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호(軍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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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역 복무자인 정군과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봉족으로 이루어진 군대 편성의 단위.

개설

고려시대의 군호는 군인과 이들을 부양하는 양호(養戶)로 구성되어 군인 1명에 양호 2명이 배정되었다. 그런데 1356년(공민왕 5)에 병역제를 개혁하여 3가(家)로 1군호를 구성하였다. 평상시에는 3가에서 교대로 1정(丁)씩 번상(番上)하게 하고, 전란 때에는 3가에서 각각 1정씩 역을 내보냈으며, 그보다 더 비상시에는 모든 장정을 출동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 신분의 모든 남성을 군역복무자로 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가 확립되었다. 이 중에서 번상하거나, 지역을 지키는 정군을 호수(戶首)로 하고 이 호수의 경제적 뒷받침을 맡은 봉족을 역종(役種)에 따라 차등 있게 배정하여 하나의 군호가 되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양인개병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엄밀한 호구 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초에는 가호(家戶) 내의 인구 파악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태종 때의 봉족 공정에 의하면 갑사는 호수 1호와 봉족 1호로 군호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 호수와 봉족으로 구성된 군호제는 세조 때에 보법(保法)으로 바뀌어 군호의 편성도 인정(人丁) 단위로 바뀌었다. 즉 2정(丁)을 1보로 잡아 몇 개의 보가 호수를 돕도록 하였다. 이에 갑사는 2보[4丁], 기정병(騎正兵)·수군 등은 1보·1정[3丁], 보정병(步正兵)은 1보[2丁]를 배당받아 각각 하나의 군호를 이루었다.

1484년(성종 15)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역로(驛路) 운용 방식에 대해 논의하면서 군호(軍戶)와 향호(鄕戶)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성종실록』 15년 5월 21일).(태깅 오류 『성종실록』 이하 생략) 기사에 따르면 군호는 본래 양민이고, 향호는 천민이기 때문에 향호를 역(驛)에 소속시켰는데, 당시에는 향호와 군호를 구분하지 않는 관계로 양민을 역에 배속시켜 그들로 하여금 천역(賤役)을 지게 한 것이 지적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역로는 북경으로 사행(使行)을 떠나거나, 중국 칙사가 방문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역사(驛事)가 천역이라 해도 양민의 역인 군호를 겸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군호는 원칙적으로 양인으로 구성되며, 천민도 군호의 방식으로 역에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세조 때에 실시된 호적 개정사업과 호패제도 강화에 힘입어 봉족제도는 1464년(세조 10)에 보법 체제로 전환되었다. 갑사와 기병·정병 등은 몇 명의 보인을 배당받아 정군으로 군역을 지고, 보인은 이들에게 면포를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16세기에 군호를 단위로 하는 정군과 봉족의 구성은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17세기에 제도적인 정비를 통하여 통치 체제를 급속도로 회복시켜 갔다. 그 과정에서 군역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새롭게 모색되었다. 훈련도감 같은 전문 군인을 양성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예산을 투입하기 시작하였고, 기존의 국가기관에 대해서도 그들의 군역 징수에 의거한 인력 동원 및 재원 확보 활동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군역제도의 변화는 정병의 보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16세기 초에 심화된 번상 보병의 역졸화(役卒化)는 군역을 대신서는 대립제(代立制)를 발생시키고, 이어 직업적인 대립인까지 등장시켰다. 이들 대립인과 이서(吏胥)층의 농간으로 대립가(代立價)가 폭등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정병과 보인이 잇달아 도망가자 기존의 군역제가 형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1541년(중종 36) 정부는 번상 정군 가운데 기병을 제외하고 보병에 한하여 개인적으로 주고받던 대립가의 수납 절차를 통일시키는 군적수포법(群籍收布法)을 실시하였다. 이 법은 번상병이 번상을 하지 않고 정해진 포(布)만 납부하면 지방관이 이를 병조(兵曹)에 보내고, 병조는 이 포를 각 부처에 나누어 주어 대립(代立)하는 장정에게 지급케 하는 제도였다. 그 결과 보병의 번상 의무는 없어지고 호수와 보인 모두 국가에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의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기병의 경우, 1663년(현종 4) 재해를 당한 읍에 한하여 상번기병 중에 납포(納布)로 대신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허락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군적수포법은 상번기병(上番騎兵)에게도 점점 확대되어 18세기에는 거의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수군과 지방에 남아 수비하는 유방군(留防軍)의 경우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16세기 초 이후 지방의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만호(萬戶) 등의 지방관에 의하여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가 확산되었다. 그 결과 이들도 수포군화(收布軍化)되어 사실상 군적수포법과 동일한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군적수포법은 임진왜란 이후 급료병(給料兵)으로 구성된 오군영(五軍營)이 설치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오군영 정병을 제외한 모든 병종(兵種)에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호수와 보인은 각각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것은 병조의 중요한 수입원으로서 국가 재정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군적수포법은 군역 부담 방식이 입역(立役)에서 포를 징수하는 물납(物納)으로 전환하는 실마리를 연 제도였다.

참고문헌

  • 윤용출, 「17, 18세기 役夫募立制의 成立과 展開」, 『韓國史論』 8, 1982.
  • 손병규, 「18세기 良役政策과 지방의 軍役運營」, 『軍史』 39, 國防軍史硏究所, 1999.
  • 이태진, 「朝鮮前期 軍役의 布納化 過程」,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9.
  • 정연식, 「조선후기 ‘役摠’의 운영과 良役變通」,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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