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식(崔東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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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동식 |
한글표제 | 최동식 |
한자표제 | 崔東式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정칙(正則) |
호 | 율정(栗亭), 독촌(獨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2년(명종 17) |
사망 | 1614년(광해군 6) 6월 9일 |
본관 | 삭녕(朔寧) |
주거지 | 경기도 남양(南陽),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남양 덕동음(德冬音) |
증조부 | (양증조부)최준철(崔濬哲) (생증조부)최준문(崔濬文) |
조부 | 최계종(崔繼宗) |
부 | 최변(崔抃) |
모_외조 | 단양우씨(丹陽禹氏): 우성훈(禹成勳)의 딸 |
형제 | (형)최동립(崔東立) |
처_장인 |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원하(沈源河)의 딸『방목』 →(자녀)1남 1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동식(崔東式) |
총론
[1562년(명종 17)∼1614년(광해군 6) = 53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집의(執義),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다. 자는 정칙(正則), 호는 율정(栗亭)이다. 본관은 삭녕(朔寧), 경기도 남양(南陽) 출신으로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영원군(寧原君)최변(崔忭)이며, 어머니 단양우씨(丹陽禹氏)는 별좌(別坐)우성훈(禹成勳)의 딸이다. 영의정최항(崔恒)의 6대손이고,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최동립(崔東立)의 동생이다. 대사성우성전(禹聖傳)이 외사촌 형인데, 어머니로 인하여 이황(李滉)의 제자인 추연(秋淵)우성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부 증 좌승지최계종(崔繼宗)은 최준문(崔濬文)의 아들인데, 증 사헌부 집의최준철(崔濬哲)에게 입양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나이 17세 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형 최동립과 함께 남양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하면서 같이 공부하였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는데, 전쟁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형 최동립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 하였다. 1594년(선조 27) 33세에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방목』) 성균관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여러 참하관(參下官)의 관직을 거쳐서, 1599년(선조 32) 2월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 12월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승진하였고, 1603년(선조 36) 3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1604년(선조 37) 윤9월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대간(臺諫)에 있을 때 그는 이조 정랑정호선(丁好善)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난하였다가, 1605년(선조 38) 3월 함경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8월 정호선이 사헌부를 사주하여 그를 탄핵하기를, “경성 판관최동식은 본래 술을 좋아하여 술에만 빠져 있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그를 파직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606년(선조 29) 5월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8월 성균관 사예(司藝)로 승진하였다. 선조 말년에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 안변은 예로부터 생선과 소금을 팔고 피와 보리가 많이 생산되므로, 풍속이 벼농사에 별로 힘쓰지 않았는데, 그가 부임한 뒤에 제방을 쌓고 개울을 파서 수리(水利) 사업을 크게 일으켜서, 벼농사를 장려하였다.(『미수기언(眉叟記言)』 기언 별집 권19 「증 도승지 최공(贈都承旨崔公墓銘)」 참고. 이하 「최동식 묘명」이라 약칭함.) 그리하여 산이 많은 안변 지방의 ‘맥작(麥作) 농업’을 ‘도작(稻作) 농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 2) 12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참고.) 1611년(광해군 3) 2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는데, 임숙영(任叔英)이 별시(別試) 문과의 대책(對策)에 시정(時政)을 직언하였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방(榜)의 명단에서 삭제 당하게 되었으나, 사간최동식이 광해군에게 몇 달 동안 간쟁(諫爭)하여 임숙영은 무사히 급제할 수 있었다.(「최동식 묘명」 참고.) 그해 4월 장령최동식이 인혐(引嫌)하여 사피(辭避)하니, 광해군이 체직하였다가, 그해 11월 사간원 행사간(行司諫)으로 유임시켰다.(『광해군일기』 참고.) 1612년(광해군 4) 2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그해 5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그해 9월 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광해군일기』 참고.) 그때 광해군이 크게 공사를 일으켜 궁실(宮室)을 지었는데, 그는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이를 중지하라고 권유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때, 전 병사안위(安衛)가 평소 사소한 원망을 가지고 있던 진사 이평(李平)을 죽이려고 고변(告變)하고, 무뢰배를 시켜서 증거를 만들도록 하였다. 사간최동식이 옥사(獄事)를 심문하는 데 참여하여 무고한 사실을 밝혀내고, 수감된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니, 모두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그해 7월 군자감(軍資監)정(正)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다시 사간이 되었다.(『광해군일기』 참고.)
이때 대간(臺諫)에서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서 맨 먼저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고 인목대비를 따로 서궁(西宮)에 거처하게 하자는 의논을 꺼내자, 최동식은 대사헌최유원(崔有源), 대사간이지완(李志完)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다가 마침내 그들과 갈라섰다. 그는 광해군의 정치가 크게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병을 핑계대고 고향 남양으로 돌아왔다. 뒤에 여러 번 사간(司諫)과 보덕(輔德) 등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최동식 묘명」 참고.) 1614년(광해군 6) 1월 홍문록(弘文錄)에 수록될 유학자를 선발할 때 최동식은 동계(桐溪)정온(鄭蘊) 등과 함께 14명이 뽑혀서 실렸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1 참고.) 1614년(광해군 6) 6월 9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3세였다.(「최동식 묘명」 참고.)
성품과 일화
최동식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정도(正道)를 지키고, 검소함을 좋아하여 자신을 위해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조그마한 일에 개의치 않았다. 평생 세속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끝내 크게 출세하지 못했다. 그는 곤궁하다고 하여 근심하지 않았으나,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하면, 곧잘 시를 읊어서 위정자들을 조롱하기를 좋아했다.(「최동식 묘명」 참고.)
그가 대간에 있을 때 이조 정랑정호선이 간사하고 시기심이 많아서, 조금이라도 자기 뜻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모함하여 피해를 주었다. 정호선은 이조 좌랑송석조(宋碩祚)가 감히 이조 정랑에게 저항한다고 하여, 대간을 사주하였는데, 송석조가 차례에 건너뛰어 6품의 좌랑에 올랐다고 탄핵하였다. 또 병권을 잡은 병조 정랑에게 부탁하여 송석조를 북평사(北評事)에 의망(擬望)하도록 하여 외방으로 내쫓으니, 모두 분개하였다. 1604년(선조 37) 최동식이 사헌부 장령(掌令)에서 체직당하고 난 뒤, 어느 날 여러 사람들이 많이 모인 낭청(郎廳)에서 이조 정랑정호선을 비난하기를, “이조 정랑이 어떻게 이처럼 권력을 남용하는가? 예로부터 제멋대로 권력을 남용한 낭관 중에서 어찌 이와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마침 정호선이 그 자리에 있다가, 그 비난의 소리를 듣고 매우 노여워하였다.
정호선은 1605년(선조 38) 3월 최동식을 북방의 경성 판관으로 좌천시켜, 바로 북평사가 있는 땅, 바로 함경도 경성으로 내쫓아버렸던 것이다.(『선조실록』 참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정호선은, 사헌부를 사주하여, 그해 8월 최동식을 탄핵하기를, “경성 판관최동식은 본래 술을 좋아하는 자이므로 부임한 뒤로 술에만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 그가 데리고 간 자제들이 그 고을의 기생을 범해서 갖가지 폐단을 끼치고 있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노하여 그를 파직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611년(광해군 3) 최동식이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 소암(疎庵)임숙영이 별시 문과의 대책에서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이 횡포를 부리고 실권자 이이첨이 왕의 환심을 사려고 존호(尊號)를 올리려고 한다고 직언하였다. 마침 시관(試官)심희수(沈希壽)가 적극 그 시권(試券)을 취하여 임숙영은 병과로 급제하였다. 광해군이 임숙영의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방(榜)의 명단에서 임숙영을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사간최동식이 몇 달 동안 광해군에게 힘써 간쟁(諫爭)하고, 이항복(李恒福)이 이를 무마하여, 임숙영이 다시 급제하게 되었다. 임숙영은 나중에 사헌부 지평(持平)에까지 올랐고,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는데, ‘사륙병려체(四六騈麗體)’에 뛰어났다고 한다.(「최동식 묘명」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남양(南陽) 서쪽 덕동음(德冬音)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묘명(墓銘)이 남아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기언 별집 권19 「증 도승지 최공(贈都承旨崔公墓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장령(掌令)심원하(沈源河)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서출 자녀가 1남 1녀가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오리집(梧里集)』
- 『오산집(五山集)』
- 『우담집(愚潭集)』
- 『갈암집(葛庵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