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은(尹鳴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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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1년(선조 34)∼1646년(인조 24) = 46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의 문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지냈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이원(而遠)이며, 호는 사정(思亭)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직장(直長)윤영(尹瑛)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한흥군(韓興君)이덕연(李德演)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에 추증된 윤기상(尹起祥)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부사(府使)윤건(尹健)이다.

인조 전반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성균관의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후금(後金)과 화친(和親)하는 것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인조실록』 5년 2월 3일) 성균관의 재랑(齋郞)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8 「전라감사윤공신도비명(全羅監司尹公神道碑銘)」 이하 「윤명은비명」으로 약칭] 29세가 되던 1628년(인조 6)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처음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방목』],[「윤명은비명」]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31년(인조 9) 5월 예문관 대교(待敎)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고, 그해 7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8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인조실록』 9년 8월 20일),[『승정원일기』] 그해 11월 병조 좌랑(左郞)이 되었고, 12월에는 추고(推考)하는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강화도(江華島)로 파견되었다.[『승정원일기』]

1633년(인조 11) 4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종4품상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승품(陞品)하여 충좌위(忠佐衛)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이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승품되어 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34년(인조 12) 3월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승정원일기』] 또 도체찰사부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충청도 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와서 조목별로 개혁해야 할 편의(便宜) 사항을 아뢰었는데, 그 중에 채택되어 시행된 것이 많았다.[「윤명은비명」] 그해 3월 도체찰사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종사관윤명은(尹鳴殷)이 서계한 내용 중에, 수영(水營)우후(虞候)유하(柳遐) 등은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이 있다고 하니 파직시키고, 홍주목사(洪州牧使)안복선(安復善) 등은 모두 정사를 잘했다고 하니, 논상하게 하소서”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 그해 7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인조실록』 12년 3월 6일),(『인조실록』 12년 7월 15일),(『인조실록』 12년 7월 27일)

1634년(인조 12) 인조가 친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하고 종묘(宗廟)부묘(祔廟)하려고 하자, 대간(臺諫)에서 이를 반대하였으므로 인조는 양사(兩司)의 장관을 좌천시켰다. 사헌부 지평이었던 윤명은도 인조가 사친(私親)을 추숭(追崇)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는데,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북쪽의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인조실록』 12년 7월 28일),(『인조실록』 12년 8월 2일),(『인조실록』 12년 8월 4일) 1635년(인조 13) 유배가 풀리면서 고향인 남양(南陽)으로 돌아왔다.(『인조실록』 13년 7월 14일)

인조 후반기 시대 활동

1636년(인조 14) 10월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사양하였다.(『인조실록』 14년 10월 11일)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가려다가 오랑캐 군사에게 길이 막히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으나, 후금의 군대에게 포위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윤명은은 남한산성으로 즉시 달려갔지만 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조익(趙翼)을 따라 남양으로 돌아와서, 이시직(李時稷), 윤계(尹棨) 등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여 오랑캐 군사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윤계가 갑자기 오랑캐 군사들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이시직과 함께 고향인 남양에 있던 가족과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런 가운데 1637년(인조 15) 1월 후금의 군사가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이에 친구 이시직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러나 윤명은은 전 가족을 데리고 바닷가로 도망가서 겨우 목숨을 보전 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전쟁 기간에 있었던 윤명은의 행적에 대한 전말(顚末)을 조사하였고,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하였다. 얼마 후, 왕의 소명(召命)을 받고, 1637년(인조 15) 7월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5년 7월 2일),[「윤명은비명」] 이어 윤명은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여 해운(海運) 판관(判官)이 되었으며, 이후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거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승진하였는데,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당하면서 곧장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양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종부시(宗簿寺)정(正)을 거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윤명은비명」] 1644년(인조 22) 11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그해 1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인조실록』 22년 11월 6일),(『인조실록』 22년 12월 7일),[「윤명은비명」]

1645년(인조 23) 4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23년 4월 25일)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자, 인조가 특별 명령으로 지나는 길에 어머니를 찾아뵙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1646년(인조 24) 4월 이산(尼山)의 도적 유탁(柳濯)이 군사를 일으켜 전주(全州) 습격을 모의하였다. 그때 순찰차 담양(潭陽)에 나와 있었던 윤명은은 급히 전주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적의 무리가 결집하여 산을 막고 있었다. 측근들은 가지 말고 그들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으나 그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즉시 전주로 돌아와서 도적을 진압하니, 민심이 바로 안정되었다.[「윤명은비명」] 그러나 인조가 하명하기를, “전라도관찰사윤명은은 성품이 혼미하고 지혜가 모자라서 도적들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또 난리를 만나 도적에 대처하는 것도 보잘 것이 없었다. 우선 먼저 파직시킨 뒤에 그 죄를 추고하라” 하였다.(『인조실록』 24년 4월 5일) 이에 체포되어 서울로 잡혀 와서 심문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

이후 그는 충청도 남포(藍浦)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한가롭게 살았다. 밭을 갈고 낚시질을 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1646년(인조 24) 11월 30일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46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의식대로 하였다. 일찍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윤명은비명」]

원종(元宗)의 추존(追尊)과 부묘(祔廟)에 반대한 윤명은

1634년(인조 12) 5월 인조가 친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하려고 하였다. 인조는 선조(宣祖)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였으므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아니었다면, 서열상 왕위에 올라갈 수 없는 위치였다. 선조는 14남 11녀를 두었는데, 적출은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정명공주(貞明公主)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서출이었다. 인조는 선조의 서출 제 5왕자인 정원군의 맏아들이었다. 정원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은 궁녀 김인빈(金仁嬪)의 4남 5녀 중 3남으로, 의정부 좌찬성(左贊成)구사맹(具思孟)의 딸과 혼인하여 3남을 낳았다. 장남은 능양군(綾陽君 : 인조)이고, 차남이 능원군綾原君)이며, 삼남이 능창군(綾昌君)이었다. 광해군(光海君)은 즉위 후, 그의 동복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또 정원군의 삼남으로 신성군의 양자였던 능창군도 죽였으므로, 능양군과 구씨(具氏) 집안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계곡집(谿谷集)』 권13 「인빈김씨신도비명(仁嬪金氏神道碑銘)」] 광해군이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과 그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시킬 때 서인(西人)은 적극 반대하였다. 당시 정원군의 처남인 구성(具成)과 구굉(具宏)도 서인으로서 이에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되었는데, 구성의 아들 구인후(具仁垕)가 외사촌 신경진(申景禛)과 손을 잡고,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을 임금으로 옹립하기로 하고,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을 끌어들여 마침내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는 임금이 된 후 10년 동안 생부 정원군의 추존을 전혀 거론하지 않다가 나이 40이 되자, 생부 정원군을 추존하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것에 대하여 최명길과 의논하였다. 인조반정을 계획할 때, 무장(武將)이었던 구인후와 신경진은 쿠데타의 세부 계획을 문관인 최명길에게 모두 맡겼는데,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산파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조가 재위하면서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 마다 해결사 노릇을 도맡아 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최명길이 아뢰기를, “명나라 건문제(建文帝)도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잇고 자기 생부를 흥종(興宗)으로 추존하였지만, 당시 방효유(方孝孺) 같은 학사들조차 아무런 이견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이고 아버지도 그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가 적사(嫡嗣)가 아니라고 하여 그 아버지를 추숭하지 않는 경우는 오로지 전하 한 사람뿐입니다. 따라서 정원군을 임금으로 추숭(追崇)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였다.[『국조보감』 권35]

이에 용기를 얻은 인조는 1634년(인조 12) 5월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하겠다고 선언하고, 어머니 구씨도 아울러 왕비로 추존하여 인헌왕후(仁獻王后)라고 휘호를 올렸다. 그러자 의정부 대신 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등이 이에 반대하였는데, 대간의 윤명은·김광현(金光炫) 등 5명이 가장 강력하게 쟁집(爭執)하였다. 이에 인조가 진노하여 언관(言官) 10여 명을 잇달아 귀양 보냈다.[『계곡집』 권16]

그해 8월 윤명은이 죄를 받기를 자청하며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신이 지평으로서 이미 합사(合司)하여 올린 초계(初啓)에 참여하였는데 그때의 논의는 사실상 신이 모두 주장하였으니, 신에게도 강석기 등과 똑같은 벌을 내리소서” 하였다. 인조가 하교하기를, “윤명은이 이 논의를 주장했다면 그 죄가 강석기 등보다 더 심하니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먼 곳으로 유배시키도록 하라”하였다. 의금부에서 그를 영암(靈巖)에 정배시키도록 청하자, 인조는 북쪽 변방의 경성으로 유배하도록 명하고, 또 압송하는 나졸로 하여금 시일을 넘기지 말고 유배지에 도착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때 하루에 1백여 리를 걸어서 명천(明川)에 이르렀으나, 비를 만나는 바람에 이틀을 쉬어 가게 되면서 유배지까지 도착하는데 이틀이 지연되었다. 이것을 안 인조는 의금부에 명하여 그를 압송한 나장(羅將)을 잡아다가 형신(刑訊)하도록 명하였다.(『인조실록』 12년 7월 28일),(『인조실록』 12년 8월 2일),(『인조실록』 12년 8월 4일)

윤명은이 귀양지로 떠나자 어머니가 남양에서 올라와 동교(東郊)에서 전송하였는데, 그가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꿇어앉아 고하기를, “주상께서 신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오래지 않아 곧 용서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배지인 경성에 이르러서는 망모대(望母臺)를 쌓고 밤낮으로 그곳에 올라가서 어머니가 계시는 남쪽의 남양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에게 글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는 학도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윤명은비명」] 1635년(인조 13) 사면을 받고 남양으로 돌아온 후 향리에서 어머니를 받들어 모셨다.[「윤명은비명」]

성품과 일화

윤명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정의 관원이 되어 임금을 섬길 때, 정의를 보면 곧게 진언(進言)하였고, 비록 죄를 얻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항상 청요직(淸要職)을 얻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란을 겪은 뒤에는 그가 젊을 때의 높은 명성과 달리 벼슬에서 물러나 책임을 회피할 생각으로 외직으로 나가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였으니 친구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윤명은비명」] 천성적으로 효성을 타고나서, 어려서부터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본인의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부모에게 올렸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어머니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는데, 언제나 곁에서 모시면서 글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혹시라도 아들의 몸이 상할까 염려하면, “제가 부지런히 애쓰는 것은 부모를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윤명은비명」]

그가 아홉 살 때 울면서 “저희 어머니가 병이 들었으니 생선을 좀 구해 주세요” 하고 이웃 사람에게 청원하였다. 당시에 큰물이 차서 고기를 잡을 수 없었으나 이웃 사람들이 그의 뜻에 감동하여 있는 힘을 다해 생선을 잡아다 주었다. 어버이를 섬길 때,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힘썼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소학(小學)』「계고(稽古)」편에 나오는 중국노래자처럼 재롱부리는 모습을 짓기도 하였는데, 봉양하는 음식은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직접 장만하고 비첩(婢妾)에게 맡기지 않았다.[「윤명은비명」]

1636년(인조 1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명은은 친구 이시직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면서 남양에 계시던 어머니를 모시고 전 가족이 피난을 갔다. 1637년(인조 15) 1월 후금의 오랑캐 군사가 삼판선(三板船)을 타고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를 점령하자, 친구 이시직은 목을 매 자살하였다. 윤명은의 가족은 오랑캐 군사를 피하여 전등사(傳燈寺) 쪽으로 가다가, 오랑캐 군사를 만나 도망가는 와중에 어머니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윤명은 일행은 바닷가 한 모퉁이에서 허둥지둥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전등사 산골짜기로 계속 들어갔다. 피곤한 어머니가 잠깐 앉아서 쉬다가 졸았는데, 아들 윤명은이 배를 가지고 마중하러 오는 꿈을 꾸다 깜짝 놀라 깨어났다. 이에 다시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가 아들 일행을 만나면서 전 가족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윤명은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남양 음덕리(蔭德里)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명은비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부사(府使)이유달(李惟達)의 딸인데, 아들은 없고 딸 하나를 두었다. 사위는 생원시에 장원한 조현양(趙顯陽)인데, 포저(浦渚)조익(趙翼)의 아들이다. 측실(側室)에서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윤두종(尹斗宗)·윤두만(尹斗晩)이다, 윤두종은 생원(生員)이다.[「윤명은비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