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문(閤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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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내외(內外)와 공사(公私)의 경계로 설정되는 문.

개설

합문은 조선시대 궁궐에서 내외와 공사의 경계로 작용한 개념이다. 특히 내전과 외전 사이에 위치하는 편전 영역에 설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의례에 따라 외부의 문이 되기도 하고, 실내의 문이 되기도 한다. 합문은 의례가 설행될 때에는 주체가 되는 인물과 여타의 다른 인물들 사이에 경계로 작용했다. 그러나 정사와 경연 등의 실내 의식에서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경계로 존재했다.

내용 및 특징

궁궐은 예의 구현을 위한 의례 설행 공간의 조성, 왕실 일상생활의 수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간 구성이 좌우되었다. 조선시대 궁궐은 크게 외전 영역과 내전 영역으로 구분되었는데, 그 경계는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이때 설정되는 내외 공간의 경계로서 합문이 정의되었다. 다시 말해, 합문은 궁궐에서 특정한 공간이나 영역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다수의 궁궐에서 내외(內外)와 공사(公私)의 경계로 존재해 왔다.

조선의 궁궐은 정전, 편전, 침전이라는 중심 전각으로 각각의 영역이 대표된다. 이 중 정전이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가 치러지는 외전의 성격을 갖는다면, 침전은 왕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내전의 성격을 갖는다. 두 전각의 사이에 있는 편전은 왕이 일상적인 정치 행위를 하는 장소로서 물리적으로는 내전에 포함되어 사적인 영역이지만, 기능적으로는 정사를 돌보는 외전에 포함되어 공적인 영역을 내포하였다. 이 때문에 궁궐에서 내외의 경계가 되는 합문은 편전이 위치하는 영역에 놓였다.

『세종실록』 「오례의」를 통해 조선전기 경복궁에서 조회(朝會)가 설행되는 절차를 살펴보면, 합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왕이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에서 의례를 위한 준비를 한 다음 여(轝)를 타고 합문을 통과해서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때 합문으로 설정되는 문은 사정전 전면에 있는 사정문(思政門)이다.

그런데 사정전 실내에서 행하는 상참의 절차에서도 합문이 등장한다. 조선전기의 사정전은 가운데 3칸 규모의 청(廳)을 두고 좌우에 각각 방(房)을 둔 평면 형태이다. 이때 합문은 왕의 준비 및 대기 공간인 방(房)과 행례 공간인 청(廳)을 구획하는 문이 된다. 근정전 및 근정문(勤政門) 의례에서 내외의 경계가 사정전 외부의 사정문에 형성되었던 것에 비해 사정전 의례에서는 경계가 전각의 실내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왕의 합문 외에 문무관 및 승지·통찬이 통과하는 합문도 있다. 이들은 합문 밖에서 대기하다가 합문으로 들어와 사정전으로 올라서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합문은 반드시 왕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참여하는 왕실의 여러 주체들의 동선에도 나타난다. 중궁, 왕세자, 세자빈의 의례에서도 모두 합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발견할 수 있다.

합문은 의례가 설행될 때에는 왕실의 주요 인물과 다른 인물들 사이에, 정사와 경연 등의 왕실 의식이 있을 때에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 경계로서 존재했다. 이것은 당대 사람들이 유가적 영향력 아래서 신분과 남녀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형성한 의식적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왕이라는 특수한 인물을 정점으로 하는 질서 체계가 반영되었다.

변천

합문이라는 개념은 고려시대의 궁궐에서도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는 합문의 개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선 공적(公的) 공간과 사적(私的) 공간을 구분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의례 설행 시 주요 행례자의 연속되는 동선 위에 존재하여 공간 간의 경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상하(上下) 구분의 의미를 지녔다. 이는 왕과 신하가 정사(政事)를 볼 때 신분상의 경계로 작용하였다. 셋째로, 남녀의 내외 구분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합문은 의례 설행 시 왕실 여성의 대기 공간 의미로 기능했다. 넷째로, 편전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는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궁전을 의미할 때 쓰였다. 마지막으로, 편전의 앞문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는 연회 배설 등을 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내외의 경계가 되는 합문 주위로는 그 내부를 수비하고 호위하는 담당 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합문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를 범할 경우에는 엄중하게 처벌 받았다. 왕이 전교를 내려 입시를 허락할 때까지 신하들은 편전 영역 내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오랜 전통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이때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공간적 내외 경계이자 신분적 경계로 존재하는 것이 합문이었다.

조선후기에는 본래 왕이 학문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정사와 경연 등의 정치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 본래의 편전을 대신하여 공식적인 편전으로 전용된 건물들이 많아진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과 경희궁 흥정당(興政堂)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합문이라는 용어가 등장해서 왕과 신하들 사이의 경계를 설정했다. 특히, 정조대에는 흥정당으로 출입하기 위해 설치된 현모문과 광달문(廣達門)에 직접적으로 합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6일). 흥정당은 궁궐 전체의 배치에서도 내전과 외전의 경계에 위치해서 정전과 침전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세진, 「합문을 통해 본 조선시대 궁궐의 내외개념」,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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