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燕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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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중국이 북경을 수도로 삼던 시기에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이 중국에 파견한 외교 사행.

개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의 수도에 정기적으로 사행(使行)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조천(朝天)’이라고 불렀다. 조천이란 궁궐에 들어가거나 혹은 천자를 뵙는다는 뜻이다. 그 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외교 사행은 이전의 관례대로 파견되었지만, 상하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인 조천 대신 지리적인 이동을 나타내는 ‘연행’이 널리 사용되었다.

연행은 ‘연경사행(燕京使行)’의 줄임말이다. 연경은 북경을 가리키는데, 이 지역이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수도였던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후 연행은 근대 이전에 중국에 파견한 외교 사행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단순한 외교 사행에 그치지 않고,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의 문명을 형성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시행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중국 중심의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연행은 명분상으로는 중국 중심의 수직적 질서 구도 아래 형성·유지된 제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주는 묵시적인 국제 규약이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는 사행을 통해 유지·발전되었다. 조선에서는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내정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나아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면서 정치적인 사대(事大)와 문화적인 모화(慕華)의 합일성이 깨지고 그로 인하여 조천이란 용어의 사용이 금기시되었으나, 사신의 파견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2. 의의

연행은 조선시대에 세계와 호흡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조선은 연행을 통하여 서책을 비롯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자기 문명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서양의 과학과 사상도 연행을 통하여 도입되었다. 국제 교역의 많은 부분 또한 연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연행 사신들에게는 공식적으로 무역자금으로 8개의 인삼 꾸러미를 가지고 갈 수 있는 팔포무역(八包貿易) 및 군문이나 아문이 필요한 물품을 대신 북경에서 수입하는 별포무역(別包貿易)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사행단에는 수많은 상인이 포함되어 교역을 하였다. 이처럼 사행단을 이용한 국제 교역은 이후 부산의 왜관을 통한 중계무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근대 이전 한중 관계의 많은 부분이 연행을 통하여 실현된 셈이다.

3. 종류

연행은 크게 정기 사행과 임시 사행으로 구분되었다. 정기 사행은 동지사(冬至使)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가 있었는데, 이를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이라 불렀다. 임시 사행에는 외교적 처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알리는 사은사(謝恩使), 국가의 중대사를 알리거나 청원하기 위한 주청사(奏請使), 황제의 즉위나 칠순 등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進賀使), 황실의 상사(喪事)에 보내던 진위사(進慰使), 조선에 대한 오해를 풀거나 공식 기록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변무사(辨誣使), 조선 왕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고부사(告訃使) 등이 있었다.

4. 구성과 규모

연행 사절의 사신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등 삼사(三使)로 구성되었다. 귀한 집안의 저명한 인물을 정사와 부사로 삼고, 낭료 중 풍헌(風憲)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서장관은 대간(臺諫)의 직임을 겸하여 일행을 규찰 점검하고, 귀국 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사행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 밖에 역관 19명, 의원·서원·화원 각 1명, 군관 7명, 우어별차(偶語別差) 1명, 만상군관 2명 등 총 35명으로 구성된 절행(節行)이 있었다. 그런데 사행단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다. 사행의 종류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였지만, 말·짐수레·식사 등을 담당한 인부와 국제무역을 맡은 상인들을 모두 합하면 많을 경우 5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여기에 사람 수에 버금가는 말과 수레 등을 더해야 연행의 전체 규모를 산출할 수 있다.

5. 노정

명나라와 청나라는 이웃 나라의 사신이 지나는 길을 공로(貢路)로 규정하여 관리하였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경로를 임의로 변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중국 수도에 이르는 사행로는 국제 정세에 따라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명나라 초기 남경이 수도였던 시기에는 동팔참을 지난 뒤 요양에서 여순구(旅順口)에 이르는 역로를 이용하고, 이어 해로를 통하여 산동반도로 갔다가 다시 남경으로 가는 멀고도 복잡한 길을 이용해야 했다. 1421년에 명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는 요양-해주(海州)-우가장(牛家庄)-광녕(廣寧)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갔다. 후금이 요동 일대를 장악한 1621년부터 북경을 접수한 1644년 직전까지는 요동의 전황에 따라 산동반도와 각화도(覺華島)를 경유하는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1644년에 청나라가 건국된 뒤에는 명나라 때의 사행로가 복원되었다. 이후 1679년부터는 요양에서 심양(瀋陽)을 경유하는 노정을 이용하였다.

변천

마지막 연행은 1894년(고종 31)에 이승순(李承純)·민영철(閔泳喆)·이유재(李裕宰)가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다녀온 것이다(『고종실록』 31년 6월 10일).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와중에 파견된 이들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는다. 그사이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인해 조선이 형식상 자주독립국이 되면서 연경 사행은 종결되었다.

연행의 기점은 기준에 따라 달라졌다. 사행을 중국의 수도인 연경에 보낸 외교 사행이라고 규정한다면, 원나라가 북경을 대도로 정한 1271년을 연행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시기에 개성과 북경 사이에 역로가 개설되고, 그 길을 따라 고려의 사신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명나라와 청나라의 수도에 보낸 외교 사행으로 한정하면, 명나라가 건국된 1367년을 기점으로 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연행은 태조의 등극을 알리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면서 비롯되었다(『태조실록』 1년 8월 29일). 연행이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창구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부터였다. 이후 150여 년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연행은 순조롭게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연행은 부침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일반적인 외교 관계 이상으로 명나라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청나라가 건국된 뒤, 조선 지배층 내부에서는 숭명배청론이 팽배하였다. 그러나 연행은 전대의 관례에 따르되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8세기 이후에는 연행을 통한 교류가 큰 폭으로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 권혁수, 『19세기말 한중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2005.
  • 김태준 외, 『연행의 사회사』, 경기문화재단, 2005.
  • 방향숙 외, 『한중 외교관계와 조공책봉』, 고구려연구재단, 2005.
  • 소재영 외, 『여행과 체험의 문학-중국편』, 민족문화추진회, 1985.
  • 전해종, 『한중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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