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金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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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2년(성종 13)∼1520년(중종 15) = 39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다. 자는 노천(老泉)이고, 호(號)는 정우당(淨友堂), 지정(持正), 사서(沙西), 동천(東泉)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김숙필(金叔弼)이며, 어머니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목철성(睦哲成)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낸 김질(金耋)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교위(校尉)김경문(金敬文)이다. 중종 당시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했으며,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이다. 명종(明宗) 때 신원(伸寃)되어 복관(復官)되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할아버지 김질이 손자의 뛰어난 자질을 발견하고 유학을 가르쳐서 12세 때에 이미 학업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 사천 목씨가 잠시도 쉬지 않고 아들을 가르쳐서 스스로 도학(道學)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목부인을 ‘여사(女士)’라고 불렀다.

1501년(연산군 7) 20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많은 관리가 참화(慘禍)를 당하는 것을 보고 과거 공부를 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성리학을 제대로 알기 위한 공부를 하다가, 동갑인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게 되면서 서로 도학과 덕행(德行)을 닦는 벗이 되기로 작정하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그들의 명성이 높아져, 사방의 젊은 선비들이 그들에게 모여들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80 「大司成金公神道碑銘(大司成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식묘비명」으로 약칭]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젊은 중종은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때 김식(金湜)도 추천되어 여러 참하관(參下官)의 관직을 거쳐, 1508년(중종 3) 1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1509년(중종 4) 8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 3년 1월 26일),(『중종실록』 4년 8월 5일) 그리고 할아버지 김질이 성종(成宗) 때 10여 년간 대간(臺諫)으로서 훈구파(勳舊波)를 견제하였던 것처럼 그도 10여 년 이상 대간으로서 반정 공신과 훈구파의 강경론자와 대립하였다. 반정 공신은 중종반정 때 군사를 동원한 무신 박원종(朴元宗)·홍경주(洪景舟)·신윤무(辛允武)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훈구파의 강경론자는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문신 신용개(申用漑)·이행(李荇)·남곤(南袞)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509년(중종 4) 좌의정박원종이 죽자, 반정 공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그동안 김식은 형조 좌랑(佐郞)과 호조 좌랑을 거쳐 1511년(중종 6) 1월 예조 정랑에 임명된 후 축성(築城) 종사관(從事官)을 겸임하였는데, 반대파에서 김식의 종이 군졸들에게 많은 면포를 받았다고 공격하였다.(『중종실록』 6년 1월 4일)

1515년(중종 10) 6월 중종이 개혁 정치를 표방하고 참신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니, 성균관 유생들이 조광조·김식·박훈(朴薰)을 천거하였다. 또 이조 판서(判書)안당(安瑭)이 건의하기를, “재능이 있는 인사는 차서(次序)를 뛰어 넘어서 발탁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광조·김식·박훈을 모두 6품에 서용하였는데, 이때 김식은 광흥창(廣興倉)주부(主簿)에 임명되고, 조광조는 조지서(造紙署)사지(司紙)에 초임(初任)되었다.(『중종실록』 10년 6월 8일),(『중종실록』 12년 3월 26일) 이때부터 김식은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면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과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는 조광조와 함께 대간을 이끌고 반정 공신의 비리를 탄핵하였다.(『중종실록』 13년 5월 2일),(『중종실록』 13년 10월 21일) 또 반정에 공훈이 없는 많은 이들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며, 가짜 공훈, 이른바 위훈(僞勳)을 가려내어 대규모로 삭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정 공신의 홍경주 등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훈구파의 강경론자 남곤 등과 손을 잡고 신진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렸다.

김식은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어 사간원 대사간조광조와 함께 시독관(試讀官)으로 경연(經筵)에 참여하게 되자, 그들보다 6세 연하의 중종을 계도(啓導)하여 왕도 정치를 실현하는 도학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중종도 신진사림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들의 요청대로 개혁 정치를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과거 제도의 개혁이었다. 필기시험을 위주로 인재를 뽑던 종래의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덕망(德望)을 위주로 인물을 추천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장(詞章 : 문장)을 중시하던 훈구파의 강경론자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런 가운데 1519년(중종 14) 4월 현량과로 추천된 김식·안처겸(安處謙) 등 28인 가운데 김식이 1등 장원을 차지하였다.(『중종실록』 14년 4월 17일) 이어 중종은 반정 공신의 위훈을 삭제하자는 사림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국공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76명의 공훈을 삭제하고 그에 따른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이에 조정의 반정 공신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식은, 1519년(중종 14) 4월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가 곧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으나, 그가 강론을 잘한다고 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14년 4월 28일),(『중종실록』 14년 5월 16일),(『중종실록』 14년 5월 27일) 그때 중종이 소문을 듣고 칭찬하기를, “매번 사람을 가려 사장(師長)의 직을 맡기고 싶었음에도 이때까지 사람을 구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김식을 얻어 맡겼으니 나중에는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중종실록』 14년 6월 8일) 그러나 조광조와 김식의 왕도정치가 신권(臣權)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중종은 왕권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왕도 정치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홍경주와 남곤은 홍경주의 딸로 중종의 후궁인 홍숙용(洪淑容)을 통해 조광조 일파를 모함하고 중종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중종은 홍경주를 불러 밀지를 내리고 신진사림파를 일망타진하도록 하였다.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밤 반정 공신 홍경주·심정 등과 훈구파의 강경론자 남곤김전(金詮) 등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조광조·김식 등의 죄를 열거하고 그들의 처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중종의 허락을 받은 후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와 포졸을 보내 신진사림파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하옥하였다. 그때 김식은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려고 외가에 있다가, 그곳까지 찾아온 포졸에게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로, <신무문의 변(變)>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조광조와 김식 등은 외딴 섬에 안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안당이 입궐하여 그들의 선처를 거듭 호소한 끝에 중종도 마침내 본인이 원하는 곳에 종편(從便)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전라도 능성(綾城)으로 유배되었고, 김식은 아버지 김숙필의 묘소가 있는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홍경주에 의하여 조광조가 사사(賜死)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식은 친구들과 여러 제자들의 도움을 받고 이리저리 숨어 다니다가, 경상도 거창(居昌)으로 피신하였다.(『중종실록』 14년 12월 29일) 그러다가 1520년(중종 15) 5월 16일 거창 아림현(娥林縣) 고제원(高梯院)에 올라가서「군신천세의(君臣千世義)」라는 시를 짓고 자결하였는데, 향년이 39세였다.(『중종실록』 15년 5월 22일) 김식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망명(亡命) 옥사>에 문인과 친구가 연루되어 옥사를 치렀는데, 그의 문인은 신명인(申命仁)·오희안(吳希顔)·목세칭(睦世秤)·김윤종(金胤宗)·홍순복(洪舜福)·이중(李中)·윤광일(尹光溢)·유홍(柳洪)·박인성(朴仁誠) 등이고, 그의 친구는 영해 부사(寧海府使)이윤검(李允儉) 등이다.[『기묘록(己卯錄)』]

기묘사화와 김식

중종 초기에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신윤무·홍경주 등 무신들이 전횡하자, 중종은 반정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고 젊은 사림파 김식·김정(金淨) 등을 대간에 기용하였다. 1508년(중종 3) 1월 김식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1509년(중종 4) 8월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으며, 사림파 대간김정·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공신들의 비리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1510년(중종 5) 4월 영의정박원종이 죽자, 반정 공신의 실권은 홍경주와 심정(沈貞)에게 넘어갔다.

1515년(중종 10) 2월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인종(仁宗)을 낳다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박원종이 반정(反正)을 도모할 때 반정에 반대하던 좌의정신수근(慎守勤)을 죽였는데, 중종의 잠저(潛邸) 때 부인이 신수근의 딸이었다. 종중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박원종이 주장하기를, “아버지를 죽였는데, 그 딸을 왕비의 자리에 둘 수 없다”며,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친정으로 내쫓고, 새로 장경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박원종과 홍경주는 자기 딸을 중종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중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장경왕후가 죽자, 사림파의 김정과 박상(朴祥)이 상소하기를, “신씨를 복위시켜 예전 은혜를 온전하게 해야만 옆자리에 있는 후궁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원종의 딸 박숙의(朴淑儀)와 홍경주의 딸 홍숙용이 모두 왕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왕비를 둘러싸고 신진사림파는 반정 공신과 훈구파의 강경론자와 대립하였는데, 사간원 대사간이행 등은 김정과 박상의 처벌을 주장하여, 그들을 귀양 보냈다. 그러나 사헌부 대사헌조광조와 사헌부 지평김식이 김정·박상의 주장을 옹호하고 이행을 탄핵하여 이행을 귀양 보냈다. 이에 좌의정정광필과 우의정신용개가 양쪽을 중재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새로 왕비로 맞아들였다.

중종반정 직후 반정 공신을 정국공신으로 책훈할 때 박원종의 심복 신윤무와 박영문(朴永文)이 일을 맡아 하며 하급 무관(武官)들을 많이 참여시켰으므로 조정 문관(文官)들의 불평이 많았다. 이에 사림파의 조광조와 김식이 대간의 요직을 맡으면서 대간에서 반정 공신의 비리를 탄핵하고, 반정에 공훈이 없는 많은 자가 정국공신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며, 가짜 공훈을 가려내어 삭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정 공신의 홍경주 등은 훈구파의 강경론자 남곤 등과 손을 잡고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좌의정신용개가 훈구파의 강경론자를 억제하였으므로,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사림파를 타도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훈구파의 실권자였던 정광필과 신용개, 안당 등은 사림파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젊은 사림파 인사들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조광조와 김식이 경연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젊은 중종을 계도하여 조정의 훈구파 세력을 억제하고 도학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왕도 정치를 표방하여 농촌에 유행하던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상부상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또 반정 공신의 가짜 공훈, 이른바 위훈 삭제를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정국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작호가 박탈되었고 그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었다. 말하자면 왕도 정치는 개혁파가 실권을 잡고 토지와 재산을 가진 보수파를 억압하여 모든 백성들이 자기 땅을 갖고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대동(大同) 세계’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이것이야말로 왕권을 억압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홍숙용의 아버지 홍경주를 몰래 불러 밀지를 내려, 조광조와 김식 등의 사림파를 일망타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반정 공신의 홍경주·심정 등과 훈구파의 남곤·김전 등이 손을 잡고,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밤중에 신무문 밖에 모였다. 그리고 대궐의 중종에게 상소하여 사림파의 조광조와 김식 등을 잡아다가 처형하기를 요구하였다. 훈구파의 온건론자에 속하던 병조 판서이장곤(李長坤)은 거사에 동조하여, 군사를 동원한 후 대궐의 안팎을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홍경주 등은 중종에게 강권하기를, “선전관(宣傳官)과 의금부 도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참찬(參贊)이자(李耔)·형조 판서김정·대사헌조광조·대사성김식·부제학김구(金絿)·도승지유인숙(柳仁淑)·좌부승지박세희(朴世熹)·우부승지홍언필(洪彦弼)·동부승지박훈 등을 잡아다가 대궐에서 심문하고 죽이소서” 하였다. 이때 병조 판서이장곤은 비로소 그날 밤에 사림파를 즉시 처형하려는 계획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 강력히 만류하기를, “수상 정광필에게 이 일을 숨기고 도적처럼 일을 행할 수는 없으니, 수상을 불러다가 죄를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홍경주가 내전으로 급히 들어가서 중종에게 사림파를 처형하도록 강청하려고 하였고, 이장곤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억누르면서 말리기를, “공은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오” 하였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한 후에 영의정정광필과 우의정안당을 대궐로 급히 불러들였다. 이에 홍경주가 세조(世祖)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본 따서 사림파 인물들을 대궐에서 즉시 처형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처음에 중종은 조광조와 김식 등을 외딴 섬에 안치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한밤중에 영의정정광필과 우의정안당이 차례로 입궐하여 중종에게 그들의 선처를 거듭 호소하였으므로, 중종은 마침내 그들을 종편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능성으로, 김정은 금산(錦山)으로, 김구는 개령(開寧)으로, 김식은 선산으로, 박세희는 상주(尙州)로, 박훈은 성주(星州)로 각각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홍경주·남곤에 의하여 조광조가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식은 “요원(燎原)의 불길이 나에게 미칠 것이다” 하며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거창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의금부에서 김식을 추적하며 체포의 손길이 뻗쳐왔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520년(중종 15) 5월 16일 고제원(高梯院)에 올라간 김식은 석벽(石壁)에 “해는 저물어 하늘은 어두움을 머금고[日暮天含黑]/ 산은 비어 절은 구름 속에 들어 있네[山空寺入雲]/ 군신간의 천년토록 변치 않을 의리 있는데[君臣千載義]/ 어느 곳에 나의 외로운 무덤이 있을고[何處有孤墳]”라는 시를 썼다. 이것이 유명한「군신천세의」라는 시다. 또 중종에게 보내는 마지막 유소(遺疏)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상소하는 까닭은 흉적(兇賊)들이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는 것을 보고 구구한 충의(忠義)를 다하고자 하는 것뿐이니, 전하께서 굽어 살피소서” 라고 쓴 후, 마침내 자결하였다.

성품과 일화

김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경전(經傳)에 자세히 통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에 능하다고 하여 현량과에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김식이 경전을 읽고 강론하는 날이면, 학자들이 명륜당(明倫堂)에 가득히 모여 하루 종일 강론하는 데에 귀를 기울였으나, 김식이 조리 있게 강론하였으므로, 누구나 지루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중종실록』 14년 11월 18일)

조광조는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하여 사림파의 정통파라고 자부하였으나, 김식은 가학(家學)을 통해서 스스로 성리학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항상 사림파에서 조광조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1517년(성종 12) 7월 경연에서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읽을 때 아무도 자신 있게 강론할 사람이 없었다. 경연관(經筵官)한충이 호조 좌랑김식을 시독관(試讀官)으로 추천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오직 김식 한 사람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김식이 경연에서 시독관이 되어 명강(名講)을 하자, 중종도 감탄하기를, “경연에서 강론할 때에 김식이란 인물을 내가 알았다” 하였다. 이때 홍문관 부제학조광조가 나아가서 아뢰기를, “김식 같은 사람은 문사(文士) 가운데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실로 얻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하였다.[『기묘록』]

성균관에서 유교의 경전을 강론하는 날 김식이 홀(笏)을 바르게 잡고 명륜당에 앉아서 경전을 통독(通讀)하고 강론하면, 유생들이 차례로 앞자리에 나아가서 그 잘못된 해석을 반박하거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물었는데, 김식은 명쾌하게 물 흐르듯이 대답하였다. 그는 근원을 자세히 밝히고 유래를 설명하면서 급소를 찌르고 깊은 뜻을 풀이하여 미묘한 뜻을 밝혀냈으므로, 유생들이 그 가르침과 경계하는 말을 명심하여 스스로 깨우치니, 마치 길 잃은 나그네가 갈 곳을 찾은 듯하였다. 이 때문에 성균관 유생은 물론이고 그밖에 배우러 오는 자가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으며, 혹은 김식의 집 곁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그 가르침을 받는 자도 있었다.[「김식묘비명」]

김정은 식견이 높고 넓어서 세상 사람들을 깔보았으나, 조회(朝會)가 파하면 반드시 『대학(大學)』을 가지고 성균관으로 걸어가서 김식에게 대학의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김식이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강론을 잘하므로 사림파 동료들도 그를 공경하고 성리학을 배웠던 것이다.[「김식묘비명」]

1519년(중종 14) 4월 현량과를 천거할 때 김식의 이름이 후보자 명단 속에 있었으나, 김식은 과장(科場)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조광조가 힘써 권하고, 또 모친의 엄명이 있어서 부득이 응시하여 드디어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때 현량과의 심사 항목에는 성품·기량·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 습관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는데, 급제자 28인 가운데 오로지 김식만이 유일하게 7개 항목에서 모두 완벽하다는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김식이 성품 및 학식과 행실 등 모든 면에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유학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이 하교하기를, “김식은 어진 사람이다. 이 사람을 뽑아서 장차 성균관의 관원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혹시 그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그가 이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고 하니, 내가 특별히 기뻐하는 바이다” 하였다. 다음 날 중종이 또 하교하기를, “이제 선발한 사람이 진실로 모두 어진 선비이나, 내가 더욱 기뻐하는 것은 김식이 수석을 차지한 점이다” 하고, 품계의 등급을 뛰어넘어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했다가 곧 홍무관 부제학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였다.[『기묘록』]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김식이 외사촌 형제의 집에 가서 외할아버지의 기제(忌祭)를 지내려고 하는데, 어떤 친척이 조정의 정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김식은 수심에 가득차서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외람되게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여 이미 위태로운 기미를 밟고 있다. 다른 날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자는 것도 또한 필시 어려울 것이니, 함께 정담이나 나누자. 정치 교화의 이해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외사촌 동생 목세평(睦世枰)이 말하기를, “화(禍)의 기미를 안다면 어째서 멀리 피하지 않습니까?” 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이미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화가 코앞에 닥쳐 있으니, 아무리 지혜가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제사를 다 마치고 밤이 새기도 전에, 의금부 도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종적을 찾아 물어서 그 집 대문에 이르러, 그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8]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 언덕에 있는데, 그가 죽은 지 150여 년이 지나 조경(趙絅)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 기묘사화 이후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紅牌)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선조(宣祖) 때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가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과 경상도 청풍(淸風)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居昌)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김식묘비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의 손자인 영신군(永新君)이이(李怡)의 딸로,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남편 김식보다 4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김덕수(金德秀)는 집안의 불행을 당한 뒤에 은둔하며 벼슬하지 않았는데, 호는 이진자(頤眞子)이다. 차남 김덕순(金德純)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3남은 김덕기(金德器)이고, 4남은 김덕무(金德懋)이며, 5남은 김덕성(金德成)인데, 형제가 모두 문행(文行)으로 가문을 이었다. 딸은 손세눌(孫世訥)과 이언수(李彦脩)에게 각각 출가하였다.[「김식묘비명」]

김식의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였다. 5세손 김육(金堉)은 영의정을 지냈고, 6세손 김좌명(金左明)은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그 동생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김우명(金佑明)의 딸은 현종(顯宗)의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7세손 김석주(金錫冑)는 우의정을 지냈고, 9세손 청은부원군(淸恩府院君)김시묵(金時黙)의 딸은 정조(正祖)의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대동기문(大東奇聞)』
  • 『서산집(西山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주유고(龍洲遺稿)』
  • 『이요정집(二樂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