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록(燕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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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연경, 즉 북경에 다녀와서 쓴 보고서 및 여행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조선시대에 명나라 및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에 외교 사절을 파견한 횟수는 1,000차례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500여 종의 개인 여행기로 남겼는데, 이를 통틀어 연행록이라고 부른다. 공통의 지리 공간을 무대로 이렇게 많은 여행기가 작성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연행록은 내부적으로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조선에 새로운 지식이 형성되고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외교·교역·문화 교류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내용 및 특징

1. 시말

북경 사행을 다녀온 최초의 기록으로는 이승휴(李承休)가 1273년 원나라의 황후 및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진하사행(進賀使行)으로 다녀오면서 남긴 시를 꼽을 수 있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명나라 사행과 관련된 기록이 많아지지만, 이때까지는 사행록이라고 할 만한 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행 기록이 통일된 단위로 묶인 것은 1389년에 권근(權近)이 당시 명나라의 수도이던 남경을 다녀온 뒤, 사행 과정에서 지은 시를 모아 『봉사록(奉使錄)』을 펴낸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연행록이라는 명칭은 조위(曺偉)가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을 다녀온 뒤 남긴 기록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 연행록은 1894년(고종 31) 6월에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수행원으로 참여하였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한 김동호(金東浩)가 남긴 『연행록(燕行錄)』이다.

2. 작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작자 층은 사신들이다. 근대 이전의 외교는 주로 문서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각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학사들이 사신으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식견과 문한이 뛰어난 데다 학습의 의지가 높았던 지식인들이 연행에 참여하면서 우수한 연행록이 대거 등장하였다. 김창업·홍대용·박지원·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해응·김정희·조수삼 등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연행록의 작자 층이 확대되었는데, 이는 연행 사절에 자제군관(子弟軍官)과 수행원이 포함된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밖에 사절단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였던 역관들도 여러 기록을 남겼다.

3. 범위

연행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였다. 먼저 연행에 참여한 인물이 연행 기간의 체험과 귀국 후의 회고를 기록한 일체의 개인 기록을 꼽을 수 있는데, 이를 좁은 의미의 연행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 밖에 사신이 조정에 공식적으로 보고하기 위하여 초안한 기록, 연행 결과를 왕에게 보고한 상소문(『영조실록』 10년 6월 21일), 연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증서류(贈序類) 산문과 별장(別章), 별권으로 만든 노정기(路程記), 북경에서 만난 인사와 주고받은 서신 및 필담 모음, 연행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대화체 산문, 『북학의(北學議)』와 같이 연행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지은 개혁 지침서, 그리고 연행 관련 그림과 지도 등도 넓은 의미의 연행록에 포함시킬 수 있다.

4. 체재

연행록의 초기 형태는 시집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연행 시집은 주로 작자 사후에 편찬된 문집에 독립된 권목으로 편차되었다. 날짜별로 여정과 견문 및 의견을 담아낸 일기체 연행록은 16세기 후반에 등장하였다. 3대 연행록으로 꼽히는 김창업의 『연행일기(燕行日記)』, 홍대용의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가 모두 여기에 속하였다. 이들 연행록은 분량이 많고 묘사가 자세할 뿐 아니라 그 안에 풍부한 기사문과 논설문을 담고 있어, 사료로서는 물론이고 예술적 완성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세기 이후에는 장편의 연행 가사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주로 규방의 여성 독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18세기 말 이후에는 시의 배경이 되는 지리와 역사 등에 대한 주석을 상세히 달아 놓은 시주체(詩註體)가 나타나는데, 이는 지리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의미하였다.

5. 종수

연행과 관련된 자료들이 축적되고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들 자료를 집성하려는 노력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자료 발굴 및 수집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선집과 전집이 영인 출간되었다. 그러나 연행록에 대한 기초 문헌학 연구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연행록의 정확한 종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연구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지금까지 정리된 연행록은 대략 500여 종이며, 미발굴 자료까지 포함하면 600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6. 내용과 가치

연행록의 내용은 무척 광범위하고 입체적이었다. 역사학·지리학·인류학·정치학·경제학 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내용들이 뒤섞여 있고, 개인의 지극히 내밀한 정서를 표현한 자료에서 국제 정세와 세계사의 흐름을 파악한 기록이 망라되었다. 한국학의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는 자료들이지만, 그중에는 중국학과 일본학의 차원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한 정보 또한 풍부하였다. 최근 연행록에 대한 국내외의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국내에서는 문학과 역사 연구의 시각을 벗어나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행록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자국사 및 동아시아사에 대한 관심의 차원에서 중국과 일본에서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변천

14세기와 15세기의 연행록은 주로 시집의 형태로 구성되었고, 내용 또한 개인적인 감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의 내부 모순이 심화되고, 연행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시도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574년(선조 7)에 중국을 다녀온 허봉과 조헌, 1609년(광해군 1)에 다녀온 유몽인의 연행록에서 이러한 진지한 반성과 학습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1644년(인조 22)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 이후 약 60년 동안은 조선의 대중국 인식이 재조정되는 시기였고, 이는 연행록에도 반영되었다. 이 시기 연행록의 표제에는 천자를 뵙는다는 의미의 ‘조천(朝天)’ 대신 단순히 옛 연나라의 수도에 다녀왔다는 뜻의 ‘연행(燕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 사행 자체를 심리적으로 괴로워하는 단어들이 사용되기도 하고, 내용 또한 비분(悲憤)과 설치(雪恥)의 어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청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어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지배층의 강경한 대청 반감이 희석되면서 내부 모순에 대한 진지하고 냉철한 반성이 시도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같은 시기 북경에서는 조선 사신에 대한 엄격한 문금(門禁)이 풀리기 시작하여, 연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713년(숙종 39)에 김창업의 『연행일기』가 등장한 뒤 100여 년간은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연행록이 대거 출현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형식과 내용 양쪽에서 모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하고 전대의 성과를 관성적이고 상투적으로 답습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행록선집』, 1976.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연행록선집』, 1962.
  • 임기중 편, 『연행록전집』,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 임준철, 「對淸使行의 종결과 마지막 연행록」, 『민족문화연구』 49, 2008.
  • 최은주, 「연행록 자료 집성 및 번역의 현황과 과제」, 『대동한문학』 3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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