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代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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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역이나 요역 등 부역노동을 부담하는 사람이 대가를 지불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입역하게 하는 일.

개설

대립 행위는 군역의 분야에서 15세기 말엽부터 대두하였다. 이 대립 현상은 당초 입번 군사 가운데 경제적 능력을 보유한 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곧 각 관서의 서리·노자(奴子) 등 관속들이 오히려 군사들에게 대립을 강요하는 형태로 상황이 바뀌었다. 서리나 관속들은 대립가를 높게 책정한 다음, 대신 입역할 서울 주민을 알선 소개함으로써 많은 중간이득을 얻고자 대립을 강요한 것이었다. 16세기 군역에서 대립가를 공식적으로 결정한 조치는 사실상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 곧 군역에서의 납포제를 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립은 요역의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군역·직역이 특정 인신을 대상으로 한 것인 데 비해, 요역은 불특정의 민호를 그 징발 대상으로 하였다. 또 군역과 직역의 부역노동이 정기적·정량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요역은 부정기·부정량적이라는 데서 군역의 대립 현상과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대립제가 형성 전개되는 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신역에서의 대립제가 결국 고립제의 성립으로 이어진 바와 같이, 요역에서의 대립제도 고립제를 초래하였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 등 토목공사에서 요역에 징발된 외방 농민들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사로이 대립 행위를 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품삯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급가모립(給價募立)의 모립제(募立制)는 요역노동 분야에서 적용되었던 고립제인 것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이 시행된 뒤, 과도한 군액의 책정으로 일반 가호에 돌려진 군역 부담이 늘어났다. 이에 대응하여 군역을 부담하는 지방 농민들은 대립의 방식으로 무거운 군역노동의 부담을 면하려 하였다. 군역의 분야에서 대립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역제는 주로 지방에서 농민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중앙 및 지방에서 벌어지는 각종 역사에 투입하는 노동력 조달 방식이었다. 이 같은 요역노동은 17세기 이후 그 비효율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원거리 징발의 비효율성은 요역을 부담하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대립을 모색하게 했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부역군이 도성 주변에서 1개월의 부역노동에 응하려면, 사실상 왕래 일자를 포함한 50여 일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17세기 초, 산릉역에 1개월간 부역하기 위한 경상도 농민의 1인당 부담액이 포 20필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주지에서의 영농에 지장을 받을 뿐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경제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로부터 대립가를 치르고 대립인을 세우는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용 및 변천

군역에서의 대립은 15세기 말부터 성행하였다. 번상하는 군사들은 처음 자발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점차 소속 관서의 관속들에 의해 대립이 강요되는 일이 많았다. 관서의 이서(吏胥)·관노 등이 대립을 강요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한잡인(閑雜人)과 결탁하여 대립을 알선해 주고 부당한 중간이득을 취하였다. 지방 군영의 지휘관이 소속 지방군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대신 포(布)를 거두어들이는 방군수포(放軍收布) 현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493년(성종 24) 정부가 대립가(代立價)를 책정한 것은 이서·관노의 무리한 대립가 요구 행위를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조치였다. 이는 사실상 대립제를 공인하는 조치였다.

중종대에는 납포제(納布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사 가운데 상당수가 군적(軍籍)에 오른 것을 기준으로 군포를 바치는 것으로 군역의무를 다하게 된 것이다. 군역은 양인 농민의 물납세로 변모한 셈이었다. 군역이 물납세화되면서 양반층의 군역 부담은 자연히 면제되고, 오직 양인만이 군역을 전담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군역을 부담하는가 여부는 양반과 양인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16세기 말의 군제는, 이처럼 납포제가 일반화되는 가운데 대안으로서 상비 병력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개전초기의 전투에서는 관군이 극히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정부에서 전면적인 군정 징발을 시도하였으나, 대립은 다시 유행하였고 번가(番價) 대납의 관행 또한 부활되었다. 전쟁 기간에 도성의 상번군사는 흔히 대립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방의 입번군(立番軍)이 흔히 호적이나 군적에 오르지 않은 무적지배(無籍之輩)로서 대립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의 거둥 시에 호위하는 군사나 궐문의 수직군사를 비롯한 도성 각처의 입역 군졸이 거의 대립인이었다.

군역제가 동요하는 가운데에서 전쟁으로 인해 군적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던 점, 게다가 개별적인 대립의 행위를 규제할 만한 통제력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점 때문에 대립 행위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군역에서의 대립이 하나의 유력한 생활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전쟁 기간의 특수한 사정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각지에서 몰려오는 유민을 비롯하여 경중의 기민(飢民)들이 상번군 대립의 인적자원이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성 내의 사대부 관료를 비롯한 양반들이 자신의 사노(私奴)를(사노비를) 보내 대립가 수입을 도모하는 일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층의 기민으로부터 양반층의 노비 소유자에 이르기까지 대립은 하나의 호구지책이 될 수 있었다. 도성의 상번군뿐 아니라 외방의 각종 입번군에 있어서도 대립의 폐단이 지적되고 규제 조치가 강구되곤 하였다. 그러나 대립의 관행은 이후에도 쉽사리 종식되지(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농민개병(農民皆兵)의 원칙 아래 운영되던 이 시기 군역제의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역제의 운영에 있어서도 대립의 관행이 개입될 수 있었다. 요역은 군역과 달리 부정기·부정량적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었다. 그만큼 공식적으로 제도화되기도 어려운 면이 있었다. 요역에서의 대립 현상도 요역을 부담하는 농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서 비롯되었다. 17세기 초 산릉역에 동원된 부역군들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사로이 대립인을 세우고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도성에 거주하던 대립인들은 먼 지방에서 온 요역농민에게 무리하게 많은 대립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의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遷陵役)에서부터 천릉도감에서 이 같은 대립가를 일괄적으로 거두어서 역소(役所)에서 인부를 고용하는 재원이나 공용 경비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듬해(현종 15)의 인선왕후(仁宣王后) 산릉역에서는 요역농민인 개성부(開城府)의 연군(烟軍) 한 사람에게 쌀 5말[斗]씩 징수하여, 능소(陵所) 부근의 주민을 모립(募立)토록 조치하였다. 산릉도감에서 대립가를 거두어 노동력을 구매한 것이었다. 이후 개성부 연군이 이 같은 역사에 직접 징발되는 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정기적인 요역노동을 부담하던 방식으로부터 부정기적인 물납세로 개편된 것이라 하겠다.

요역농민들의 대립은 부역노동을 고용노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임시적 성격을 갖는 대립제는 급기야 대립가를 관에서 거두고, 이로써 모립의 재원을 마련하는 새로운 관행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요역제를 동요 개편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방식의 노동력 수급체계, 곧 모립제를 성립 발전시키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는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제가 붕괴 해체되는 경로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의의

군역제는 중세의 국가권력이 신분제적 지배 질서 아래에서 농민을 지배하고, 다시 이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을 수취하는 수취제도의 한 형태였다. 군역제는 각 시기의 농업생산력, 생산관계, 수취제도, 신분제도 등 사회구조와 관련해서 그 운영의 방식이 결정되었다. 전근대사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변동의 일정한 단계에 상응하는 새로운 부역제도가 마련되는 것이었다. 보법의 실시, 대립제·방군수포제의 확산, 수포제의 공식화, 급료병제의 도입, 양역변통, 균역법, 호포제 등으로 이어지는 15세기 이래 군역제의 변동 과정은 중세사회의 부역제도가 재편성되는 과정이며, 끝내 붕괴되는 경로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윤용출, 「壬辰倭亂 시기 軍役制의 동요와 개편」, 『釜大史學』 13, 1989.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이태진, 「軍役의 變質과 納布制 實施」,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한국군사연구실,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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