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거(溝渠)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물을 끌어들이거나 내보내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

개설

구거(溝渠)는 물을 끌어들이고 내보내기 위해 조성한 도랑으로 구(溝)는 큰 물도랑, 거(渠)는 작은 물도랑을 가리킨다. 논밭 주변에 조성한 도랑뿐만 아니라 가옥이나 건물 주변에 만든 도랑도 포함된다. 한성부 내에 조성한 개천, 성곽 외부에 적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해자도 구거의 일종이다. 구거에 쌓이는 토사를 제거하는 준설작업이 수시로 이루어져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구거의 관리는 농지 주변의 농민, 마을 주민, 개천 주변의 거주민 등이 맡아 수행하였는데, 다만 한성부 내 구거의 관리는 금화도감(禁火都監)에서 담당하였다.

위치 및 용도

제언에서 이어지는 구거인 경우 농지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설치된 물도랑이었다. 각 군현의 수령은 매년 농사를 시작하기 이전에 제언을 보수, 수리하는 것과 더불어 구거의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수리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전답에 물을 댈 경우 수령은 반드시 구거를 잘 간수하여 농민들이 두루 관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해야 했다.

마을이나 가옥 인근에 자리한 구거를 잘 관리하여 큰 비가 올 때 범람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궁궐이나 사당 인근의 구거는 특히 관리에 주의를 집중하여 더러운 찌꺼기들이 큰물과 함께 넘쳐흘러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구거는 가뭄이 들 징조가 있을 때 가장 시급하게 정비해야 할 시설이었다. 가뭄의 조짐이 있으면 논밭 두렁을 잘 정비하고, 물도랑을 깨끗하게 치는 일을 먼저 해야 했다.

변천 및 현황

구거는 평상시에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여주고, 불필요한 물을 빼내주는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하지만 큰 비가 내려 큰물이 나게 되면 구거의 크기로 감당할 수 없어 물이 넘쳐흐르기 마련이었다. 이럴 경우 구거를 따라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도랑 인근의 논밭이 물에 잠기거나, 개천 인근의 가옥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피하지 못하였다.

한성부가 커다란 도회지로 발전한 조선후기에 도성 내에 큰 비가 내리면 크고 작은 구거가 모두 넘쳐흘렀다. 홍수가 난 도성 내 구거는 온갖 더러운 것이 물과 함께 흘러내려갔다. 홍수가 그친 뒤 구거 속에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인골(人骨), 채 흘러내려가지 못한 오물 등이 뒤엉켜 있어 많은 수고를 기울여야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지방의 읍치지역에 자리한 구거도 한성부의 개천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큰비가 오게 될 때 군현 읍치의 군현 읍치지역의 구거 사정도 한성부 개천과 마찬가지였다. 구거 주변 주민을 동원하여 토사를 준설하고, 더러운 것을 소착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형태

관련사건 및 일화

참고문헌

  • 문중양, 『조선후기 水利學과 水利담론』, 집문당, 2000.
  • 위은숙, 『고려후기 농업경제연구』, 혜안, 1998.
  • 이광린, 『李朝水利史硏究』, 한국문화총서 8, 한국연구원, 1961.
  • 宮嶋博史, 「李朝後期の農業水利-堤堰(溜池)灌漑を中心に-」, 『동양사연구』 41-4, 1983.
  • 이태진, 「16세기의 川防(洑) 灌漑의 발달」,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1.
  • 이태진, 「조선 초기의 水利정책과 水利시설」, 『이기백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 최원규, 「조선후기 水利기구와 경영문제」, 『국사관논총』39, 국사편찬위원회,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