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묘(私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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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의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생부와 생모 또는 폐위된 왕실 구성원을 제사지내는 사당.

개설

사묘(私廟)는 사가(私家)의 사당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반적으로 후궁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경우나 방계(傍系)에서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사친(私親)의 사당을 지칭하였다. 이들은 일반 왕족보다는 위상이 높으면서도 종묘에는 들 수 없는 왕족이어서 별도의 사당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이나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 등을 사묘로 지칭하였다.

조성 경위

왕실 구성원들의 사당에 관한 기록은 조선전기부터 나타나는데, 연산군의 경우 생모인 윤씨(尹氏)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당시 집의(執義) 유빈(柳濱)이 윤씨를 위해 별도의 사당을 세우자는 조정 신료들의 논의를 전하며 윤씨 사당 건립을 재고하도록 요청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10월 1일). 이로써 본다면 폐비된 왕비의 아들이나 후궁의 아들, 또는 방계에서 왕위에 즉위한 경우 별도의 사당을 세워 이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사묘는 왕실 차원에서 건립하기도 하였고, 사당에 모셔지는 사람의 종가 일부를 사당으로 조성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종가에 조성된 사묘로는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사당을 들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덕흥대원군의 사당은 종가의 옛터에 한 칸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는 곳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관리가 부실해서 1605년(선조 38)에는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사당은 선조의 형인 하원군(河原君)의 홀로 된 며느리가 관리하였는데, 신주를 종의 집 들창문 아래에 두어 먼지가 쌓이게 하는 등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8년 5월 9일)

이렇게 종가에 조성되었던 사당은 화재 등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는데,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 사당의 경우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으로 화를 당하자 광해군 즉위 직후인 1608년(광해군 즉위) 서울의 연지동에 있는 옛 궁의 청사에 옮기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이때 공사는 국가적인 차원에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사당의 조성을 마친 뒤에 내관 방준호(方俊豪)나 김언해(金彦海) 등에게 관직을 주거나 상을 내렸다(『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25일).

한편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사당은 덕흥대원군이나 공빈김씨의 사당과는 조성 경위가 차이가 있다. 숙빈최씨의 사당은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조성되었는데, 처음에 영조는 사당을 자신이 성장하고 생모가 사망한 잠저(潛邸)인 창의궁에 건립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잠저에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는 반대 여론에 따라 새로 사당 자리를 논의하여, 1725년(영조 1) 12월 23일에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완성하였다.

조성 상황

조선시대 국왕 중 상당수가 방계나 후궁 소생인 경우가 많아, 시간이 경과하면서 사묘는 계속 증가하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사당 이외에도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 사당,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김씨의 사당, 인조의 생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사당,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사당,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사당,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 등이 조성되어 사묘로 불렸다. 이밖에도 진종(眞宗)의 생모인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사당이나 장조(莊祖)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사당 등이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사묘의 구조를 보면, 정면 3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며, 사당의 신실(神室)에는 신주와 국왕이 거둥할 때 위엄을 보이기 위해 갖추었던 칼 등의 노부류(鹵簿類) 등이 소장되었다. 신주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에 제향을 올린다. 제향은 왕이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 대신 등이 대행하는 섭행(攝行)으로 나뉜다. 제수의 종류는 종묘대제(宗廟大祭)와 다르며, 선원전(璿源殿)에서 행하는 다례(茶禮)와 유사하다.

변천

사묘는 영조 연간에 궁원제(宮園制)가 시행되면서 ‘○○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영조 이전 시기 방계나 서자 출신의 국왕이 즉위하면 사당이나 묘소를 중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753년(영조 29)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사당을 육상궁(毓祥宮)으로, 묘소를 소령원(昭寧園)이라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궁원제가 확립되면서 이전의 사묘는 궁(宮)으로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사친의 사당은 ‘묘(廟)’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그 격이 이전에 비해 상승하였다.

이후 국왕의 생모와 후궁의 사당에 ‘궁’을 붙이는 것이 일반화되어,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사당을 저경궁(儲慶宮)으로,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사당을 연호궁(延祜宮)·영빈이씨의 사당을 선희궁(宣禧宮)으로, 정조의 빈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을 경우궁(景祐宮)으로, 고종의 후궁이자 영왕(英王)의 생모인 귀비엄씨(貴妃嚴氏)의 사당을 덕안궁(德安宮)이라 명명하였다. 1778년(정조 2) 연호궁을 육상궁으로 옮겼고, 1908년(융희 2)에 도성 곳곳에 흩어진 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 등을 육상궁으로 옮기면서 육궁(六宮)이 형성되었다. 1929년 7월 덕안궁을 마지막으로 육상궁으로 옮기면서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관련 사항

사묘에 대해서는 국왕의 참배 시기가 정해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의 경우는 매년 세수(歲首)와 봄·가을로 예조(禮曹)에서 국왕에게 보고한 뒤 택일해서 참배하였고, 숙빈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은 매년 3월에 행하였으며, 선희궁(宣禧宮)은 매년 9월에 시행하였다. 반면 경우궁이나 덕흥대원군 사당은 국왕의 특별한 명이 있을 때에 참배하는 예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사당에 대한 참배는 대개 사당에 모셔진 인물의 기일에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 임민혁, 『영조의 정치와 예』, 민속원, 2012.
  • 박용만, 「육상궁의 조성과 칠궁의 연혁」, 『숙빈최씨자료집』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0.
  • 이왕무, 「영조의 私親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 정경희, 「조선후기 궁원제의 성립과 변천」, 『서울학연구』2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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