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최(申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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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최 |
한글표제 | 신최 |
한자표제 | 申最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효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계랑(季良) |
호 | 춘소(春沼)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19년(광해군 11) |
사망 | 1658년(효종 9) 1월 |
본관 | 평산(平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廣州) 사부촌(莎阜村) |
증조부 | 신승서(申承緖) |
조부 | 신흠(申欽) |
부 | 신익성(申翊聖): 동양위(東陽尉) |
모_외조 | 전주 이씨(全州李氏): 정숙 옹주(貞淑翁主), 선조(宣祖)의 딸, 김인빈(金仁嬪)의 딸 |
형제 | (형)신면(申冕), 신변(申昪), 신경(申炅) |
처_장인 |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희세(沈熙世)의 딸 →(자녀)2남 7녀 |
자녀 | (1자)신의화(申儀華) (2자)신범화(申範華) (1녀)권두추(權斗樞)의 처 (2녀)한백기(韓百箕)의 처 (3녀)김환(金奐)의 처 (4녀)권적(權頔)의 처 |
저술문집 | 『동관내외편(童觀內外篇)』,『예가부설(禮家附說)』,『춘소자집(春沼子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최(申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효종 1년 6월 19일, 『효종실록』 효종 2년 6월 13일, 『인조실록』 인조 21년 2월 11일 |
총론
[1619년(광해군 11)∼1658년(효종 9) = 40세.]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를 지냈다. 자는 계랑(季良)이고, 호는 춘소(春沼)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동양위(東陽尉)신익성(申翊聖)이고, 어머니 정숙 옹주(貞淑翁主)는 선조(宣祖)와 김인빈(金仁嬪)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신흠(申欽)의 손자이고, 이조 참판신익전(申翊全)의 조카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35년(인조 13) 나이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고 1648년(인조 26) 나이 30세에 정시(庭試)문과(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처음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곧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다.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를 역임하였는데, ‘신정(新政)에 먼저 힘써야 할 시무(時務)’를 아뢰자, 인조가 절목을 요약(要約)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승문원 박사(博士)를 거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인조가 야대(夜對)에서 정자(程子)의 심학도(心學圖)를 논할 적에 좌우(左右)의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나아가 지적하며 풀이하는 데에 막히는 곳이 없으니, 인조가 칭찬하고 벼슬을 내렸다. 사관으로 있은 지 3년 동안 여러 차례 임면(任免)을 되풀이 하였다가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서 예문관 봉교(奉敎)에 승진되었는데, 그해 겨울에 가화(家禍)가 일어났다. 이에 그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온 가족을 데리고 선영(先塋) 아래로 이사를 가서, 묘전(墓田)을 생활의 바탕으로 삼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동주집(東州集)』 문집 권9 「함경도도사 신군 묘갈명(咸鏡道都事申君墓碣銘)」]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6월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한원(翰苑)의 고사(故事)를 들으니, 새로 천거할 때에는 지방의 관원에게도 두루 알리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습니다. 참하관(參下官)에 있어서는 비록 파산(罷散) 중인 자일지라도 가부를 논의하는 것은 시임관(時任官)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천거에 대한 일이 결정되기 전에 사적으로 가부를 말하며, 다만 하리(下吏)들의 말만 따라 앞질러 개좌(開坐)한 일은 이미 옛 규례에 어긋납니다. 검열조사기(趙嗣基) · 신최를 중히 추고하소서.” 하였다.(『효종실록』 효종 1년 6월 19일)
1650년(효종 1) 춘추관 사관이 되어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경연(經筵)에서 한 말을 퍼트렸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윤11월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조귀석(趙龜錫)을 불러다 물어보니, 조귀석이 말하기를 ‘사관신최는 바로 나의 외종 동생이다. 내가 우연히 편지로 경연에서의 대화에 대해 물었는데, 신최가 우리 아버지가 비방을 받았다는 뜻으로 대략 통지해 주었다. 내가 이날 본원에서 입직하는데 가주서(假注書)이명익(李明翊) 이 마침 와서 보고 또 그 말을 전해 주었다. 내가 그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정원으로 가서 주서가 일을 기록한 초고를 구해 보았고, 그 내용을 아버지에게 서신으로 보고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효종이 하교하기를, “경연에서 한 말이 도처에 전파되었다. 나라의 기강이 비록 무너졌으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 또한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명익과 신최를 모두 잡아다 형추(刑推)하라. 조귀석이 당초 편지로 남에게 물은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이어 효종은 신최의 파직을 명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윤11월 22일]
1651년(효종 2) 6월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찍었는데, 8점을 받았다.(『효종실록』 효종 2년 6월 13일)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653년(효종 4) 강원도낭천 현감(狼川縣監)으로 나갔는데, 그곳은 폐현(廢縣)된 지 이미 10년이어서 온갖 폐단이 많았으므로, 힘을 다해 시설(施設)하고 개혁하려고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못하매 사임하고 돌아왔다. 1656년(효종 7) 다시 함경도 도사로 나갔다. 세상의 시달림을 받아 깊은 산골 머나먼 변방으로 두 번이나 쫓겨나고 풍토가 맞지 않아서 원기(元氣)마저 소모되었으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풍토병에 걸려 있었다. 그해 겨울을 지내자, 더욱 심해져서 1658년(효종 9) 1월에 돌아갔는데, 향년이 40세였다.[『동주집』 문집 권9 「함경도도사 신군 묘갈명」]
일찍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학문의 도리(道理)에 몰두한 나머지 19세에 『동관내외편(童觀內外篇)』을 지어서 수리(數理)를 밝히고, 이어 십일원(十一原)을 지어서 뜻한 바를 분변하였으며, 『예가부설(禮家附說)』을 지어서 의심나는 곳들을 고증하였으니, 그 서술한 것이 수만에 이르렀으며, 넘쳐 통하고 막힘이 없어서 조금도 유감(遺憾)이 없었다.[『동주집』 문집 권9 「함경도도사 신군 묘갈명」]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부(賦)에 뛰어났는데 시부(詩賦) 약간이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전한다. 저서로는 『예가부설』, 『춘소자집(春沼子集)』, 『동관내외편』 등이 남아 있다.
가화 -<척화 5신> 신익성의 수난
가화(家禍)는 아버지 신익성이 청(淸)나라와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척화파(斥和派)의 선봉장이 되어서 활동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고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수난의 시기를 말한다. 아버지 신익성은 신익전(申翊全) · 허계(許啓) · 이명한(李明漢) · 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척화 5신(斥和五臣)’으로 지목되어 1642년(인조 20) 청나라에 잡혀가서 혹독한 심문을 받고, 심양의 동관(東館)에 구금되었다.(『인조실록』 인조 21년 2월 11일) 얼마 후에 볼모로 심양에 와 있던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노력과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지의 화해 정책에 의하여 신익성은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에 신익성은 교외(郊外)에서 자취를 감추고 살았다.[『청음집(清陰集)』 권25 「동양위 신공 신도비명(東陽尉申公神道碑銘)」]
본래 집안이 대대로 선비의 조행(操行)을 일삼아 행실을 쌓고 덕(德)을 길러서 후세에 끼쳐 줄 만한 것이 있었지마는, 뜻밖에 가화를 당한데다가 형 신경(申炅) 또한 영동(嶺東) 강릉(江陵)의 바닷가에서 우거(寓居)하면서 천지간에 풀길 없는 한(恨)을 안고 지내던 터라 신최는 매양 홀홀하여 감격(感激)하고 통분(痛憤)히 여겼다. 그래서 신최는 이따금 술에 취하여 실컷 울기도 하면서 생계를 돌아보지 않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동주집』 문집 권9 「함경도도사 신군 묘갈명」]
성품과 일화
신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동주집』 문집 권9 「함경도도사 신군 묘갈명」] 그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어른스러웠고, 보통 사람과 다른 자품(資稟)과 세상에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가졌다. 1627년(인종 5) 어머니 정숙 옹주가 돌아갔을 적에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가슴을 두드리고 슬피 울면서 조객들에게 절을 하는데도 예법(禮法)에 어긋남이 없었다. 글을 지을 때에는 저절로 얻어지다시피 독주하여, 얽어 다듬을 때에는 중국 고대 진한(秦漢) 시대의 체재(體裁)를 따랐으며, 때로는 근세 명(明)나라 융성기(隆盛期)의 여러 대가를 모방하여 반드시 법도가 있어서 볼 만하였고, 더욱 사부(辭賦)에 뛰어나 거의 신의 조화(造化) 가운데서 우러나온 듯했으므로, 명성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해졌다. 그가 이미 세상을 등지고 한가로이 지낼 적에 스스로 호(號)를 ‘춘소(春沼)’라 하고, 마음을 다하여 시를 지었는데, 조화(調和)롭고 풍족한 재주로써 그 침울(沈鬱)하고 출적(出寂)한 생각을 펼쳤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시대로부터 버림을 받아 스스로 당세에 나타날 수가 없지만, 나로 하여금 더욱 시(詩)에 힘을 기울이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더욱 닦고 매만져 어떤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일에 간여하겠는가? 백년을 파묻혀 있더라도 수 천년 뒤에 나를 알아 줄 사람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도 또한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부촌(莎阜村)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동주(東洲)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동주집(東州集)』 문집 권9 「함경도도사 신군 묘갈명(咸鏡道都事申君墓碣銘)」] 신최의 무덤은 할아버지 신흠의 무덤 오른쪽에 있다.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홍문관 교리(校理)심희세(沈熙世)의 딸인데, 자녀는 2남 7녀를 낳았다. 장남 신의화(申儀華)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를 지냈으나, 일찍 죽었다. 차남 신범화(申範華)는 진사로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장녀는 정자(正字)권두추(權斗樞)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백기(韓百箕)에게, 3녀는 김환(金奐)에게, 4녀는 권적(權頔)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주집(東州集)』
- 『청음집(清陰集)』
- 『소화시평(小華詩評)』
- 『농암집(農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복집(愚伏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택당집(澤堂集)』
- 『검재집(儉齋集)』
- 『귀계유고(歸溪遺稿)』
- 『귀암집(歸巖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남계집(南溪集)』
- 『농암집(農巖集)』
- 『백주집(白洲集)』
- 『번암집(樊巖集)』
- 『양와집(養窩集)』
- 『외재집(畏齋集)』
- 『육곡유고(六谷遺稿)』
- 『일봉집(一峯集)』
- 『정관재집(靜觀齋集)』
- 『지호집(芝湖集)』
- 『춘소자집(春沼子集)』
- 『팔곡집(八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