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水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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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이나 연못 등의 자연 상태의 물을 제언, 천방, 수로 등과 같은 수리시설이나 수차, 용두레와 같은 수리도구를 통하여 농업용이나 식용으로 이롭게 이용하는 일.

개설

수리(水利)는 수리시설이나 수리도구를 통해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물을 저장하거나 흐름을 바꾸어 농사에 활용하는 일을 가리킨다. 먹는 물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우물 등을 파서 식수를 구하는 것도 수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수리의 주요한 부분은 농사에 물을 활용하는 것을 지칭했다. 계곡이나 평지의 높은 곳은 막아서 계곡물이나 빗물을 모아 저장하였다가 농사에 이용하는 제언이나 하천을 가로막아 하천물을 이용하는 천방(川防) 또는 보(洑)를 주된 수리시설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바닷가나 하천 연안의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 물이 침범하는 것을 막아주는 언(堰)도 축조되었다. 또한 수리를 위해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용하던 수차(水車)를 도입하여 제작하고 보급하는 일도 여러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위치 및 용도

수리시설을 위치 및 용도에 따라 나누면, 크게 제언, 천방, 해언으로 나눌 수 있다. 제언의 경우 계곡, 계곡물을 이용하는 수리시설이고, 하천물을 이용하는 것이 천방이며, 바닷물을 막는 시설이 해언이었다. 수원(水源)에 따라 수리 개발 방식이 달라졌다. 골짜기를 가로막는 제방을 축조하여 계곡물과 빗물 등을 저수하는 경우가 제언이었다. 하천을 가로막아 하천물의 수위를 높이고 이를 따로 개설한 수로, 구거(溝渠)를 통해 논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천방이었다. 또 바닷가의 간석지를 농지로 개발하기 위해 해수가 침범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쌓은 둑이 해언(海堰)이고 이렇게 개발된 논밭을 언전(堰田)이라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부터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 수리정책을 펼쳤다. 우희열, 이은 등 수리에 정통한 관료들을 동원하여 제언을 축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 벽골제, 눌제 등을 개축(改築)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수리정책은 제언과 천방의 축조 장려, 제언 천방의 관리 보수 강화 등의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정의 수리정책의 기조는 문종대 이후 제언에서 천방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조선 조정은 수리정책을 현장에서 실천할 주체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였다. 제언사는 때에 따라 설치되었다 폐지되기를 거듭했지만, 설치 시에는 주로 조선 전역의 수리시설 현황을 조사하고 때때로 관리를 파견하여 제언 등 수리시설의 축조 관리를 독려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비변사 전임당상의 하나로 제언당상을 설치하여 제언에 관련된 시책을 마련하고 시행하게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수리시설의 현황은 특히 각 군현별로 작성된 읍지(邑誌), 그리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조사 정리된 팔도지리지에 해당하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을 참고할 수 있고, 『탁지지(度支志)』, 『만기요람(萬機要覽)』 등도 중요한 참고문헌이다. 또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제언조사서(堤堰調査書)』 등 각종 조사문헌 등을 통해 수리시설의 현황을 찾아볼 수 있다.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문중양, 『조선후기 수리학과 수리담론』, 집문당, 2000.
  • 이광린, 『이조 수리사연구』, 한국문화총서 8, 한국연구원, 1961.
  • 이태진, 「16세기의 川防(洑) 관개의 발달」,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1.
  • 이태진, 「조선초기의 수리정책과 수리시설」, 『이기백 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 宮嶋博史, 「李朝後期の農業水利-堤堰(溜池)灌漑を中心に-」, 『동양사연구』41-4, 1983.
  • 최원규, 「조선후기 수리기구와 경영문제」, 『국사관논총』 39,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