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섬(洪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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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4년(연산군10)∼1585년(선조18) = 82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청백리(淸白吏).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토홍(土洪)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영의정홍언필(洪彦弼)의 아들이며,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영의정송질(宋軼)의 딸이다. 우부승지홍형(洪泂)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홍담(洪曇)의 4촌 형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8년(중종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9년(중종24)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하였기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여 1531년(중종26) 28세로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에 보임되었다가 몇 달 만에 저작이 되자, 사헌부에서 빠른 승진이라고 탄핵하여 도로 정자가 되었다. 1532년(중종27) 저작에 승진되었고, 성균관 박사로 옮겨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임하였다. 1533년(중종28)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1534년(중종29)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다시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조 좌랑으로 옮겼다. 당시 이조 판서김안로(金安老) · 대사간허항(許沆) · 부제학채무택(蔡無擇) 3인이 정권을 잡고 정사를 어지럽혔는데, 어느날 그는 술을 마시고 허항을 찾아가 김안로를 비난했다. 이를 빌미로, 허항은 홍섬과 홍언필 부자를 무고하였고, 김안로는 이들 부자를 역모(逆謀)로 몰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종의 비호를 받아, 홍섬은 겨우 참형을 면하고 전라도 흥양(興陽)으로 귀양갔다. 귀양 길에 임형수(林亨秀)를 만났는데, 그는 홍섬이 죄 없이 귀양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이 인연으로 홍섬은 나중에 임형수를 부제학으로 추천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1537년(중종32) 우의정김안로 일당이 인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복죄(伏罪)되자, 홍섬은 3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서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고 1538년(중종33)에는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교리 · 응교 · 전한으로 승진하였으며 사헌부의 장령 · 집의를 지냈다. 1540년(중종35)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 1541년(중종36)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겼고, 이조 참의를 지냈다. 1542년(중종37)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영전하였다. 1543년(중종38)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임기를 마친 다음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1544년(중종39)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즉위)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546년(명종1)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547년(명종2)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1548년(명종3) 종부시 제조에 임명되었고, 1549년(명종4) 부친상을 당해,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1551년(명종6)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가 한성부판윤으로 옮겼다. 1552년(명종7) 안현(安玹) 등과 함께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는데 그가 가장 먼저 거명되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9)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경연 동지사 ·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1555년(명종10)에는 예조 판서로 옮겨서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고, 1557년(명종12)에는 세자시강원 좌빈객에 임명되었다. 1558년(명종13)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되어 이조 판서를 겸임하였으며 이어 좌찬성으로 옮겼다. 1559년(명종14)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가, 예조 판서가 되었다.

1560년(명종15) 다시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이량(李樑)이 근거 없는 말로 참소하였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해 가을에 홍섬이 별시(別試)를 관장하였는데, 책제(策題)를 내기를, “역대(歷代) 척리(戚里)와 환시(宦寺)의 화(禍)를 논하라.”고 하였다.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인 이량은 이것이 자기를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것이라고 여겨 홍섬을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였으므로, 홍섬이 벼슬을 사직한 것이다. 그는 인순왕후의 아버지 심강(沈鋼)의 구원으로 겨우 화를 면하였다. 이때부터 1561년(명종16) 돈령부 판사에 임명되는 등 몇 년 동안 한직에 머물면서 벼슬이 침체되었다.

1563년(명종18) 이량 일파가 쫓겨나자,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다시 예문관 대제학을 맡았다. 1564년(명종19) 다시 좌찬성에 임명되었고, 1565년(명종20) 문정왕후의 국상(國喪)이 나자, 산릉도감 제조를 맡았는데, 그 공으로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 이해 겨울에 흉년이 들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었는데, 굶주리는 자들을 구휼하여 살려낸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1566년(명종21) 당시 중망(重望)이 이황(李滉)에게 돌아가자, 대제학으로 있던 홍섬은 그 직을 사퇴하여 이황에게 양보하였다.(『석담일기(石潭日記)』 상권) 1567년(명종22) 명(明)나라 사신의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다가, 다시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어,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 나이 어린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였다. 1568년(선조1) 우의정에 임명되어, 총재관(摠裁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감수(監修)하였다. 1569년(선조2) 좌의정으로 승진되자, 성만(盛滿)하다고 사직하니,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1573년(선조4) 70세가 되었다며 치사(致仕)를 청하니, 선조가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그는 궤장을 받자, 90세의 고령으로 무병장수한 어머니를 모시고 나라에서 하사한 주악(酒樂)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라며 부러워하였다. 1573년(선조6) 어머니 병환 때문에 사임하니, 중추부 영사에 임명하였다가 돈령부 판사로 임명하였다. 1574년(선조7)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가, 중추부 영사가 되었다. 같은 해 또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575년(선조8)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가 다리 병을 앓아 잘 걷지 못하자, 선조가 어린 내관를 시켜 부축하고 출입하게 하였다. 1576년(선조9)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노병이 점차 심해지고 어머니의 연세가 많다고 한사코 사직하니, 선조가 “경은 원로(元老)이고 나라의 주석(柱石)이다.”라는 어찰(御札)을 내리고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홍섬은 영의정에 세 번째 중임되었는데, 1579년(선조12) 병으로 사직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3) 1580년(선조13) 모친상을 당하자 선조가 승지를 보내어 치조(致弔)하고, 여묘살이를 하지 말며 육식(肉食)을 하라고 권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다가 기력이 쇠약해져 1585년(선조18) 2월 11일 병석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이 82세였다.

저서로 『인재집(忍齋集)』 · 『인재잡록(忍齋雜錄)』 등이 있다. 홍섬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흥양으로 유배될 때의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원분가(寃憤歌)」란 가사를 지었다.

성품과 일화

홍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품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행실이 단정하였다. 오직 경적(經籍)의 탐구에만 열중하고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을 대할 때 말을 급하게 하거나 안색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고, 항상 온화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여 화기애애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하루종일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는데, 한 번도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포의지사(布衣之士)로 있을 때부터 중망이 있었다.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이 50년이나 되었는데, 청렴하고 신중한 자세로 공사에 임하여 칭송을 받았다. 효행이 독실하였는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벼슬살이 할 때, 일의 대체(大體)만을 챙기고 작은 일은 아래 사람들에게 맡겼으며, 성헌(成憲)을 지키기에 힘쓰고, 이루어진 법을 변경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문장은 건실하고 우아하면서도, 부화(浮華)하거나 과장된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사대부들이 그가 지은 비갈(碑碣)의 글을 얻으면 과장이 없는 ‘실제 기록[實錄]’이라고 좋아하였다. 아버지 홍언필의 가법(家法)이 매우 엄하여, 손님이 오면, 반드시 아들 홍섬으로 하여금 뜰에 내려가 맞도록 했다. 그리하여 홍섬이 가난한 선비와 같이 남루한 관복 차림으로 손님에게 ‘자제(子弟)의 예’를 행하면, 손님들 중에는 그가 홍섬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식객(食客)으로 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南陽) 서쪽 청명산(淸明山) 언덕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동원(東園)김귀영(金貴榮)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인재집(忍齋集)』 권4 부록 · 『동원집(東園集)』 권2)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제향되었다. 첫째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진산군(晉山君)유홍(柳泓)의 딸이다. 둘째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증 참판한자(韓慈)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장악원 첨정을 지냈고, 딸은 선조의 형인 하원군(河原君)이정(李鋥)의 처가 되었다. 측실에서 3남을 두었으니, 홍기년(洪耆年)은 천문학 교수였고, 홍기수(洪耆壽) · 홍기형(洪耆亨)은 모두 관상감 정을 지냈다. 외손녀가 영의정기자헌(奇自獻)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재집(忍齋集)』
  • 『인재잡록(忍齋雜錄)』
  • 『동원집(東園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계만록(松溪漫錄)』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정만필(月汀漫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퇴계집(退溪集)』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