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전도감(殯殿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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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 기간 중 시신에 대한 수습, 상복의 착용, 빈전과 혼전의 설치 및 관리 등의 일을 맡아보던 임시기구.

개설

빈전도감은 습(襲), 염(斂), 성빈(成殯), 성복(成服), 혼전(魂殿), 배비(排備)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산릉에 장사를 지낸 후에는 혼전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시기에 따라 따로 혼전도감을 설치한 경우도 있었다. 업무의 진행 과정은 국상 종료 후에 의궤(儀軌)로 편찬되었으며, 주로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의 명칭으로 편찬되었다. 현재 수십 종의 빈전혼전도감의궤가 남아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국상을 준비하면서 도감을 설치한 최초의 예는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국상에서였다. 『고려사』열전(列傳) 기록에 의하면 당시 빈전·국장·조묘(造墓)·재(齋) 4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선 건국 후 첫 국상인 1396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상에도 4도감이 설치되었으나, 명칭은 전하지 않는다. 4도감의 명칭이 전하는 첫 기록은 태종 15년의 기록인데, 빈전·국장·조묘·재 도감을 4도감이라 지칭하였다(『태종실록』 8년 5월 24일). 세종대에 재도감이 혁파되었고, 조묘도감이 산릉도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세종실록』 2년 7월 19일). 이후로는 이들 3도감을 설치하는 것이 정례화되어 그 내용이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상에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한 것은 우선 전담기구를 통해 효율적인 업무진행을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상장례 업무를 진행할 때 필수적으로 여러 아문의 업무 공조가 요청되는데, 기존 아문의 인적 자원들을 도감이란 임시기구로 재편성함으로서->써 업무 공조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한 조치이기도 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빈전도감의 조직구성원은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좌의정이 맡은 총호사(摠護使) 1명, 제조(提調) 3명, 당하관 6명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를 참조해보면 빈전도감은 좌의정이 맡은 도제조 1명, 제조 3명, 당하관 도청(都廳) 2명, 낭청(郎廳) 4명, 감조관(監造官) 2명, 종친 2품 이상의 대전관(代奠官) 8명, 상향헌작관(上香獻酌官) 1명, 혼전참봉(魂殿參奉) 2명, 충의(忠義) 2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의궤들을 참조해보면 시기별로 인원이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어, 경우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감 내에서는 3방(房)으로 나누어 업무를 진행하였는데, 각 방마다 제조 1명씩과 낭청 1~2명이 배치되었으며, 감조관이 1~2명씩 배치되었다. 일방(一房)에서는 제전(祭奠), 재궁(梓宮), 명정(銘旌), 발인(發靷) 시 인원 파악 및 배치를 맡았고, 이방(二房)에서는 성복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삼방(三房)에서는 습과 염 등의 업무를 맡았다. 이 밖에도 별공작(別工作)이 있어서 각 방에서 직접 마련할 수 없는 물건 등은 별공작을 통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변천

국상을 담당했던 3도감은 국초에 일찍 체제와 직제가 자리 잡은 이후 제도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왕조 말까지 기능하였다. 빈전도감의 직제와 역할도 각각의 국상마다 인원과 작업 배치에는 약간의 상이함이 발견되지만 대체로 큰 변화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빈전혼전도감의궤』는 현재까지 발견된 바가 없어서, 실제 빈전도감의 운영 양상까지 조선후기와 같은 양상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의의

빈전도감은 유교국가를 표방했던 조선의 국가상장례를 담당했던 기구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국상을 마칠 때마다 도감에 참여했던 인원이 가자 및 상사 등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통해서도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명성황후빈전혼전도감의궤(明成皇后殯殿魂殿都監儀軌)』, 서울대학교규장각 영인본, 2001.
  • 『장서각소장의궤해제(藏書閣所藏儀軌解題)』, 한국학중앙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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