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원(金信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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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614년(광해군 6) = 6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초명(初名)은 김신원(金信元)이고, 개명(改名)은 김이원(金履元)이다. 병조 판서(判書)와 이조 판서 등을 지냈다. 자는 수백(守伯)이고, 호는 소암(素菴)이며, 봉작(封爵)은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령(縣令)김홍우(金弘遇)이며,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직장(直長)윤은좌(尹殷佐)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직장김덕유(金德裕)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직장김수현(金秀賢)이다. 동인(東人)의 수장인 김효원(金孝元)의 동생이기도 하다. 광해군 때 임해군(臨海君)을 고변하여 부원군(府院君)이 되고, <김직재(金直哉)의 옥>을 다스려 공신이 되었으나, 그가 죽고 난 뒤 인조(仁祖) 때 모두 추탈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고, 1583년(선조 16년)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1세였다. 형 김효원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동생 김의원(金義元)은 진사과에 장원 급제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선산 김씨(善山金氏)에서 가장 번성한 집안이 되었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을 겸직하였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左郞)이 되었다. 1587년(선조 20) 방어사(防禦使)신립(申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고,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선조실록』 20년 10월 24일),(『선조실록』 21년 11월 8일) 1588년(선조 21) 평안도창성부사(昌城府使)로 나갔다가, 1589년(선조 22) 조정으로 돌아와서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선조실록』 22년 8월 23일) 1590년(선조 23) 형 김효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형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헌부 장령(掌令),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 성균관 사예(司藝), 형조 정랑(正郞), 호조 정랑, 예조 정랑(正郞)을 두루 거쳤다.

1592년(선조 25) 5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황해도에 이르러,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는 선조의 행차를 만나 의주로 갔다. 평양에서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평양성을 지키는 대장 윤두수(尹斗壽)의 종사관이 되었다. 평양성이 함락된 후 명나라 군사가 들어오자, 조도어사(調度御使)에 임명되어 삼현(三縣)에서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선조실록』 25년 7월 6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과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고,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사헌부 장령을 거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전쟁 중에 흉년까지 겹치면서 당시 의주의 백성들 상당수가 굶주려서 죽어갔다.(『선조실록』 25년 6월 21일),(『선조실록』 26년 2월 27일),(『선조실록』 26년 6월 5일) 이어 김신원은 2년 동안 의주 목사로 재임하면서 무역을 통해 중국에서 식량을 공급하여 고을에서 굶주려 죽는 자가 없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조정으로 돌아와서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이어 1597년(선조 30)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승정원 우부승지와 승정원 좌부승지를 거쳐 승정원 우승지까지 이르렀다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선조실록』 30년 4월 17일),(『선조실록』 30년 4월 23일),(『선조실록』 30년 6월 16일),(『선조실록』 30년 8월 27일),(『선조실록』 30년 9월 29일) 그리고 그 해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충청도순찰사(忠淸道巡察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들에게 식량과 군사 물자를 공급하였다.

1599년(선조 32)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선조실록』 32년 2월 2일) 이어 곧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는데,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와 전쟁 물자를 공급하다가 병이 나자, 체직되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으며, 의금부(義禁府) 동지사를 겸임하다가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선조실록』 32년 3월 11일),(『선조실록』 32년 12월 26일) 1600년(선조 33)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고, 1601년(선조 34) 조정으로 돌아와서 중추부 지사(知事)로서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선조실록』 33년 2월 27일),(『선조실록』 34년 9월 18일)

1602년(선조 35) 세자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주청(奏請)하는 세자책봉사(世子冊封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선조실록』 36년 5월 16일),(『선조실록』 36년 8월 7일) 그리고 이듬해인 1603년(선조 36)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1605년(선조 38) 병으로 사직하고, 중추부 동지사가 되어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으며, 1607년(선조 40) 중추부 지사가 되어 의금부 지사와 춘추관 지사를 겸임하였다.(『선조실록』 36년 8월 17일),(『선조실록』 38년 5월 16일),(『선조실록』 40년 5월 5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러면서 김신원은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광해군을 적극 보좌하였다. 이 해에는 그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판서가 되었고,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609년(광해군 1)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임해군 옥사>가 일어나자 이를 심문하는 데에 참여하여 숭양부원군이 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11일),(『광해군일기』 즉위년 3월 1일),(『광해군일기』 즉위년 10월 3일),(『광해군일기』 1년 10월 16일) 그때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제 2왕자라고 하여, 제 1왕자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원인을 조사하려고 하였으므로, 종사(宗社)의 안정을 위하여 임해군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11년(광해군 3) 중추부 판사가 되었으며, 셋째아들 김극빈(金克鑌)은 선조의 딸인 정근옹주(貞謹翁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 일선위(一善尉)가 되었다.(『광해군일기』 3년 5월 21일)

1612년(광해군 4) 외직으로 나가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는데,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김직재의 옥을 고변하자, 김신원은 실권자 이이첨의 부탁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 참여하여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이 되었다.(『광해군일기』 4년 4월 24일),(『광해군일기』 4년 9월 19일) 김직재의 옥은 봉산군수(鳳山郡守)신율(申慄)이 도적을 잡아서 심문하던 가운데, 문관(文官) 김직재(金直哉)가 서인(西人) 황혁(黃赫)과 같이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고 한다고 고변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진릉군이태경(李泰慶)은 선조의 아들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였고, 순화군의 부인은 황혁의 딸이었다. 이에 서인 황혁·김직재 등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했는데, 황혁이 곤장을 맞고 감옥에서 죽었다.[『광해조일기』 권1] 이것은 대북의 이이첨·신율이 서인의 중진 황정욱(黃廷彧)·황혁 부자에 대하여 묵은 원한을 갚은 무고(誣告) 사건이었다.

1613년(광해군 5) 병조 판서를 거쳐, 중추부 판사에 이르렀다가, 1614년(광해군 6) 4월 25일, 갑자기 풍질(風疾)로 관청에서 일을 보다가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2세였다.(『광해군일기』 6년 4월 25일) 광해군이 예조에 명하여 의례에 따라 후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은 온화하고 관대하며, 화락하고 인자하였다. 행동은 자신을 단속하여 소탈하고 검소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바른 도리로써 자손을 가르쳤고 정성과 화목으로써 한집안을 화합시켰다. 벼슬할 때에는 일이 쉬운 것이건 어려운 것이건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기뻐하지 않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슬퍼하지 않았으며, 출세하려고 세력이 있는 자에게 아첨하거나 붙좇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반대파 서인들도 “조금 청렴결백하였다”고 평하였다.(『선조실록』 40년 5월 5일)

김신원은 그보다 11세가 많은 형 김효원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형의 성품과 행동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자를 수백이라고 하고, 호를 소암이라고 한 것도 김효원의 인백이라는 자와 성암이라는 호를 본 딴 것으로, 성격이 호방한 형 김효원에 비하여 소극적인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지은 것이다. ‘동인의 우두머리’로 김효원이 지목되자, 선조는 김효원을 <을해당론(乙亥黨論)>의 책임자라며 지방관으로 내쫓았다. 이에 10여 년 동안 형 김효원은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는데, 그때 김신원은 성품이 상당히 무난하였기 때문에 서인의 비방과 동인의 칭찬을 심하게 받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오랜 연륜과 명망을 쌓아서 대관(大官)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광해군일기』 6년 4월 25일) 형 김효원이 일찍이 동생 김신원에 대해 칭찬하기를, “세상에 선(善)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는 데에 내 아우와 같은 자는 혹시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겸허하고 자기를 낮추는 데에 동료 중에서 그와 짝이 될 만한 자는 드물 것이다”라고 하였다.[『유재집(游齋集)』 권23 「숭정대부행병조판서김공신도비명(崇政大夫行兵曹判書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신원비명」으로 약칭]

김신원과 그의 동생 김의원도 모두 명성이 있었는데, 형 김효원이 너무 강경한 주장을 펴다가 동인의 우두머리로 지목을 당하여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친구인 이성중(李誠中) 등과 함께 서인과 타협하고자 온건론을 펼치며 당쟁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김신원·이성중의 온건론은 처음의 주장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강경파 이발(李潑)·정여립(鄭汝立) 등은 이에 불만을품고 자기들까지 떨어져 나가서 하나의 당파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김신원·이성중의 온건론은 벼슬을 하고 있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의 동인에게 지지를 받고. 이발·정여립의 강경론은 아직 벼슬하지 못하고 있는 재야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동인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누어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정여립이 전국적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 정여립·이발 등 동인의 강경파 1천 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광해군 시대 제 1왕자 임해군과 김직재의 난이 연달아 일어났을 때 김신원은 광해군을 위하여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 참여하여 두 번이나 훈봉(勳封)을 받았지만, 이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지 않고 남에게 자랑하지도 않았다. 등청(登廳)하면 오로지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고, 퇴청(退廳)하면 자기 집 대문을 닫아 잠근 채 세상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조용하게 은거하였다. 집안에 꽃과 대나무만이 쓸쓸하게 자랐으므로, 사람들은 훈신(勳臣)의 집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것은 일찍이 형 김효원이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다가, 마침내 동인의 우두머리로 몰려 변방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을 항상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김신원을 칭송하였다. 그가 죽고 난 뒤에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들이 그의 훈작을 추탈(追奪)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은 김신원에 대해 허물하지 않았다.[「김신원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근군(楊根郡)양백산(陽白山) 아래 언덕에 있는데, 부부가 합장되었다. 지금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全壽里) 산220-1에 무덤이 있다. 그가 죽은 지 138년 만에 후손들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김신원은 광해군 때 대북 정권의 실세였기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그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1752년(영조 28) 이현석(李玄錫)이 글을 짓고 이광사(李匡師)가 글씨를 썼다.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사직서(社稷署)영(令)김광렬(金光烈)의 딸인데, 자녀는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 김극전(金克銓)은 두 번이나 장가를 갔으나 자식이 없었다. 차남 김극명(金克銘)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다. 3남 김극빈(金克鑌)은 선조의 딸 정근옹주에게 장가들어 일선위에 봉해졌는데, 자식이 없어서 조카 김세필(金世泌)을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중추부 동지사안사성(安士誠)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조질(趙質)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사서(司書)유정립(柳鼎立)에게 시집가고, 4녀는 종실(宗室) 호안군(湖安君)이오(李澳)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은 김극섬(金克銛)이다.[「김신원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기재사초(寄齋史草)』
  • 『유재집(游齋集)』
  • 『성암유고(省菴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