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윤덕(安潤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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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7년(세조 3)~1535년(중종 30) = 79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호조 판서(判書)와 공조 판서,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선경(善卿)이고, 호는 월봉(月峰)이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안팽로(安彭老)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문평공(文平公)권개(權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한 안종생(安從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청백리(淸白吏)안성(安省)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김제(金堤)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조정으로 돌아왔으며,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진압하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77년(성종 8) 생원(生員)이 되었고, 1483년(성종 14)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어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부임하였는데, 조정에서 안윤덕(安潤德)의 경학(經學)이 깊으므로 제생(諸生)의 스승이 되게 해야 한다고 하여, 1484년(성종 15) 성균관 학록(學錄)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15년 12월 12일, 『호음잡고(湖陰雜稿)』 부록 「유명조선국자헌대부호조판서겸동지성균관사안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兼同知成均館事安公神道碑銘」 이하 「안윤덕신도비명」] 그리고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1487년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를 거쳐, 1488년(성종 19) 선무랑(宣務郞)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19년 윤1월 1일, 「안윤덕신도비명」] 이때 청풍군(淸風君)이원(李源)이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부음에도 기생집에서 유숙하고, 이 때문에 간 귀양지에서도 과부를 간통하였음에도 곧 방환(放還 : 귀양 보냈던 죄인을 본집으로 돌아가게 함)되자, 안윤덕은 복직(復職)까지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원이 세종(世宗)의 손자이며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독자(獨子)임을 들어 복직시켰다.[『성종실록』성종 19년 2월 28일] 1494년(성종 25)에는 승의랑(承議郞) 수사헌부(守司憲府) 지평(持平)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5년 5월 6일, 성종 25년 10월 12일]

1495년(연산군 1) 형조 정랑(正郞)이 되어 그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얼마 안 되어 병조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자 형조에서 그 후임을 구하기 어렵다며 유임을 청하였고, 이에 특별히 그대로 두게 하였다.[「안윤덕신도비명」] 상의원(尙衣院)첨정(僉正)장악원(掌樂院) 첨정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 중시(重試) 문과에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여 사인(舍人)과 지제교(知製敎) 겸 사관(史官)이 되었다.[『방목』, 「안윤덕신도비명」]

1498년(연산군 4)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고, 1499년(연산군 5) 순변대신(巡邊大臣) 서정장수(西征將帥) 성준(成俊)과 이극균(李克均)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쪽 변방의 야인을 정벌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7월 25일, 연산군 5년 5월 12일] 이어 통례원(通禮院)으로 옮겨 상례(相禮)가 되었다가, 곧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5년 7월 4일, 「안윤덕신도비명」] 1500년(연산군 6)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이어 종사관으로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표리를 하사받았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2월 18일, 연산군 6년 5월 9일] 같은 해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501년(연산군 7)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가, 그해 9월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9월 11일, 연산군 7년 2월 10일, 연산군 7년 윤7월 20일, 연산군 7년 9월 29일] 그리고 1502년(연산군 8) 1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503년(연산군 9) 2월 형조 참판(參判)을 거쳐, 그해 3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1월 5일, 연산군 9년 2월 3일, 연산군 9년 3월 8일] 이때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나가, 자신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백성의 구휼은 어사 대신 그 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관찰사가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청하여 연산군의 신임을 얻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9년 4월 1일] 이후 예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하정사신(賀正使臣)으로 차출되어 명(明)나라 연경(燕京)에 성절사(聖節使)로 갔으며, 돌아와서는 호조 참판과 형조 참판 겸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연산군일기』연산군 9년 4월 13일, 연산군 9년 11월 22일, 연산군 9년 12월 11일]

1504년(연산 10)에는 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고, 이어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연산군일기』 연산 10년 2월 12일, 연산 10년 3월 13일] 한편 그해에 갑자사화가 발생하였다. 이때 풍원위(豊原尉)임숭재(任崇載)가 신항(申沆)을 참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연산군이 임숭재의 편을 들면서 임숭재의 가자(加資)는 탄핵하고 신항의 경우에는 그러지 않았던 일을 문제 삼아 당시 승지(承旨)였던 안윤덕 및 권주(權柱) 등을 처벌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12월 16일, 연산군 10년 12월 20일, 연산군 11년 2월 7일] 더불어 이극균과의 관계를 들어 안윤덕에게는 죄를 더 주도록 하였는데, 이극균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를 사사(賜死)할 때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李世佐)의 작은아버지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12월 21일, 연산군 10년 12월 22일] 이후로도 안윤덕은 굴과 전복을 연산군에게 올린 유자광(柳子光)을 논핵하였다는 이유로 장 80대에 처해졌으며, 얼마 후 문외출송(門外出送) 당하에 김제(金堤)로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11년 4월 6일, 연산군 11년 4월 15일, 「안윤덕신도비명」]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안윤덕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가정대부(嘉靖大夫)의 품계를 받았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년 9월 26일, 「안윤덕신도비명」] 1507년(중종 2)에 다시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이조 판서에 낙점되었지만, 지평허굉(許硡)과 장순손(張順孫) 등이 안윤덕은 과장하기를 좋아하여 이조 판서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2년 9월 10일, 중종 2년 11월 23일, 중종 2년 11월 24일] 그러나 이때 그에게 내린 자급이 문제가 되었다.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었으므로, 자급 또한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 허굉과 장순손 등의 주장이었는데, 이에 반대하던 중종은 결국 영의정유순(柳洵)의 말에 따라 가자를 거두기로 하였다.[『중종실록』중종 2년 11월 25일, 중종 2년 11월 29일, 중종 2년 12월 2일, 중종 2년 12월 7일, 중종 2년 12월 15일, 중종 2년 12월 16일] 그러자 이번에는 안윤덕이 부모상 때 복상(服喪)을 중지하는 등 행실이 적절하지 않다며 가자를 거두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특진관(特進官)의 직임 또한 거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중종실록』중종 2년 12월 19일, 중종 2년 12월 20일, 중종 2년 12월 17일, 중종 3년 1월 6일, 중종 3년 1월 7일] 여기에서 말한 복상 중지는 안윤덕이 21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형제인 안팽수(安彭壽)의 시양자(侍養子)가 되어서는 상주(喪主)의 역할을 하다가 상복을 벗은 것을 일컫는다. 이에 안윤덕의 아들인 안한영(安漢英)은 3세 이전에 양자로 들어가거나 혹은 계후자(繼後子)가 아니면 상복을 입지 않는 것이 예(禮)라며 반발하였다.[『중종실록』중종 3년 3월 1일] 이번에도 중종은 거듭 반대하다가 상소가 빗발치자 20여 일만에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중종실록』중종 3년 1월 7일] 이후 안윤덕은 공조 참판 및 병조 참판을 역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4년 3월 22일, 중종 4년 11월 3일]

그러던 가운데 1510년(중종 5) 4월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 그리고 염포(鹽浦), 즉 삼포(三浦)왜관(倭館)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엄격한 법규 적용으로 경제 활동이 위축된 것에 불만을 갖고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삼포왜란 진압을 위하여 안윤덕이 장재(將才)가 있다고 추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킨 후, 도순찰사(都巡察使)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를 겸임하게 하였다.[『중종실록』중종 5년 4월 9일] 아울러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삼포왜란을 지휘하도록 한 결과 삼포왜란은 곧 평정되었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안윤덕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5년 4월 15일, 중종 5년 4월 22일, 중종 5년 4월 26일, 중종 5년 9월 3일, 「안윤덕신도비명」] 한편 이때에도 유응룡(柳應龍)과 사간원 및 사헌부 등에서 안윤덕의 부덕함을 들어 그를 한성부판윤에서 체직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중종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5년 9월 4일, 중종 5년 9월 6일, 중종 5년 9월 9일, 중종 5년 9월 12일, 중종 5년 9월 28일, 중종 5년 10월 3일, 중종 5년 10월 10일]

1511년(중종 6) 안윤덕은 형조 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512년(중종 7)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대간(臺諫) 등이 안윤덕의 덕망이 부족하다며 반대를 하는 바람에 결국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6년 8월 25일, 중종 7년 5월 12일, 중종 7년 5월 14일, 중종 7년 윤5월 15일, 중종 7년 6월 9일] 이어 의정부 당상(堂上), 중추부 지사, 도총관(都摠管),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 등을 역임하고, 1515년(중종 10)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7년 8월 14일, 중종 9년 10월 13일, 중종 9년 12월 4일, 중종 10년 3월 2일, 중종 10년 3월 27일] 이때 그는 단군과 기자(箕子)의 사당을 수리하고 작성고(作成庫)를 문묘(文廟)에 조성하여 쌀과 베를 비축하였다.[「안윤덕신도비명」] 1517년(중종 12)에 병을 이유로 사임하니 중추부 지사로 소환하고 성균관 동지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1520년(중종 15)에는 경험이 많고 일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며 그를 세자 책립을 위한 원접사(遠接使)로 임명하였다.[『중종실록』중종 12년 7월 6일, 중종 15년 12월 16일, 「안윤덕신도비명」] 이어 안윤덕에게 원접사로서 걸맞는 직함을 내리기 위하여 그를 공조 판서로 삼았는데, 이때 중종은 전조(銓曹)에서 명하여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삼망이 아닌 단일 후보를 추천하는 단망(單望)으로 안윤덕을 의계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6년 1월 23일] 이후 명나라에서 태감(太監)김의(金義)와 진호(陳浩)를 보내어 세자 책립의 고명을 반포하자 이에 안윤덕이 원접사의 명을 받들고 압록강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는데, 김의 등이 안윤덕의 재능과 식견에 감복하였다고 전해진다.[「안윤덕신도비명」]

이어 공조 판서를 역임하다가 1523년(중종 18) 호조 판서로 옮겼으며, 이때 그가 일을 치밀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중종이 크게 신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16년 10월 27일, 중종 18년 12월 19일, 「안윤덕신도비명」] 1527년(중종 22)부터 의정부 좌참찬으로 있다가, 2년 후인 1529년(중종 24) 5월 안동판관(安東判官)조여회(趙如晦)가 그에게 뇌물을 주려 했던 일이 발생하면서 파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22년 1월 18일, 중종 24년 5월 17일, 중종 24년 5월 18일, 중종 24년 5월 25일] 1531년(중종 26)에 다시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인해 중추부 지사에 옮겨 임명하였다.[『중종실록』중종 26년 10월 29일] 그러다가 1535년(중종 30) 9월 24일에 이르러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였다.[「안윤덕신도비명」] 익헌(翼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중종실록』중종 30년 9월 25일]

성품과 일화

안윤덕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가 평안도관찰사로 있던 시절 강서현감(江西縣監)조수천(趙壽千)이 객관(客館)을 새로 지었는데, 안윤덕은 조수천과 백성들이 그 직분을 다 할 수 있도록 백성들을 안정시키며 부렸으므로, 백성들이 수고로운지도 모르고 서로 그 낙성을 경하하였다고 한다.[『용재집(容齋集)』 권9 「강서객관중신기(江西客館重新記)」]

또한 그는 경전의 뜻에 통숙(通熟)하였고 재간이 있어서, 모든 시설하는 데와 방략을 모획(謨畫)함에 있어 그 이상 갈 사람이 없으므로,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안윤덕으로 맡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천성이 근신하지 않고 기운을 부리며 음험하여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중종실록』중종 10년 3월 27일] 아울러 관리로서의 재간은 있었으나, 모든 일을 매번 남보다 앞서려 하였고, 비루한 짓이 많아 당시 비난을 받았다는 평가도 있다.[『중종실록』중종 24년 5월 17일]

묘소와 후손

안윤덕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중대1동에 있다. 비명(碑銘)은 정사룡(鄭士龍)이 지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시(朝市)를 쉬고 중종이 부제(賻祭)를 예보다 더하여 내렸다.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감찰(監察)나문서(羅文緖)의 딸로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윤덕은 나주 나씨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안한영은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 안한웅(安漢雄)은 종부시 주부를 지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셋째 아들 안한준(安漢俊)은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넷째 아들 안한언(安漢彦)은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각각 지냈다. 맏딸은 부정(副正)이영(李瑛)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딸은 별좌(別坐)정횡(鄭鈜)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게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종실(宗室)에 출가하였다.[「안윤덕신도비명」]

아울러 안윤덕의 증손 안황(安滉)은 중종의 손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초(李招)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처남 이균(李鈞)이 바로 훗날의 선조(宣祖)이다. 또한 안정복(安鼎福)은 안윤덕의 9대손이다.[『광주안씨대동보(廣州安氏大同譜)』]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광주안씨대동보(廣州安氏大同譜)』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순암문집(順菴文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호음잡고(湖陰雜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