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史庫)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왕조실록』·『선원록(璿源錄)』 등 중요 역사 기록물을 보관하던 서고(書庫).

개설

사고는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사고에 보관되는 역사 기록물로는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선원록』 같은 왕실 기록물과 주요 문집도 함께 보관되었다. 이들 기록의 소실을 막기 위하여 조선시대에는 읍치(邑治)에서 산간으로 사고를 옮겼고, 사고에 대한 관리·감독도 강화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유학의 세계관은 초월적 현상이나 내세(來世)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을 중시한다. 이런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많은 역사 기록을 생산·보존하는 전통이 발달하였고, 그 기록을 보관하던 곳이 사고였다.

특히 역사 기록은 국정에 수시로 참고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가치가 컸다. 아울러 역사 기록은 과거와 현세, 현세와 후세를 이어주는 문화적 성과이기도 했다. 또한 사회 변화에 따라 차츰 기록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실록도 그중 하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초기부터 사관(史館)을 두어 실록의 편찬·보관에 힘썼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개경과 해인사 두 곳에 사고를 두어 소실에 대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처음에 한양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주에 사고를 두어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었다.

조직 및 역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조선후기 사고의 형태는, 우선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2층 누각식의 기와집 건물 두 동을 세운 것이다. 건물 두 동 가운데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당연히 지키는 사람들도 있어야 했다. 조선전기에 사고를 지키던 수직(守直)으로는 충주 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명, 별색호장(別色戶長) 1명, 기관(記官) 1명, 고직(庫直) 1명을 두었다. 조선후기에는 외사고(外史庫)들이 산중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사찰에 부역이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사고를 지키게 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 역할은 승군(僧軍)이 맡았다. 그리하여 적상산 사고에는 승군이 20명 내외, 정족산 사고에는 50명, 오대산 사고에는 2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승군의 수는 때에 따라 또는 사고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수호 사찰의 주지를 예조(禮曹)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사고 수호의 책임을 맡겼다. 조선후기 수호 책임을 맡은 사찰로는, 정족산의 전등사(專燈寺), 적상산의 안국사(安國寺), 태백산의 각화사(覺華寺), 오대산의 월정사(月精寺)였다. 이 절에는 위전(位田)을 주어 사고를 지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게 했다. 외사고의 전반적인 관리 책임은 사고마다 참봉(參奉) 2명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했다. 또한 해당 지역의 수령이 수시로 관리 상태를 점검하였다.

사고 관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관 중인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이 손상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창포(菖蒲)나 천궁(川芎) 같은 약재를 넣어 벌레를 예방했고, 3년에 한 번씩 포쇄(曝曬)를 하여 좀이나 습기로 인한 기록의 훼손을 막았다. 이 포쇄에는 중앙 춘추관의 한림(翰林)이라 불리는 전임 사관인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이 꼭 참석하여 실행했으며, 이런 관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켜졌다.

변천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처럼 초기부터 충주와 서울의 춘추관에 사고를 두었다. 이후 1439년(세종 21)에 경상도의 성주(星州), 전라도의 전주(全州)에 새로 사고를 설치했다. 이로써 조선전기의 4사고 체계가 갖추어졌으며, 『세종실록』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활자로 간행하여 4사고에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사고가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만이 보존되었는데, 이는 그곳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이었다. 1592년(선조 25)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개인 재산을 털어 『태조실록』부터 13대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사고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를 정읍 내장산으로 운반했다. 이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 지켰다. 1593년 7월 조정에서는 사관을 내장산에 파견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해주로 옮겼고, 그 뒤 해주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왜란이 끝난 뒤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조선왕조실록』을 활자로 간행했는데, 이때 출판한 것은 세 부였다. 이로써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원본과 간행본, 교정본을 합하여 모두 다섯 부의 『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졌다.

이들 『조선왕조실록』 중 한 부는 옛날과 같이 서울춘추관에 두었다. 다른 네 부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太白山),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妙香山),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五臺山)과 같이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과 섬 지역을 택하여 사고를 설치하고 한 부씩 나누어 보관했다.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새로 간행한 판본을, 마니산에는 전주실록본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봉안했다.

춘추관의 『조선왕조실록』은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소실되었다. 묘향산의 『조선왕조실록』은 1633년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後金)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 가자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산(赤常山)으로 이전했다. 마니산의 『조선왕조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어 낙권·낙장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마니산의 『조선왕조실록』은 현종 때 보수했으나 춘추관의 『조선왕조실록』은 복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니산의 『조선왕조실록』은 1678년(숙종 4)에 같은 강화도 내의 정족산(鼎足山)에 새로운 사고를 건축하고 그곳으로 이장했다.

그러므로 인조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은 네 부를 작성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으며 4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말까지 온전히 보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 적상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장서각으로 이관했으며 오대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학으로 옮겨졌다. 도쿄대학으로 옮겨진 오대산본은 1923년 일본의 간토 대지진 때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다 탔고, 그 일부가 반환되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에 이관했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에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장서각 소장 적상산본은 해방 직후 관리 소홀로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낙권이 많이 생겼는데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각각 규장각과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사편찬위원회, 『사고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김경수,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대한 연구」, 『사학연구』62, 2001.
  • 신병주,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과 관리」, 『한국사연구』115,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