묵던 숙소(宿所)로 옥하교에 있었기 때문에 일명 옥하관(玉河館)이라고도 불렸다. 여기에는 조선식 기와집을 짓고 온돌방을 설치하고, 조선식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가 있었다. 이번원(理藩院) 소속의 조선어 역관(譯官)이 4~5명 배치되어 조선 사절의 수발을 들었다.

성품과 일화

최후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온화하다고 하여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장중하다고 하여 너무 엄격하지 않았다. 그는 남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친절함이 한결같이 성심(誠心)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사람마다 선뜻 그를 믿고 좋아하였다. (「최후량 묘갈명」 참고.)

그는 깊은 생각과 먼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양부 최명길이 그를 깊이 사랑하고 아주 신임하여, 군국(軍國)의 기밀에 속하는 정무(政務)를 최후량에게 많이 물어보기도 하였다. 학문을 배울 적에도 이미 가정에서 양부 최명길과 생부 최혜길의 가르침을 받아서 학문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고, 또 계곡장유와 백헌이경석을 찾아가서 학업을 널리 전수받았다. 유가(儒家)의 여러 서적을 두루 읽었으나, 일찍부터 병이 있어서 깊이 학업에 진력하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평소 사서(史書)를 즐겨 읽어서,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역사책이 없을 정도였는데, 국가의 치란(治亂)과 현인·악인의 진퇴까지도 항상 깊이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인물을 평가할 때에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는 시(詩)에도 재능이 매우 많아서, 비록 중간에 국가의 환란을 겪으면서 시작(詩作)에만 힘을 기울일 수는 없었으나, 가끔 그가 지은 시에는 내용이 놀랍고 절묘한 구절이 있었다. 그가 심양에 질자로 있을 때 청음김상헌이 그의 작품을 보고 지극히 칭찬하였다. 만년에 문원(文苑)의 여러 명사(名士)들과 교류하면서 시(詩)를 수창(酬唱)한 적이 많았는데, 모두 그 조화로운 운률(韻律)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그의 시작(詩作)을 모아서 몇 권의 책으로 엮어서 집안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다. (「최후량 묘갈명」 참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최후량이 집안 사람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1637년(인조 15) 1월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집안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서 어깨동무를 하게 하여 모두 둥글게 원형을 만들어, 청나라 군사를 공동으로 막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청나라 군사의 진영으로 가서 주장(主將)을 만나서, “내가 들으니,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와 이조 판서최명길 두 집안을 찾아내어 침범하지 말라는 칸[汗]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러한가? 내가 바로 최명길상서(尙書)의 아들이다.”하였다. 이에 청나라 주장이 말하기를, “네가 최 상서의 아들인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최후량이 대답하기를, “본국의 재상들이 이 성 안에 많이 있으니 물어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청나라 주장이 최후량을 데리고 정승윤방(尹昉)에게 찾아가서 물으니, 윤방이 최후량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사람이 바로 이조 판서최명길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 주장이 그들을 호송할 장수와 군졸을 정하여 그 가족들을 보호해서 서울의 집까지 모셔다가 드리게 하였는데, 그때 친구의 집안사람들도 그에게 의탁해서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았다고 한다.(『연리실기술』 권26 참고.)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당시 반대파 사람들이 영의정최명길이 청나라 태종홍타지와 내통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1639년(인조 17) 1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볼모로 보낸 영의정최명길의 아들 최후량을 과거에 응시한다고 하여 환국을 허락하였는데, 그 아우 최의길(崔誼吉)을 대신 볼모로 청나라에 들여보내겠다고 하는데, 잠시 서로 교체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인조실록』 참고.)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청나라에서 볼모가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의 언덕에 있는데, 약천(藥泉)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약천집(藥泉集)』 권21 「좌윤 최공후량 묘갈명(左尹崔公後亮墓碣銘)」)

부인 광주안씨(廣州安氏)는 관찰사안헌징(安獻徵)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최석진(崔錫晋)은 정랑(正郞)을 지냈고, 둘째아들 최석정은 영의정을 지냈고, 막내아들 최석항은 좌의정을 지냈다. 맏딸은 진사(進士)윤제명(尹濟明)에게 시집가고, 막내딸은 현감(縣監)신곡(申轂)에게 시집갔다.(「최후량 묘갈명」 참고.) 최후량은 호란의 와중에 과거를 보는 시기를 놓쳐 출세하지 못하였으나, 그 아들들은 좋은 스승에게 보내어 학문을 제대로 가르쳐, 최석정·최석항 형제 재상을 길러냈다. 최후량의 희생으로 아버지와 아들들이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이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약천집(藥泉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남파집(南坡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성재유고(醒齋遺稿)』
  • 『염헌집(恬軒集)』
  • 『명곡집(明谷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