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성(申翊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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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8년(선조 21)∼1644년(인조 22) = 57세.]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宣祖)의 부마(駙馬)로 봉호는 동양위(東陽尉)이다. 자는 군석(君奭)이고, 호는 동회거사(東淮居士)인데, 스스로 호를 낙전당(樂全堂)이라 불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신흠(申欽)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청강(淸江)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9년(선조 32) 11월 나이 12세 때에 선조의 서출 제 3왕녀이자 후궁 김인빈(金仁嬪)의 소생인 정숙 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청음집(清陰集)』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東陽尉申公神道碑銘)」] 1607년(선조 40) 12월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40년 12월 3일]

1613년(광해군 5)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江華島)로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처형하였다. 그때 많은 서인(西人)들이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을 갔는데, 아버지 신흠도 파직되어 전리(田里)에 추방되었다. 그때 신익성도 아버지를 따라가서 자취를 감추었다. 1616년(광해군 8) 대북(大北)의 이이첨 · 정인홍(鄭仁弘)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려고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궁정의 뜰에 나아가서 차례로 대비를 폐위하도록 상소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정청(庭請)’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인의 중진들은 이에 반대하고 ‘정청’ 참여하지 않았다. 부마 신익성도 반대하는 뜻을 고수하고, 이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어떤 사람이 화복(禍福)으로써 신익성을 위협하면서, 광해군에게 의견(意見)을 올리라고 타일렀으나, 그는 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바른 일을 하고 죽는다면, 마음속에 흡족할 것이다.” 하고,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대북의 이이첨 등이 그를 멀리 귀양보내도록 상소하였으나, 광해군이 부마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신익성이 대죄(待罪)하고 어명을 기다린 지 몇 년이 되었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1618년(광해군 10) 2월 정청에 나아가서 참여한 당상관은 2백 45명이었으나, 이를 반대하고 정청에 참여하지 당상관은 모두 38인이었다. 그 명단 안에 신익성을 비롯하여 조응록(趙應祿) · 김위(金渭) · 이시발(李時發) 등이 있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2월 9일] 결국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시켜서 그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함께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켜버렸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들을 등용할 때 그는 부마이기 때문에 품계만을 1자급(資級) 승품하였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가 어머니 상(喪) 중에 있었는데, 인조가 기복(起復) 곧 상중에 벼슬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다. 신익성이 재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세(事勢)가 아주 급박하여, 담복(禫服) 차림으로 종군(從軍)하니, 인조가 보검(寶劍)과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궁(三宮)을 호위(扈衛)하게 하였다. 어가(御駕)가 수원(水原)에 이르렀을 때에 인조가 그를 불러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와 같이 어렵게 되었으니, 경은 모름지기 힘을 다하여 왕실을 도우라.” 하였다. 그때 신익성은 사은(私恩)하면서 진언(陳言)하기를, “체통(體統)을 세우고 위령(威靈)을 떨쳐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도록 하며, 간도(間道)로써 서도(西道)의 절도사(節道使)를 불러들여 적도(賊徒)의 후면(後面)을 제압하고, 양호(兩湖)의 근왕병(勤王兵)과 연합하여 앞뒤에서 협공하도록 하소서.” 하니, 인조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옳다.” 하였다. 대신들이 대가(大駕)는 독성(禿城)에 머물고, 삼궁(三宮)은 내포(內浦)에 나누어 머물러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극력 역설(力說)하자, 부마 신익성이 애써 그 불가한 점을 하나하나 따져서 반박하였다. 그 의논은 마침내 중지되고, 삼궁도 대가를 따라가게 되니, 두 대비(大妃)와 왕후(王后)가 모두 안도하였다. 이리하여 인조가 그에게 도총관을 특별히 제수(除授)하여 ‘호가사(扈駕使)’라고 일컫고, 체찰부(體察府)의 유병(游兵)을 나누어 거느리고 위험할 때 여러 군영(軍營)과 협력하게 하였다. 대개 공주(公州)로 피난할 때 신익성이 계책을 내어서 실행에 옮긴 것이 많았다. 얼마 안 되어 반란군이 진압되고 서울로 돌아오자, 부마 신익성이 상소(上疏)하여 복제(服制)를 끝마치게 해달라고 청원하면서, 이어서 시폐(時弊)를 진언(陳言)하였는데, 모두 사리(事理)에 합당한 말이었으므로, 인조가 가납(嘉納)하였다. 신익성은 공주까지 인조를 호종(扈從)한 공로로써 품계 1자급을 더하였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1626년(인조 4) 명(明)나라 조사(詔使)한림(翰林)강왈광(姜曰廣)과 급사(給事) 왕몽윤(王夢允)이 우리나라에 와서 조서(詔書)를 반포하고 돌아갈 적에 부마 신익성이 왕명을 받들고 평양(平壤)에 가서 그들을 전송하였는데, 이는 예문관(藝文館)에서 신익성이 시(詩)를 잘 짓는다고 특별히 뽑아서 보낸 것이다. 왜냐하면, 전송하는 관리는 중국 조사(詔使)와 시(詩)로써 서로 창화(唱和)하기 때문이었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가면서 부마 신익성에게 유시하기를, “세자(世子)를 보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라.” 하고, 내구마(內廐馬)와 궁검(弓劍)을 내리었다. 오랑캐 군사들이 물러가자,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알현하였다. 소대(召對)할 때에는 또 내구마와 얼룩무늬가 있는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인목 왕후(仁穆王后)가 돌아가자, 빈전도감(殯殿都監)제조(提調)가 되었다가,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1632년(인조 10) 5월 추숭(追崇) 때의 모든 집사(執事)와 도감(都監)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공에 따라 상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부마 신익성은 서사관(書寫官)이었으므로,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633년(인조 11) 5월 개제주 분황제(改題主焚黃祭)를 거행하였는데, 아헌관(亞獻官)으로서 숙마 2필을 포상 받았다.[『인조실록』인조 11년 5월 12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10만 명의 오랑캐 군사를 대대적으로 거느리고 침입하여 10일이 못되어 도성(都城)에 육박하므로,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여 오랑캐 군사와 싸울 때 부마 신익성은 도총관으로서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인조가 45일 동안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강화도가 함락되고 먼저 피난 갔던 비빈과 왕자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의 주장에 따라 삼전도(三田渡)에 내려가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하여 ‘사대(事大)의 예(禮)’를 행하고, 명나라와 관계를 끊기로 약속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명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배후에 조선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빨리 화의(和議)를 맺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 태종은 화의를 맺은 조문을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에 새기도록 하고, 청나라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돌아갔다.

당시 대다수 종실(宗室) 사람들과 부마들은 빨리 화의가 진행되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 신익성은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1637년(인조 15) 8월 제주관(題主官)이 되어, 한 자급을 더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8월 28일) 1638년(인조 16) 도총관을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배명(拜命)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묘전(墓田)의 막사에서 거처하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일의 일을 기록하여 남한산(南漢山) 아래 삼전도에 비석(碑石)을 세우게 하였는데, 인조가 신익성에게 명하여 비액(碑額)을 전문(篆文)으로 쓰게 하니, 그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병을 핑계하고 사양하였다. 1639년(인조 17) 6월 인조가 하교하기를, “삼전도 비문을 속히 인쇄하여 청나라에 보내야 폐단을 면할 수 있다. 서사관은 서로 미루고 핑계해서는 안 되니, 전문(篆文)은 신익성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신익성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을 삼전도 비문 서사관으로 삼았으나, 결단코 병든 몸으로 이 일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쓰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17년 6월 25일 · 6월 26일] 그때 신익성은 신익전(申翊全) · 허계(許啓) · 이명한(李明漢) · 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척화 5신(斥和五臣)’이라 칭해졌다. ‘척화 5신’이 청나라를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해서, 1642년(인조 20) 12월에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1643년(인조 21) 2월 ‘척화 5신’이 심양에 도착하자, 청인(淸人)이 칼을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하고서 동관(東館)에 구금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1년 2월 11일) 마침 소현 세자가 그 무함(誣陷)당한 것을 밝혀서, 사건이 드디어 중지되었고, ‘척화 5신’은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신익성은 교외(郊外)에서 자취를 감추고 살았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1644년(인조 22) 7월 병이 위중해져 차자(箚子)를 올리고, 인하여 자신이 지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9권을 바치니, 인조가 그 책과 차자를 홍문관(弘文館)에 내려주었다.[『인조실록』인조 22년 7월 28일] 이어서 7월 『동사보편(東史補編)』 9권을 바치니, 인조가 그를 가상히 여겨 장려하고 그것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다.[『국조보감』 권36] 인조가 의원(醫員)을 보내어 위문(慰問)하기를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해 8월 2일 명례방(明禮坊) 제택(第宅)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57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양전(兩殿)에서 각각 중사(中使)를 보내어 고자(孤子)를 조문(弔問)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고 부증(賻贈)을 예제(禮制)대로 하였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인조실록』인조 22년 8월 2일 「신익성 졸기」]

저서로는『낙전당집(樂全堂集)』, 『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 『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이 있다.

<병자호란> 때 척화 5신 -부마 신익성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나라를 휩쓸고 10일이 못되어 도성에 육박하므로 그가 도총관으로서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길게 포위망을 치고 남한산성을 핍박하면서 강화(講和)하기를 강요하니, 정부에서 이에 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익성이 말하기를, “자고(自古)로 화의가 일을 그르치니, 청컨대 사벽(四壁)을 굳게 지켜서 제장(諸將)을 독려하여 필수(必守)의 결의(決意)를 보여야 합니다.” 하였다. 인조가 나와서 산성(山城)을 순시(巡視)하고 그에게 나아가서 묻기를, “이 산성(山城)을 지킬 수 있겠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주상에게 움직일 수 없는 결의(決意)가 있고, 신하에게 적개(敵慨)하는 결심이 있으면 지킬 수 있습니다.” 하자, 인조가 이로써 안색(顔色)을 바로하면서 하교하기를, “신익성은 궁성(宮城) 호위를 전적으로 도맡도록 하라”고 하였다.

수일 후에 최명길 등이 인조에게 권하여 강화하기를 청하는 데 더욱 주력하니, 인조가 그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전일과 같이 말하고서 또 말하기를, “저들이 반드시 청종(聽從)하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우리측에 요구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튿날 청나라가 과연 세자를 볼모로 삼을 것을 요구하고, 정부의 의논이 모두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다. 인조는 45일 동안 남한산성에서 버티면서 싸웠는데,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였다. 그보다 앞서 강화도에 비빈(妃嬪)과 왕자들을 피난시켰는데,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비빈과 왕자들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조정의 김상헌(金尙憲) 등 척화파(斥和派)의 주장을 물리치고,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의 주장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인조가 장차 하성(下城)하려고 할 적에 주화파의 재상이 그가 이의(異議)를 제기하였다고 하여 호종하는 반열(班列)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가 이 말을 듣고 한밤중에 합문(閤門)을 두들기면서 말하기를, “설사 비상(非常)한 일이 있더라도, 몸으로써 순사(殉死)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인조가 이에 호종하기를 허락하였다. 인조는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서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 내려가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하여 ‘사대의 예’를 행하고, 명나라와 관계를 끊기로 약속하였다. 청나라 태종도 명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배후에 조선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빨리 화의를 맺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부마 신익성은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여, 의빈(儀賓) 가운데 척화파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종실(宗室) 사람들과 부마들은 빨리 화의가 진행되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환도(還都)하자, 호종한 공로로 품계 1자급을 더하고, 종묘(宗廟)에 제주(題主)하여 또 품계 1자급을 더하니, 이때에 위계(位階)가 재상(宰相)의 반열(班列)이 되었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청나라 태종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화의하기로 결정하고 약속한 사실을 한어(漢語) · 몽고어(蒙古語) · 여진어(女眞語)의 3개국어로 기록하여 남한산 아래 삼전도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인조가 신익성에게 명하여 비액(碑額)을 전문(篆文)으로 쓰게 하니, 그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병을 핑계하고 사양하였다. 이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 자가 심양에 가만히 일러바치기를, “신익성이 명나라를 위하여 수절(守節)한다.”고 하였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1638년(인조 16) 12월 삼전도 전문 서사관으로서 반숙마(半熟馬) 1필을 받았다. 1639년(인조 17) 6월 인조가 하교하기를, “삼전도 비문을 속히 인쇄하여 청나라에 보내야 폐단을 끼치는 일을 면할 수 있다. 서사관은 서로 미루고 핑계해서는 안 되니, 오준(吳竣)으로 하여금 쓰게 해서 말을 주어 청나라로 발송하고, 전문(篆文)은 신익성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 하였다. 이에 신익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을 삼전도 비문 서사관으로 삼았으나, 신은 이미 임금이 욕을 당하던 날 죽지 못하여 항상 깊은 한을 품었으므로, 결단코 병든 몸으로 이 일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쓰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16년 12월 12일, 인조 17년 6월 25일 · 6월 26일]

그때 신익성을 비롯하여 신익전 · 허계 · 이명한 · 이경여를 ‘척화 5신’이라고 칭하였다. 1642년(인조 20) 10월 우리나라 사람이 명나라 배[漢船]를 접대하고 비밀 무역을 하였다는 이유로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가 봉황성(鳳凰城)에서 나와서 관련된 사람들을 심문하였는데, 이때 선천 부사(宣川府使)이계(李烓)가 본국이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이들 ‘척화 5신’이 청나라를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고하여, 12월 ‘척화 5신’은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갔다. 1643년(인조 21) 2월 전 정승 이경여, 동양위신익성, 전 판서이명한, 전 참판허계, 전 정언신익전 등이 심양에 당도하니, 청인들이 칼을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하고서 동관(東館)에 구금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1년 2월 11일) 사세가 장차 예측하기 어렵게 되자, 보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이연(夷然)하게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그들도 감히 가해(加害)하지 못하였다. 마침 소현 세자가 그 무함당한 것을 밝혀서, 사건이 드디어 중지되었고, ‘척화 5신’은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부마 신익성은 교외(郊外)에 나가서 자취를 감추고 지내었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신익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天性)과 기풍(氣風)이 호걸스럽고 상쾌하며, 괴위(魁偉)한 얼굴과 아름다운 수염이 반행(班行)에서 특출(特出)하여 위의(威儀)가 뚜렷이 빛나니, 사람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경외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엄하고 굳센 듯하나 속으로는 실상 너그럽고 넓으므로, 그를 따르고 앙모(仰慕)하는 자가 많았다. 일을 행할 적에는 세쇄(細瑣)한 일에 구애하지 않으며, 집안에서 행하는 바를 돌아보면, 특히 순비(純備)하여 아버지를 섬김에는 뜻을 살펴 잘 봉양하였다. 이미 지위가 귀하게 되고 궁(宮)을 달리하여 살았으나, 날마다 몸소 온정(溫凊)하고 좌우에서 힘써 받들며, 하명이 없으면 물러가지 않았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고, 담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문장과 필법이 모두 뛰어났다. 다만 그가 성품이 조용하지 못하였고, 또 산업을 경영한다는 비난이 있었다.『인조실록』인조 22년 8월 2일 「신익성 졸기」]

선조가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어느 날 궁중에서 숙직(宿直)할 적에 당시 대가(大家)의 글에 화답(和答)하도록 명하고, 빨리 짓기를 독촉하자, 그가 즉시 초를 잡아서 바쳤다. 선조가 크게 칭찬하고 곧 백마(白馬) 1필을 하사하였다. 인조가 장차 원종(元宗)의 사묘(私廟)를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려 하자,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못하였는데, 인조가 그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할 만한 일을 하는 것은 효(孝)가 되나, 할 수 없는데 하는 것은 효가 아닙니다.” 하였다. 백료(百僚)가 궁정에서 이를 논쟁할 때, 그의 지은 바 문자(文字)의 사연을 가지고 말하자, 인조가 앞서부터 그의 말을 싫어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그를 크게 책망하니, 그가 교외에 나가 대죄(待罪)하였으나, 견책(譴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가 휴가를 얻어 고성(高城)의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고 관동(關東)의 여러 명산(名山)에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는데, 가는 곳마다 그가 쓰서 남긴 제영(題詠)이 널리 세상에 퍼져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전하여 읊고 있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아버지 신흠이 법망(法網)에 걸려 귀양살이할 때, 가업(家業)이 더욱 쇠락하여져서 조석(朝夕)을 이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의복 · 음식으로부터 제매(弟妹)의 혼가(婚嫁) 이하의 일까지도 모조리 그가 처리하여 어버이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다. 소시(少時) 때부터 50세가 넘도록 입조(立朝)하기 46년 동안에는 성심(誠心)으로 임금을 받들고 조정에 과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종일토록 불안하게 여기면서, 지위에서 벗어나는 일임을 꺼리지 아니하고, 때로는 혹은 노장(露章)도 하고, 혹은 항언(抗言)도 함으로써 비록 비방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746년(영조 22) 2월 영조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좌의정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의빈 가운데 동양위신익성은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참으로 뛰어났는데도 아직 절혜(節惠)의 은전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시호를 내리도록 명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영조가 옳게 여겼다. 이에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다.(『영조실록』 영조 22년 2월 27일 · 10월 7일)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청음집(清陰集)』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東陽尉申公神道碑銘)」]

부인 정숙 옹주(貞淑翁主)는 선조와 김인빈의 딸이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신면(申冕)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다음은 신승(申昇), 신경(申炅), 신최(申最), 신향(申晑)이다. 딸들은 각각 홍명하(洪命夏)와 강문두(姜文斗)와 김좌명(金佐明)에게 시집갔다.[『청음집』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계곡집(谿谷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사상록(槎上錄)』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송도기이(松都記異)』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도기행(燕途紀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평일기(延平日記)』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계집(牛溪集)』
  • 『우복집(愚伏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조경일록(朝京日錄)』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청백일기(靑白日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사록(海槎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학포집(學圃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약포집(藥圃集)』
  • 『청강집(淸江集)』
  • 『학봉집(鶴峯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중봉집(重峰集)』
  • 『악록집(岳麓集)』
  • 『월사집(月沙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월당집(月塘集)』
  • 『학주전집(鶴洲全集)』
  • 『시남집(市南集)』
  • 『백호집(白湖集)』
  • 『고산집(孤山集)』
  • 『서하집(西河集)』
  • 『염헌집(恬軒集)』
  • 『직재집(直齋集)』
  • 『명곡집(明谷集)』
  • 『유재집(游齋集)』
  • 『장암집(丈巖集)』
  • 『소재집(疎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