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중(金南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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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63년(현종 4) = 68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현종(顯宗) 때의 문신. 예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자진(自珍)이고, 호는 야당(野塘)이며,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使)김수렴(金守廉)이며,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생원(生員)성순(成恂)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김명원(金命元)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김만균(金萬鈞)이다. 송준길(宋浚吉), 조석윤(趙錫胤)과 절친한 사이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8년(광해군 10)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26일) 승정원 가주서로서 입시할 때마다 광해군이 그의 빼어난 자태를 눈여겨보았는데, 그의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누이동생을 부인으로 삼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김남중은 아내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때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자가 인망(人望)을 모으려고 김남중에게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임하게 하였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과 예문관 봉교(奉敎)를 역임하였고,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호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을 지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병조 좌랑이 되었으나, 변경의 오랑캐 침입을 제대로 이문(移文)하지 못했다고 하여, 병조 판서김상용(金尙容)과 함께 파직되었다.(『인조실록』 3년 1월 12일) 그 뒤에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인조실록』 3년 3월 22일),(『인조실록』 3년 9월 12일),(『인조실록』 3년 7월 2일),(『인조실록』 4년 3월 25일),(『인조실록』 5년 11월 5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자, 유도대장(留都大將)김상용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서울을 지켰다.

그 뒤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와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는데, 실권자를 탄핵하다가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으로 좌천되었다.(『인조실록』 9년 9월 4일),(『인조실록』 9년 윤11월 4일),(『인조실록』 9년 윤11월 15일) 이후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고,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및 홍문관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어 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9년 10월 18일),(『인조실록』 9년 윤11월 20일)

1632년(인조 10) 사헌부 집의가 되었는데, 그때 인조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숭하는 추숭도감(追崇都監)낭청(郎廳)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7일),(『인조실록』 10년 2월 24일)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으며,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다.(『인조실록』 10년 5월 11일),(『인조실록』 10년 9월 20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1637년(인조 15)에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서 강화도 함락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 수장(守將)을 처형하자고 주장하였다.(『인조실록』 15년 12월 15일)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형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갔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개성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를 추념(追念)하였다.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인조실록』 19년 8월 18일) 얼마 뒤에 좌부빈객(左副賓客)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었으므로, 그가 청(淸)나라 심양(瀋陽)의 질자관(質子館)으로 가게 되었으나, 어버이가 늙고 다른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교체되어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20년 11월 19일),(『인조실록』 20년 12월 6일),(『인조실록』 21년 4월 4일) 그 뒤에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심양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 1644년(인조 22)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사리(私利)를 취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다고 탄핵하였다.(『인조실록』 22년 2월 13일),(『인조실록』 23년 7월 2일),(『인조실록』 27년 2월 13일) 1646년(인조 24)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호조 참판과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의금부(義禁府)춘추관(春秋館)의 관직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 24년 7월 2일),(『인조실록』 24년 7월 8일),(『인조실록』 25년 11월 22일)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5월 국상(國喪)을 당하자, 다시 승정원 도승지가 되어 모든 조치와 출납(出納)을 담당하였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어 경연청(經筵廳)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6월 10일),(『효종실록』 즉위년 9월 1일),(『효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산릉(山陵)의 역사가 끝나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고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효종이 ‘유계(兪棨)를 이조 좌랑에 추천하였다’며 화를 내고 꾸짖었으므로, 사직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효종실록』 1년 4월 5일) 2년 뒤인 1651년(효종 2)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복제(服制)를 마치자 아버지의 봉작을 승습(承襲)하여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어 승문원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효종실록』 4년 3월 14일) 그해 겨울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상례를 마친 후 1656년(효종 7) 춘추관 동지사가 되어 사은사의 부사로서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다.(『효종실록』 7년 1월 17일),(『효종실록』 7년 4월 23일) 같은 해 공조 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1657년(효종 8) 예조 참판을 거쳐 다시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7년 12월 20일),(『효종실록』 8년 12월 21일) 1658년(효종 9)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로 옮겼다.(『효종실록』 9년 2월 26일),(『효종실록』 9년 11월 3일)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의 광중(壙中)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일을 끝마치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5월 4일),(『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2월 10일) 그리고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그때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났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이에 김남중은 서인(西人)의 대간(臺諫) 동료들과 함께 남인(南人)의 윤선도(尹善道)를 국문하고 법대로 처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현종실록』 1년 4월 21일) 또 춘추관 지사(知事)를 겸임하여 『효종실록(孝宗實錄)』을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현종실록』 1년 5월 21일) 공조 판서와 형조 판서를 거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부묘대례(祔廟大禮)를 무사히 잘 거행하였다.(『현종실록』 1년 11월 24일),(『현종실록』 2년 5월 6일),(『현종실록』 2년 6월 21일),(『현종개수실록』 2년 윤7월 8일) 그 뒤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지병이 심해지자 자청하여 개성부유수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사직하였다.(『현종개수실록』 2년 윤7월 19일),(『현종실록』 2년 8월 11일),(『현종개수실록』 3년 8월 26일) 병이 위독해 지자 약을 물리치고 화평한 얼굴로 율시(律詩)를 읊으며 유언을 대신하였다. 1663년(현종 4) 9월 6일 성남(城南)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8세였다.

저서로 『역대인감(歷代人鑑)』이 있는데, 역대 유명한 인물의 전기이다. 문집으로는 그가 죽은 뒤에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야당유고(野塘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김남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인자하고 온화하며, 신장은 보통이었으나 아름다운 광채가 겉으로 환히 드러났다. 일찍이 소년기에 부마(駙馬)의 선발에 참여하였을 때 선조(宣祖)가 그를 불러보고, “앞날에 반드시 귀하게 될 상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최종 선발에까지 올라갔으나, 부마가 되지는 못하였다. 부마는 명문가의 자제 중에서 선발하였으나, 부마가 되면 과거를 보아 출세하지 못하였으므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마가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김남중은 간략하고 검소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집안사람이 감히 화려한 옷을 입고 그를 뵙지 못하였다. 본래 남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공청(公廳)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문정(門庭)을 쓸고 집안에 들어앉으니, 잡된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친한 친구가 찾아오면 곧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워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조정에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마땅히 경상(經常)을 지켜야 하고, 사대부의 지론(持論)에서 새롭고 기이한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송준길, 조석윤과 같은 절친한 친구들과 조정에서 정사를 논의할 때에 간혹 주장이 서로 맞지 않을 때도 있었으나, 김남중은 언제나 원칙을 고수하였으므로 모두 그의 길게 보는 안목에 감복하였다.[『문곡집(文谷集)』 권20 「예조판서김공묘표(禮曹判書金公墓表)」]

본래 그는 경사(經史)를 즐겨 읽었는데, 늙어서도 일과처럼 『논어(論語)』를 읽었다. 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좋아하여 그 인물 전기를 참고해서 손수 10여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름을 『역대인감(歷代人鑑)』이라 하였다. 김남중은 항상 말하기를 “사마광(司馬光)은 사람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선비는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집에서 어버이를 섬기고 조정에 나아가 사람들을 만날 때 송(宋)나라 역사가 사마광처럼 모든 행동 규범이 하나같이 역사의 진실에서 터득한 것이었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효이다. 묘소는 충청도 전의(全義) 소곡리(素谷里)의 언덕에 있는데,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처음에 경기도 양주(楊州)의 선영에 있었으나, 장사 지낸 뒤 5년 만에 이장하였다.[『문곡집』 권20 「예조판서김공묘표」]

첫째 부인 여흥 민씨는 민유경(閔有慶)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세헌(李世憲)의 딸인데 성종(成宗)의 5세손이다. 여흥 민씨가 2녀를 낳았는데, 목사(牧使)나성두(羅星斗)와 목사서정리(徐正履)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전주 이씨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홍진(金弘振)은 호조 정랑(正郞)을 지냈고, 차남 김일진(金一振)은 생원이었으며, 3남 김필진(金必振)은 원성현감(原城縣監)을 지냈다. 3녀는 부사(府使)정재악(鄭載岳)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득진(金得振)·김유진(金有振)·김이진(金以振)·김말진(金末振)이고, 딸은 박군망(朴君望)·박세교(朴世校)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자 김주신(金柱臣)은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를 지냈고,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문곡집』 권20 「예조판서김공묘표」]

맏사위 목사나성두는 영의정김수항의 장인인데, 안동 김씨(安東金氏) 세도 정치의 시작인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3형제의 외할머니가 바로 김남중의 맏딸이었다. 그러므로 서인의 영수 김수항이 장모 경주 김씨(慶州金氏)를 위하여 김남중의 묘갈문을 지었던 것이다. 또 허목(許穆)의 어머니 나주 임씨(羅州林氏)는 임제(林悌)의 딸인데, 임제는 김남중의 증조할아버지 김만균의 사위였으므로 남인의 영수 허목은 김남중은 친척 사이였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13]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대립할 때, 김명원-김남중의 경주 김씨는 서인과 남인 모두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문곡집(文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