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水營)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에 각 도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관할하던 군영(軍營).

개설

고려의 수군은 북계(北界) 도부서(都部署)와 동계(東界) 도부서, 동남해도(東南海道) 도부서 등 3개 도부서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3세기 말엽 이후 원(元)으로부터 정치적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 해체되었다가 14세기 말엽에 재건되었다. 수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비약적으로 강화되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하삼도(下三道) 지방에서는 국방에 종사하는 병력의 수가 육군보다 많게 되었다. 이미 고려시대에 강화(江華)와 교동(喬桐)의 도만호(都萬戶) 휘하에 설치된 군영을 수영이라고 불렀으나, ‘도(道)를 단위로 수군을 지휘하는 장수의 군영’으로서의 수영은 조선 건국 후 경기에서 시작되어 하삼도로 확산되었다. 도별 수군 지휘관의 직책은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에서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로 바뀌었다가 다시 수군도절제사로 환원되었다. 그 뒤 수군절도사로 정착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으며, 병마절도사와 마찬가지로 전임수군절도사(專任水軍節度使)가 임명된 도에만 수군절도사영 곧 수영을 설치하였다. 국방이 중요한 지역인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지휘하는 군사도(軍事道)를 각기 두 개씩 두었으므로 수영도 두 개씩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이 정비될 무렵에는 수군에도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되어 수영이 각 도 수군의 주진(主鎭)으로서 거진(巨鎭)제진(諸鎭)을 지휘하게 되었다. 수영에는 수군절도사의 참모부를 구성하는 기구를 비롯하여 노비, 공장(工匠), 직속 병력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영은 각 도의 수군 사령부로서 도내의 수군 군사를 지휘하고 군사 행정을 총괄한 까닭에 그 재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량의 둔전(屯田)을 경영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막대한 환곡(還穀)을 운영함으로써 재정의 상당 부분을 공급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세기 후반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고려의 공민왕은 수군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우왕 때에 이르러서야 눈에 띌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전함(戰艦)을 건조하고 수군 병력을 조직하여 도만호에서 만호(萬戶), 천호(千戶), 영선두목(領船頭目)에 이르는 지휘 계통을 세워 강화와 교동을 중심으로 해양 방위를 담당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때 강화와 교동에 설치된 수군도만호 휘하의 군영을 수영이라 하였으므로, 사실상 조선 수영의 연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각 도의 해안 지역 주민에게 군역을 지워 수군으로 조직하고 국방을 담당하도록 한 조치는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취해졌는데, 이것은 그대로 조선의 수군 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때 각 도 수군의 지휘 체계가 어떠하였는지, 강화와 교동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도 수영이 설치·운영되었는지 등은 분명하지 않다.

조선 건국 후 왜구는 전보다 크게 줄었으나 아직도 간헐적으로 침입하였고, 서울로 가는 길목인 한강 하구나 황해도 해안 지역에 침입한 일도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우선 한강 하구의 국방 강화에 주력하여, 경기좌도수군도절제사(京畿左道水軍都節制使)와 경기우도수군도절제사(京畿右道水軍都節制使)를 두어 각기 강화와 교동을 수영으로 삼아 수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나머지 각 도의 수군 증강에도 큰 힘을 기울여, 서울에 번상(番上)하던 시위군(侍衛軍)의 상당 부분을 기선군(騎船軍)이라는 이름으로 수군으로 재편하였다. 그 결과 세종 말엽에는 각 도 수군 병력의 규모가 총 4만 9000여 명에 이르렀고, 하삼도의 수군만 약 3만 5000명이나 되어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국방에 종사하는 병력 중 수군의 규모가 가장 컸다. 이후에도 수군의 정원은 대체로 이때의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와 더불어 군사 요충지에 수군의 포(浦)를 설치하여 방어망을 갖추고 이를 수영이 구역별로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지휘 체계는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로 이어지도록 조직하였다.

각 도의 수영이 언제 어디에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경기를 제외하고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태조 말엽에 하삼도에 수군도절제사를 처음 두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어서, 하삼도의 수영도 태조 말엽에 처음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삼도의 수군도절제사는 태종 연간에 여러 차례 폐지와 재설치를 반복하였고, 수군도절제사를 폐지하면서 병마도절제사가 그 업무를 겸하도록 하여 육군과 수군의 지휘 계통에 혼선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수영은 계속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삼도에서 도별로 수군을 지휘하는 장수의 직책은 1420년(세종 2)에 수군도안무처지사라는 직함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경상도의 수군 군사도는 1408년(태종 8) 이후 계속하여 좌수영과 우수영으로 구분되었다. 전라도의 경우 1437년(세종 19)에 이미 좌도와 우도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뒤에 다시 합쳐졌다가 1479년(성종 10)에 좌수영과 우수영으로 나뉘었다. 충청도에서도 한때 좌수영과 우수영이 나뉘어 설치되었다가 합쳐졌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각 도 수영의 위치는 경기는 남양(南陽)의 화량만(花梁灣), 충청도는 보령(保寧), 경상좌도는 동래(東萊), 경상우도는 가배량(加背梁), 전라좌도는 순천(順天) 오동포(梧桐浦), 전라우도는 해남(海南)이었다. 황해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에도 수군이 조직되어 있었으나 전임수군도절제사는 두지 않았고, 따라서 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해당 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수군절도사를 겸임하며 그 지휘권 행사를 감독하였는데, 함경도의 경우에는 수군절도사를 겸임하는 관원이 관찰사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 세 명이나 되어 수군절도사의 겸임이 별 의미가 없었다.

조직 및 역할

수영에는 수군절도사 외에도 그의 참모 격인 우후(虞候)와 각급 군관(軍官) 및 진무(鎭撫) 등의 장교가 있었다. 또 수백 명의 직속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영리(營吏)를 비롯한 아전(衙前)과 공장(工匠), 노비 등도 다수 소속되어 있었다. 각 수영별로 구성원들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타난 황해도 수영의 경우를 보면 비장 5명, 서사 1명, 천총 2명, 파총 4명, 별장 3명, 기고관 4명, 기패관 80명, 별초군관 200명, 대솔군관 100명, 포도관 100명, 사부군관(射夫軍官) 90명, 배지군관 50명, 수포군관 70명, 보진군관(補鎭軍官) 100명, 별무사 300명, 추포무사 693명, 추포군 596명, 영리 12명, 진무 25명, 지인 35명, 영노 13명, 영비 16명, 사령과 군뢰가 모두 55명이었다. 또 중군을 두어 수군의 일을 보좌하도록 하였는데, 중군 예하에 군관 70명, 기패관 40명, 훈도 2명, 지인 1명, 사령 4명이 소속되었다. 이 밖에도 황해도 수영에는 전체적으로 6,579명의 수군이 소속되었으며, 총 111척의 병선이 속해 있었다.

그런데 수영의 경우, 화약(火藥)과 같이 부득이하게 저장해야 하는 물건을 보관하는 영사(營舍)를 지키는 소수의 병력 외에는 모두 전함을 타고 근무하도록 규정되어 있어서, 군인으로는 수군절도사와 참모들만 남게 되어 그 규모가 병영보다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 이후 규제가 완화되면서 소속 군사들이 수영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많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병영보다 규모는 작지만 성곽 시설 또한 갖추게 되었다.

수영은 관할 군사도의 범위 안에서 소속 수군 포의 지휘와 근무에 대한 감독, 수군의 훈련, 전함의 건조와 무기 제조 등을 담당하였다. 수영의 기구도 병영보다는 작지만 상당히 방대하여 그 재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량의 둔전(屯田)을 경영하였는데, 특히 조선후기에는 막대한 환곡(還穀)을 운영하였다.

변천

수영은 관할 방어 지역의 범위가 엄격하게 구획되어 있어서 지역을 벗어나 활동하기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두고 통영(統營)을 통해 하삼도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수영의 실질적인 기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629년(인조 7)에 후금이 침입하였을 때 강화도를 상황이 긴급해지는 경우에 왕실과 조정이 피난할 곳으로 삼기 위해 경기의 수영을 교동으로 옮기고 경기수군절도사가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御使)를 맡아 황해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아울러 지휘하도록 한 바 있으나, 유사시에 대비한 조치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하였다.

이후 청(淸)나라의 군사적 감시가 완화된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황해도 옹진(瓮津)의 소강(所江)에 수군첨절제사를 새로 배치하였고, 1718년(숙종 44)에는 수군절도사를 두고 수영을 다시 설치하였다. 또 경상좌도의 수영이 울산으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동래로 복구되는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단편적인 변화를 제외하고는 수영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때인 1907년 군대 해산령에 의해 각 도의 수영은 모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이재룡, 『조선초기사회구조연구』, 일조각, 1984.
  • 김남규, 「도부서의 성격」, 『고려양계지방사연구』, 새문사, 1989.
  • 노영구, 「조선초기 수군과 해령직의 변화」, 『한국사론』3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5.
  • 오종록, 「조선초기의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상, 하)」, 『진단학보』59, 60, 1985.
  • 이선희, 「조선후기 황해도 수영의 운영」,『한국문화』3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