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女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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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여성 선비.

개설

조선 사회는 유교 문화에 바탕을 둔 남성 중심 혹은 남성 우위의 사회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지식과 학문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생활 세계와 사회에 대해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학문 세계를 구축하는 여성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나아가 유교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개인 시문집도 남겼다. 독서와 학문을 통해서 유교가 추구하는 인격적인 완성을 추구하고자 한 여사(女士), 즉 여성 선비였다.

담당 직무

여사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의 경서 『시경(詩經)』「대아(大雅)」, 「생민지십(生民之什)」, 「기취(旣醉)」편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주석을 보면, "여사는 여자로서 사행(士行)이 있는 자"라고 적고 있다. 기원전부터 여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여사, 여성 선비 용례가 나타나는 것은 세종조이다. "친족을 잘 보살피고 가정을 다스림에 항상 자비롭고 화목한 생각이 간절하였고, 홀몸이 되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개를 지킨" 신안택주(信安宅主)를 여사라고 칭하고 있다(『세종실록』 15년 윤8월 15일).

『조선왕조실록』에서 여사 용례를 보면,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 죽은 14살짜리 홍처민(洪處敏)의 딸, 왕후와 왕대비 및 대왕대비, 관찰사김보택(金普澤)의 아내, 이조 참의박신규(朴信圭)의 아내, 병사이헌의 처, 순종의 계비 황태후 등에 대해서 쓰고 있다. 여사라고 지칭되는 인물이 14살 여자아이에서 왕후와 대왕대비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제시된 덕목으로는 "천성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타고나서 일찍부터 공손하고 검소한 마음"을 가진 것, "친족을 안보(安保)하고 가정을 다스림에 항상 자비롭고 화목한 생각이 간절하였고, 홀몸이 되어서 절개를 지키는 데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이 더욱 굳건"한 것, "수렴청정을 하여 몹시 곤란했던 사세(事勢)를 크게 구제"한 것과 "현비(賢妃)로서 도와준 것이 컸고 성모(聖母)로서 성취시킨 것이 많"은 것, "천지 일월 같이 넓고 밝음으로 성인(聖人)의 배필이 되어 유유한정하게 부도(婦道)를 다하였으며, 단일 성장한 덕으로 내치(內治)를 다한 것", "일상생활에서 행실이 아름다운 것" 등을 들고 있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문신 김보택의 처 이씨 외에 양성(陽城)의 선비 권두용의 처 이씨 사례가 보인다. 목숨을 끊어 마침내 큰 절개를 세운 김보택의 처 이씨의 사례와 같이 권두용의 처 이씨 또한 어려서부터 여사의 지조가 있었으며, 남편의 병으로 가세가 기운데다가 남편이 죽자 그 애달픔으로 인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조대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貞純王后)와 조선에서 유일하게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였던 순원왕후(純元王后)에 대해서도 여사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사행(士行)의 내역이 여성 신분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 주목된다. 왕비, 대비, 왕대비 등의 왕실 여성에 대해서는 수렴청정의 다스림[治人]을 강조하고, 그 외에는 "시(詩)와 예(禮)를 행하는 훌륭한 여사로 내치(內治)를 다하였다.", "지위가 높다고 해서 분노의 기색을 아랫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21년 동안 궁정에서 나쁘게 평가하는 말이 없었다."고 하여 모범적인 행실을 칭찬하고 있다.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에 대해서는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 "남편이 죽고 장사를 지낸 뒤에 가사를 처리하고 의연히 자결", "남편이 참화를 당하자 마침내 자살" 등 수절·절개의 사례로 여사를 칭하고 있다. 심지어 14살짜리를 여사로 칭한 사례에서도 "추악하게 무함하는 정신병자의 말을 한 번 듣고 자살하여 절개를 지켰다."고 하였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는 여사 용례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여성의 신분에 따라 사행(士行)의 내역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여사란 표현은 내용적으로 광범위하게 포괄적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조선후기 문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사로 평가되는 여성들의 덕목을 보면, 예와 법칙에 맞는 바른 생활, 정절과 순절, 효도와 공경, 내조와 근검절약 등을 거론하고 있다.

변천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당시 유행했던 여성들의 책 읽기와 글쓰기 열풍에 힘입어 여성도 점차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여성 중에는 언문을 넘어서 한문을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들의 지식과 학문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생활 세계와 사회에 대해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학문 세계를 구축해서 시문집을 남긴 여성도 있었다.

예컨대 개인 문집 『윤지당유고』를 남긴 임윤지당(任允摯堂), 『의유당일기』를 남긴 남의유당(南意幽堂),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한 이사주당(李師朱堂), 『규합총서(閨閤叢書)』를 남긴 이빙허각(李憑虛閣), 『정일당유고』가 전해지는 강정일당(姜靜一堂), 시문집을 남긴 김호연재(金浩然齋), 시집을 남긴 김삼의당(金三宜堂)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시문을 넘어서 유교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던 지식인 여성들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여사와는 다소 구별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경(書經)』
  • 이해순, 『조선 후기 여성 지성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 정형지 외 역주, 『17세기 여성 생활사 자료집 1~4』, 보고사, 2006.
  • 황수연 외 역주, 『18세기 여성 생활사 자료집 1~8』, 보고사, 2010.
  • 이남희, 「조선 후기의 ‘여사’와 ‘여중군자(女中君子)’개념 고찰: 지식인 여성 연구를 위한 시론적 접근」, 『역사와실학』47, 2012.
  • 정해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여성과 사회』8,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