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헌(柳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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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2년(세조 8)∼1506년(중종 1) = 45세.] 조선 중기의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입은 청백리(淸白吏).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증직(贈職)은 참판이다. 자는 백여(伯輿), 또는 자여(子輿)이며, 호는 낙봉(駱峯)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유수장(柳秀漳)이고, 어머니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대구부사(大丘府使)조효생(趙孝生)의 딸이다. 이조 참판유계번(柳季藩)의 조카이고, 영의정(領議政)유영경(柳永慶)의 증조부이다.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헌은 시조 유습의 6대손이다.

성종 · 연산군 시대 활동

1486년(성종 17)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3년 뒤에 1489년(성종 20)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방목』]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1492년(성종 23) 승문원(承文院) 주서(注書)로 옮겼다. 1493년(성종 24)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형조와 호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사헌부로 들어가서 지평(持平)으로 승진되었는데, 그때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김일손(金馹孫) 등과 같이 대간(臺諫)에서 활동하였다. 사헌부 지평유헌이 아뢰기를, “남자중[僧]이 여염집에 사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있으나, 여자중[尼]을 금지하는 법이 없으므로, 지금 동대문 밖에 여염집 사이에 여승[尼僧]들이 사삿집을 짓고 사는데, 철거하여 함께 거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사간원 헌납김일손이 아뢰기를, “여승의 무리가 과부 집에 출입하면서 자못 추잡한 소문을 내고 있으니,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자, 연산군이 ‘그리하라.’고 허락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1년 11월 12일] 이 시기에 유헌과 김일손은 양사(兩司)의 5품 벼슬 지평과 헌납으로 있으면서 서로 뜻을 같이하여 나라의 일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1498년(연산군 4) 7월 사림파(士林派) 김일손이 춘추관의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끼워 넣었는데,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 · 이극돈(李克墩)이 이 글을 가지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을 풍자하였다고 무고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 제자 김일손 등 20여 명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하거나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때 사초에 관련된 사림파를 심문하기 위하여 임시낭청인 가낭청(假郎聽)을 설치하였는데, 지평유헌은 훈구파 성희안(成希顔) · 남곤(南袞) 등과 함께 죄인을 국문(鞫問)하는 데에 참여하여, 심문이 끝난 다음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를 보면, 유헌은 훈구파에 속한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 1500년(연산군 6) 8월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되어, 연산군의 비행(非行)과 폭정(暴政)에 대하여 직언(直言)하여, 대간의 풍도(風度)를 지켰다. 그해 9월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의 강론이 끝나자, 사헌부 집의유헌이 외척의 발호(跋扈)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연산군이 화를 내기를, “신수영(愼守英)을 승지로 삼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구나.”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9월 29일] 신수영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그해 10월 집의유헌은 대사간이예견(李禮堅)과 함께 내수사(內需司)에서 장리(長利)를 놓는 행위를 공박하니, 연산군이 변명하기를, “비록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더라도 이것은 대비전(大妃殿)을 위한 것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10월 9일)

1501년(연산군 7) 2월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4품으로 승품(陞品)되고, 9월 평안도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되어 평안도 압록강 연안의 성보(城堡)를 돌아보고 여러 가지 폐단을 보고하여, 군사의 장비를 개선해서 오랑캐에 대한 방어를 철저하게 하였고, 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농민과 군사의 생활을 안정시켰다.(『연산군일기』 연산군 7년 9월 1일) 1502년(연산군 8)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과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냈다. 봉상시(奉常寺)정(正)을 거쳐 마침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역임하고, 1504년(연산군 10) 조정으로 돌아와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갑자사화>와 유헌의 죽음

1504년(연산군 10) 유헌이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정으로 돌아오자마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신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처음에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제헌왕후)가 성종 때 사사(賜死)된 경위를 잘 모르고 있다가, 이때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어머니가 폐위(廢位)되어 죽게 된 전후사정을 알고,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폐비(廢妃) 사건에 관여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金宏弼) 등 살아있는 대신 10여 명을 사형에 처하고,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정창손(亭昌孫) 등 죽은 여러 대신들을 부관참시하고 그 가족까지 멸족시켰다. 당시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이세좌(李世佐)의 친족도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또 연산군에게 직언(直言)하던 대사간유헌과 조지서(趙之瑞) · 권달수(權達手)·정성근(鄭誠謹) 등의 소장 학자들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는데, 연산군은 모두 전일의 간언(諫言)을 문제 삼았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영(愼守英)이 임사홍의 사주를 받고 <갑자사화>를 일으키자, 대사간유헌은 상소하여 신수영의 죄를 논박하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임사홍과 유자광의 흉악한 실상을 폭로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대사간유헌이 4년 전에 사간원 집의로 근무할 때 내수사의 장리 행위를 공박한 것을 문제 삼았다. 1500년(연산군 6) 10월 경연에서 대사간이예견이 내수사에서 장리를 놓는 행위를 논박하였다. 영사(領事)이극균이 아뢰기를, “대간이 이 일을 논박한 지 오래 되었는데, 내수사의 장리는 조종(祖宗) 때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양전(兩殿)의 봉양과 왕자(王子)들의 길례(吉禮)에 소용되는 비용도 많으므로, 신 등도 또한 전하가 재화(財貨)를 늘리려는 것이 아니고, 마지못하여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대간의 논박하는 요지는 수령들로 하여금 장리를 내주고 징수하게 하는 것이 조종 때에 없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집의유헌이 아뢰기를, “담당관원[委差]로 하여금 징수를 감독하게 하여도 오히려 곡식을 약탈하는 폐단이 있는데, 만약 수령으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한다면, 그 해유(解由)에 참고 자료가 될까봐 두려워하여, 사채(私債)의 예(例)에 의해서 독촉하여 징수할 것이므로, 백성들이 그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시강관(侍講官)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내수사의 장리는 본래 의리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 비록 갑자기 개혁할 수 없더라도 만약 수령으로 하여금 이를 감독 징수하게 한다면 백성들에게 폐해가 많을 것이니 대간의 말을 들어주소서.” 하였다. 연산군은 변명하기를, “비록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더라도 이것은 대비전을 위한 것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10월 9일) 이 사건에 대해 연산군은 재론하여 유헌을 죄주었는데, 1504년(연산군 10) 6월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유헌이 ‘내수사의 장리는 나중에 어디에다 쓰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은 어세겸(魚世謙)이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를 잡아와서 그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6월 4일]

대간에서 유헌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그 죄를 의논하기를, “내수사의 장리의 일을 유헌이 제마음대로 아뢰었고, 홍문관 박사김양보(金良輔)는 분부를 듣고도 시행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모두 무겁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은 유헌과 김양보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流配)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유헌은 장(杖) 1백 대를 맞고 제주도로 귀양 가서 종[奴]이 되었고, 김양보는 장 1백 대를 맞고 거제도로 귀양 가서 종이 되어, 2년 동안 고역(苦役)을 치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6월 25일) 1505년 5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연산군의 처남 신수영은 그 형 신수근(慎守勤), 그 아우 신수겸(慎守謙)과 함께 3형제가 죽음을 당하였고, 이듬해 유헌과 김양보 등은 모두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1506년(중종 1) 9월 유헌과 김양보는 본토로 돌아가는 배를 얻어 타고 추자도(楸子島)에서 정박하여 하룻밤을 묵다가, 3포(浦)에 거주하던 왜인의 해적떼가 습격하여 살해당하였다.[『모재집(慕齋集)』 권10] 이때 유헌의 나이가 45세였다. 조정에서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을 보내어 이를 문책하려고 하였는데, 대신 중에서 우선 도주(島主)에게 유시하여 회답을 받아본 뒤에 사신을 보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이미 3포(三浦)의 왜인들이 조선의 제한된 교역 정책에 불평불만을 품고 대마도의 도주와 손을 잡고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약탈행위를 일삼았던 것이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년 12월 3일 · 중종 2년 윤1월 22일]

압록강 연안의 오랑캐 방어 대책

15세기 전반기 세종은 두만강(豆滿江) 유역의 오도리(斡朶里)족과 오랑캐(兀良哈)족을 정벌하고,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두만강을 따라 5진(鎭)을 개척하고, 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5진 사이에 성보(城堡)를 만들고 행성(行城)을 쌓아서,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조선에서 두만강 유역의 방어를 철저히 하자, 건주(建州) 3위(衛)의 여진족 중에서 두만강에 살고 있던 건주 좌위 · 우위의 오도리족은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婆猪江: 동가강)에 살고 있던 건주 본위로 이동하였으므로, 15세기 후반기에 조선은 압록강의 동가강(佟家江: 파저강) 일대에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를 강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연산군 시대 유헌이 평안도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압록강 연안의 고을을 시찰하고 군장비와 성보를 점검하고, 농민과 군호(軍戶)의 실상을 조사하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 경차관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하던 관리를 말한다.

1500년(연산군 6) 9월 1일 평안도 경차관 유헌이 압록강 연안의 여러 고을과 진(鎭) · 보(堡)를 돌아보고 여러 가지 폐단을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안도의 군사들은 오랫동안 변방에 있으므로 1년에 집에 있는 날이 2, 3개월에 지나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점점 조잔(凋殘)하게 되어 군대의 장비도 다 해어져서 나무활[木弓]을 가진 사람이 반이 넘으며, 혹은 막대기 하나만 가지고 활과 칼이 없는 사람도 있고, 말[馬]과 군복도 또한 이어대지 못합니다.” 하고, 유헌은 그 대책으로 군기시(軍器寺)의 갑옷과 투구와 활과 화살을 평안도의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여러 섬[島]에서 기르고 있는 말들을 알맞게 나누어 주어서 지친 군호(軍戶)의 삶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압록강 강변의 역말[驛馬]의 숫자가 적어서, 모든 봉명(奉命) 사신(使臣)이 지나갈 때에는, 군사들의 말을 차출하여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게 하는데, 길이 지극히 험해서 한차례 왕복에도 말이 자빠지고 엎어지는 일이 많아서 혹은 길가에서 말이 죽게 됩니다.” 하고, 유헌은 역말을 바꾸어 주는 <쇄마(刷馬)의 법>을 엄격히 제정하여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다음으로 “압록강 강변의 거주민들은 대단히 빈곤한데도 먼 곳의 토지는 변방 장수들이 농민들이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갈까봐 두려워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 그리고 농민들의 진 · 보의 출입도 또한 제때를 맞추지 못하여, 아침에는 반드시 안개가 걷히고 칭라올(稱羅兀: 너울)을 걸친 다음에야 성문을 열고 나가며, 저물 때는 해가 지기 전에 도로 들어와야 하니, 이로 말미암아 시기를 맞추어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못하여 생업(生業)을 잃게 됩니다.” 하고, 유헌은 변방 장수들이 오랑캐의 방어에만 몰두하지 말고 농민들이 농사를 제때에 지을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고, 나라에서 변방 고을의 조세를 감면하여 백성들의 지친 삶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다음으로 “각 진(鎭)과 보(堡)의 거리가, 가까운 곳은 15리 남짓하고 먼 곳은 20리 남짓하여 모두 길이 트였으므로 서로 구원할 수가 있는데, 오직 아이보(阿耳堡)과 산양회보(山羊會堡) 두 보만은 두 곳의 거리가 거의 60리가 되고 그 사이에 마시리(麻時里) 들판과 나하동(羅下洞)이 있는데, 이곳은 평탄하고 넓어서 살 만한 땅인데도 버려두고 지키지 않기 때문에, 오랑캐가 비록 와서 둔취(屯聚)하더라도 사람들이 알 수 없습니다. 또 이곳은 오랑캐의 땅인 파저강(婆猪江: 동가강)의 동네 입구와 서로 마주 보므로, 저들 오랑캐들이 자피선(者皮船: 짐승 가죽으로 만든 작은 배)을 만들어 타고 반드시 파저강을 따라서 내려옵니다.” 하고, 유헌은 “신의 생각으로는, 마시리 들판에 큰 진을 설치하면, 오랑캐의 배가 내려올 수가 없으므로 아이진과 산양회진도 모두 서로 구원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압록강 연안에 15리~20리마다 진 · 보를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하여, 평안도 초산(楚山)의 산양회보 · 아이보 사이에 큰 진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다음으로 “평안도는 땅은 넓으나 백성들이 드물어, 군대의 숫자가 본래 적은데다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히기도 하고, 스스로 유망(流亡)하기도 하여 날마다 줄어들고 달마다 적어져서, 압록강 연변의 각 고을을 장차 지키지 못할까봐 염려됩니다.” 하고, 유헌은 “신의 생각으로는, 잠시 남쪽의 군졸을 옮겨서 압록강 연안의 빈 땅을 채우면 군대의 숫자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헌은 세종 시대 ‘사민(徙民) 정책(政策)’을 다시 추진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다음으로 “평안도는 군량미(軍糧米)가 적은데도 농사지을 수 있는 빈 땅이 매우 많아서 운산(雲山) · 희천(凞川) · 영변(寧邊) · 평양(平壤) 등지에는 비옥한 땅이 멀리 넓게 바라볼 수 있는데도, 모두 개간하여 농사를 짓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유헌은 “신의 생각으로는, 널리 둔전을 설치하여 3포(三浦)에 살고 있는 선군(船軍)을 옮겨와서 그들로 하여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한다면 군량미가 조금 넉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경상도 3포의 선군을 평안도 지방으로 사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유헌의 ‘사민 정책’과 둔전은 실행되지 않았으나, 1500년 평안도 경차관 유헌의 보고는 1595년 남부(南部) 주부(主簿)신충일(申忠一)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만큼 국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성품과 일화

유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한다. 그는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며, 도량이 넓었다.[『연려실기술』 권6] 그는 어려서부터 과묵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오로지 한 마음으로 학문하는 데에만 뜻을 두었다.[「유헌 묘갈명」]

유헌은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 벼슬하면서 정직하게 행동하고 권력에 굴하지 아니하였다. 연산군 시대 초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서 연산군의 비행과 실정(失政)을 비판하다가,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외직으로 쫓겨나서 충청도 수사가 되었다.[『연려실기술』 권6] 1500년(연산군 6) 9월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의 강론이 끝나자, 당시 사헌부 집의였던 유헌은 “예로부터 나라를 그르친 임금은 혹은 소인배들이 용사(用事)하거나 환관들이 권세를 부리고 외척(外戚)들이 득세하였으니, 임금이 그 기미를 방지하고 점염(漸染)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전하가 근래에 외척의 대우를 너무 후하게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때 사간원 정언손세옹(孫世雍)도 아뢰기를, “유헌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화를 내기를, “신수영을 승지로 삼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구나. 비록 외척이라도 하더러도 사람이 현명하다면 어찌 임용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9월 29일]

1504(연산군 10) 승지신수영이 임사홍의 사주를 받아서 대신들을 무함하여 <갑자사화>를 일으키자, 당시 대사간이었던 유헌은 상소하여 신수영의 죄를 논하고, 신수영을 앞세워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임사홍과 유자광의 간사하고 흉악한 실상까지 모조리 폭로하였다. 또 좌의정이극균이 그 조카 이세좌와 함께 아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다고 그 원통함을 호소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즉시 유헌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연려실기술』 권6]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송산리(松山里) 수락산(水落山)에 있고,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중종반정> 직후에 중종이 그 억울한 죽음을 가엾게 여겨서 특별히 참판(參判)으로 추증하였다.[「유헌 묘갈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인 명산수(明山守)이금정(李金丁)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세붕(柳世鵬)은 종친부(宗親府)전부(典簿)를 지냈고, 차남 유세린(柳世獜)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고, 3남 유세귀(柳世龜)는 종친부 전첨(典籤)을 지냈고, 딸은 종실 해안정(海安正)의 아들인 생원(生員)이승형(李承亨)에게 시집갔다.[「유헌 묘갈명」]

유헌은 <갑자사화>의 화(禍)를 입고 끝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아들 4형제 중에서 차남 유세린이 이조 참판을 지냈고, 또 3남 유세귀의 아들 유감(柳堪)과 유훈(柳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舍人)과 형조 판서를 각각 역임하였다. 또 유세린의 손자 유영경(柳永慶)소북(小北)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냈다. 전주 유씨의 유명한 인물들이 그 후손들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유헌은 전주 유씨의 유습파 발전에 초석이 된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충재집(冲齋集)』
  • 『모재집(慕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