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안(成希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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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1년(세조7)∼1513년(중종8) = 53세]. 조선 중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판관(判官)성찬(成瓚)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정종의 아들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의 딸이다. 교리(敎理)성희증(成希曾)의 동생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80년(성종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1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 ·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기용되었다. 1492년(성종23) 병조에서 문신으로서 무재가 있는 사람이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게 하여 쓰임에 대비하자는 청을 올릴 때, 성희안은 유순정(柳順汀)과 함께 추천되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후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도모하였다. 1493년(성종24) 다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가서 수찬(修撰) · 교리(校理)로 승진하였으며 한어(漢語)와 이문(吏文)질정관(質正官)으로서 성절사(聖節使)를 따라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1)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고, 이듬해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1498년(연산군4) 사섬시(司贍寺)첨정(僉正)으로 승진되었고, 한성부 서윤(庶尹)을 거쳐, 광흥창(廣興倉)수(守)로 옮겼다. 이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는데, 성희안은 유자광(柳子光)이 옥사(獄事)를 국문(鞫問)하는 데에 낭관(郎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풀어주었다. 예빈시(禮賓寺) ·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내섬시(內贍寺)정(正)을 지냈다. 1499년(연산군5) 군기시 부정으로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이계전(李季全)의 종사관이 되어, 오랑캐를 정벌할 때 활약하였다. 1500년(연산군6) 군기시 정이었을 때 유구국(琉球國) 사신(使臣)의 선위사(宣慰使)로 임명되어 그들을 소홀함 없이 접대하였다. 1502년(연산군8)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서 북경에 다녀와, 예조 참의로 옮겼다. 1504년(연산군10) 형조 참판 · 이조 참판이 되었고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이 해에 서반(西班)의 말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까닭을 『해동야언(海東野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의 망원정(望遠亭)으로 놀러나가 문무대관(文武大官)들로 하여금 각각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그의 시에, “성주(聖主)의 마음은 원래 청류(淸流)를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연산군이 이것을 보고 자기를 비방한다고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고, 서반(西班)의 말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시키고 3년 동안 옮겨 주지 않았다.

그가 부사용으로 있는 3년 동안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심해져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정치가 혼란스러웠으므로, 1506년(중종1) 9월 그는 중추부 지사박원종(朴元宗)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하고, 여기에 이조 판서유순정을 끌어들였다. 이 세 사람이 주동이 되어 군자감 부정신윤무(辛允武) · 군기시 첨정박영문(朴永文) · 수원부사(水原府使)장정(張珽) · 사복시 첨정홍경주(洪景舟) 등에게 군사를 동원시켜 거사에 성공하고, 연산군을 체포하여 강화도에 유폐시키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중종으로 옹립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1) 중종이 즉위하자마자, 성희안은 익운 정국공신(翊運靖國功臣) 1등으로 책훈(策勳)되어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창산군(昌山君)이 되었다. 성희안을 비롯하여 반정을 이끌었던 박원종 · 유순정 세 사람의 위세에 대해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에서는 이들 3인이 당시에 ‘정국공신(靖國功臣) 3대장(大將)’이라 일컬어졌는데, 이들이 실권을 잡았고 중종도 이들에게 의존하였기 때문에 3인이 입시(入侍)하였다가 물러나갈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배웅하였다고 했다.

중종이 즉위하여 중국 명나라 황제에게 고명(誥命)을 두 번씩이나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1507년(중종2)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신용개(申用漑)와 함께 명나라 북경에 가서 마침내 고명을 받아 왔다. 중종이 크게 기뻐하여 두 사람에게 토지와 노비를 특별히 하사하여 그 노고를 포상하였다. 그 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할 때 총재관(總裁官)으로서 춘추관 감사(監事)를 맡았다. 1507년(중종2)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의금부 판사 · 이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1509년(중종4)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1510년(중종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병조 판서를 맡아서 안윤덕(安潤德)을 도체찰사로 삼고, 좌의정유순정을 도원수로 삼아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512년(중종7)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513년(중종8) 영의정에 승진하였다. 1513년(중종8) 여름 병에 걸렸는데, 그 해 7월 27일 병이 위중하자, 자리를 정침(正寢)으로 옮기고 숨을 거두니, 향년이 53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희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체구는 작으나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말을 잘하여 좌중을 경동시켰다. 천성이 민첩하고 문무의 재질을 갖추어서,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었다. 감식(鑑識)이 매우 높아 사물에 통달하고 밝았다.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용감하게 실행하였다. 사람과 사귈 때에는 충성과 신의를 지키도록 서로 권장하였고, 어질지 않은 사람은 벗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현량(賢良)한 인재를 좋아하여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좋은 점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좋아하였다. 1513년 병에 걸렸으나 왕의 만류로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지 못하자 직무를 소홀히하였다 하여 녹봉을 받지 않기도 했다.

연산군이 대간(臺諫)의 신하들을 많이 죽이면서, 관리들이 아주 심한 좌절을 겪었으므로, <중종반정> 초기에 직언하는 풍토가 진작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언론(言論)에 대하여 간관(諫官) 중에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장려하여 관계에 진출시켰고, 또 임금에게는 간관의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비록 자기 자신이 직접 탄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직 공론(公論)이 다시 활발해지기를 바랐으며, 관리들도 그를 믿고 스스로의 책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구은(舊恩) 때문에 유자광 등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이나, 자기의 어리석은 친척들까지 모두 반정 공신으로 끌어들여 후일의 화단을 열어 놓았다고 식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 서산리(西山里)의 선영(先塋)에 있으며, 그의 친구 좌의정신용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4) 부인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사헌부 장령(掌令)조익상(趙益祥)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성율(成瑮)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서 중추부 지사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이요정집(二樂亭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각잡기(東閣雜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