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양(蘇世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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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6년(성종17)∼1562년(명종17) = 77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 퇴재(退齋) · 퇴휴당(退休堂)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세거지는 전라도 익산(益山)이다. 아버지는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소자파(蘇自坡)이고, 어머니 개성왕씨(開城王氏)는 왕석주(王碩珠)의 딸이다. 한성부 판관(判官)소효식(蘇效軾)의 손자이고, 대사간소세량(蘇世良)의 동생이다.

중종 전반기 활동

1509년(중종4)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1510년(중종5)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겼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13년(중종8)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위호(位號)가 폐기된 지 거의 60년이었는데, 그가 복위(復位)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문종의 현릉(顯陵)으로 이장하고 태묘(太廟: 종묘)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1514년(중종9)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인종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빈전도감(殯殿都監)낭청(郎廳)이 되었다. 1516년(중종11) 군기시(軍器寺) ·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에 들어가서 사예(司藝) · 사성(司成)으로 승진되었다. 1517년(중종12)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1519년(중종14)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士林派)가 숙청되었다.

1520년(중종15) 중종이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 요속(僚屬)을 엄선하였는데, 소세양을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중종이 인종을 부탁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옮겼다가, 사복시 부정(副正)을 거쳐,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었고,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옮겼다. 1521년(중종16)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여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임하였는데, 관례상 장차 문형(文衡)을 맡을 사람에게는 으레 직제학 · 응교의 두 직책을 겸임하도록 했다.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을 때, 명나라의 조사(詔使)가 오자, 원접사(遠接使)이행(李荇)이 소세양과 정사룡(鄭士龍)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명나라 사신과 시문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1522년(중종17) 일본(日本)의 시승(詩僧) 오오하라(大原東堂) 등이 사신으로 왔을 때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는데, 그의 아름다운 시문에 왜인(倭人)들도 감탄하였다. 이해 겨울에 정3품 당상관 품계로 승진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에 발탁되었다.

중종 후반기 활동

1523년(중종18) 좌부승지로 있다가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왜구(倭寇)의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고 파면되었다. 1524년(중종19)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형 소세량과 함께 여묘 살이를 하였다. 이때 형 소세량은 건강을 해쳐서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재임 중 53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1527년(중종22)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대제학이행이 문한(文翰)의 관직에 있어야 할 소세양이 외방에 오래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니 중종이 즉시 소환하여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531년(중종26)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승진하였고,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 충청도수군절도사)로 나갔다.

1532년(중종27)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관직을 낮추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그러나 어머니가 고향 땅을 편하게 여겨 홍주로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때 이행이 그를 소환해서 문한의 관직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1533년(중종28) 중종이 특별히 예조 참판에 임명하였다. 청홍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한성부 판윤(判尹)에 임명되었고, 중추부 지사로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 황태자(皇太子)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당시 명나라 예부(禮部) 상서(尙書)하언(夏言)은 그의 시(詩)를 보고 감탄하여 서책(書冊)을 증정하기도 하였고, 사신 일행이 옥하관(玉河館)을 편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소세양의 청도 들어 주었다. 그래서 가정제(嘉靖帝)의 허락을 받아, 사신 일행은 5일에 한번 씩 사신관(使臣館)을 나가서 북경(北京) 시내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1534년(중종29)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한성 판윤(判尹)으로 옮겼으나,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간절히 청하자, 중종은 전라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게 하였다. 1535년(중종30)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호조 판서로 옮겨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으며, 1536년(중종31)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1537년(중종32)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옮겼다. 그 무렵 임금이 서교(西郊)에서 농사작황을 살펴보다가[觀稼] 문신들에게 ‘동정모추(洞庭暮秋)’라는 제목으로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짓게 하였는데, 병조 판서소세양이 1위를 차지하여 상으로 숙마(熟馬)를 1필 받았다. 1537년(중종32)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었고, 1538년(중종33)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539년(중종34)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좌찬성이 되었는데, 이것은 중종이 그를 반드시 왕세자 이사(貳師) 지위에 겸임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538년(중종33)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탔는데, 춘추관(春秋館)에 소장되어 있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1540년(중종35) 소세양이 성주 사고에 다시 봉안(奉安)하였다.

1541년(중종36) 모친상을 당하여, 노쇠한 나이에 3년 동안 여묘 살이를 하다가 건강을 해쳤다. 1543년(중종38) 상복을 끝마치자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병으로 사임하니, 중종의 특명으로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 무렵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이 사림파와 손을 잡고 훈구파(勳舊派)와 사장파(詞章派)를 몰아냈는데, 대사헌최보한(崔輔漢)과 대사간구수담(具壽聃) 등이 합사(合司)하여 형조 판서소세양을 맹렬히 탄핵하여, 마침내 그는 관직에서 밀려났다. 그는 고향 익산 길네[道川] 마을로 돌아가서 대숲 아래에 ‘퇴휴당(退休堂)’이란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살면서 다시 벼슬할 뜻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1454년 인종이 즉위하여 그를 문한(文翰)의 관직에 등용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대윤(大尹) 일파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윤임(尹任) 일파를 숙청하였다. 소윤 일파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나이가 많다고 사양하고, 고향 마을 도내골에서 20여 년간 한가롭게 살다가, 1562년(명종17) 11월 22일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77세였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서 율시(律詩)를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는데 주로 송설체(松雪體)를 많이 썼다. 저서로는『양곡집(陽谷集)』과 『부경일기(赴京日記)』 · 『일본행록(日本行錄: 일사록)』 등이 있다. 글씨는 양주(楊州)의 「참찬 임권의 비[任參贊權碑])」와 익산(益山)의 「소세량 부인 묘갈(蘇世良夫人墓碣)」 등이 남아 있다.

사장파의 마지막 인물

1505년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중종은 초반기에 새로운 개혁 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를 대신하여 재야의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세종시대 젊은 엘리트 관료들에게 사가독서를 시켜서 학문을 진흥하였던 제도를 다시 시행하였다. 1511년(중종6) 문신(文臣) 이행 · 김안국(金安國) · 유운(柳雲) · 김안로(金安老) · 소세양 · 황여헌(黃汝獻) · 정사룡(鄭士龍) 7명을 선발하여 장기간 사가독서를 시켰다. 이때 소세양은 26세였는데, 엘리트 인사 7명에 뽑힌 것이 그의 출세의 계기가 되었다. 중종은 문학지사(文學之士)를 양성하여 장차 문형(文衡)을 맡기려고 생각하였다. 선발된 엘리트 7명 중에서 모재(慕齋)김안국은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사림파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당대 문장가로 알려진 사장파(詞章派)였다. 사가독서를 하면, 매월 초하루에 한번 씩 홍문관에 모여서 읽은 책을 점검하였는데, 책의 내용을 토론하고 글을 지어서 비교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뜻이 맞는 사람끼리 저절로 당파가 이루어졌는데, 소세양보다 나이가 8세가 많았던 용재(容齋)이행은 후배 소세양 · 황여헌 · 정사룡을 이끌면서, 중종 시대 사장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사림파를 대표하는 조광조와 대립하였다.

1514년(중종9) 그가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을 때 중종의 둘째 왕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때 사림파의 김정(金淨)박상(朴祥) 등이 <중종반정> 때 공신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하여 쫓겨난 첫째 부인 신씨(辛氏)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일 것을 주장하다가, 대사간이행의 탄핵을 받아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진 사림파의 영수 대사헌조광조가 대사간이행을 탄핵하였다. 이행은 파직되었고 당시 이조 정랑의 요직에 있던 소세양도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정 공신파와 신진 사림파가 크게 대립하였다. 도학(道學)을 중시하던 조광조는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1518년(중종13) 천거 방식의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김식(金湜) · 안처겸(安處謙) 등 28인을 추천하여 요직에 안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종의 반정 공신 76명의 위훈(偉勳)을 삭감하여버렸다. 1519년(중종14) 그가 홍문관 교리(校理)에 있을 때 훈구파 홍경주(洪景舟) ·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조광조와 김정 · 김식 등을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림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그는 이행 · 신광한(申光漢) · 정사룡 등과 함께 사장파의 핵심 인물이었으므로, 중종 후반기에 승진을 거듭하여 판서와 찬성(贊成)에 지위에 올랐는데, 훈구파가 그의 출세의 배경이 되었다.

중종이 소세양를 신임하여 인종을 부탁하였으나,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은 중종 말기에 실권을 잡고 젊은 사림파의 인재를 등용하고 훈구파를 견제하여 사장파를 몰아냈다. 1543년(중종38) 대사헌최보한과 대사간구수담 등이 합사(合司)하여 그를 탄핵하고, 세 번이나 그의 과거를 들춰내어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에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고향 익산으로 돌아가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길네[道川]의 대숲 아래에 정결한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여 ‘퇴휴당(退休堂)’이란 현판을 내걸고 다시 벼슬할 뜻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수그러들지 않아서 서울로부터 내려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바로 하여 먼저 임금의 안부를 물었으나 조정의 정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소세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순수하며, 용모가 단정하고 침착하였고, 과묵하고 말수가 적었다. 그는 겉으로는 시세(時世)에 따르지 않고 만족하면서 세상을 사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과단성이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돈독하게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저절로 존경심을 일으켜서 우러러 보았다. 그는 선현(先賢)의 서적을 수집해서 집의 사방 네 벽에 쌓아 두고, 수많은 서적의 세목을 분류하여 놓고, 그 아래에 거처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에 마치 욕심을 부리듯이 서적을 탐독하였다. 날씨가 춥고 덥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는 훌륭한 재주가 많아서 글씨도 잘 쓰고 시문(詩文)도 잘 지었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서 조상의 묘지명(墓誌銘)이나 유고(遺稿)의 서문(序文) · 발문(跋文) 등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거나, 그의 필적(筆蹟)을 구하여 병풍을 꾸미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과장하기를 싫어하여 남의 청탁을 들어주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얻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가 일찍이 “내가 여색에 미혹된다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를 연모한 황진이(黃眞伊)와는 마음을 열고 30일 동안 함께 지냈고, 그가 떠날 때 황진이가 누각에서 「소세양 판서와 이별을 하다[奉別 蘇判書世讓]」라는 시를 읊자 그 시에 감동하여, “나는 남자가 아니다.” 하고 하룻밤을 더 묵으면서 이별을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소세양과 헤어진 다음에 황진이가 그를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시조가 “어저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소는 전라도 익산(益山) 회룡봉(回龍峰: 용화산) 아래 언덕에 있는데,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다. 친구 홍언필(洪彦弼)의 아들 홍섬(洪暹)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익산의 남촌서원(南村書院) ·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은 해주최씨(海州崔氏)이고, 둘째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曺氏)인데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소수(蘇遂)는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양곡집(陽谷集)』
  • 『부경일기(赴京日記)』
  • 『일사록(日槎錄)』
  • 『인재집(忍齋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상촌집(象村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패관잡기(稗官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