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공신(翼社功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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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익사공신 |
한글표제 | 익사공신 |
한자표제 | 翼社功臣 |
상위어 | 공신(功臣) |
하위어 | 효충분의병기결책익사공신(效忠奮義炳幾決策翼社功臣), 효충분의병기익사공신(效忠奮義炳幾翼社功臣), 효충분의익사공신(效忠奮義翼社功臣) |
관련어 | 임해군(臨海君) |
분야 | 정치/인사/녹훈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익사공신(翼社功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5년 3월 12일 |
임해군을 탄핵하여 숙청한 공로로 광해군대에 책봉된 공신.
내용
선조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장자도 아니었고 적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 때문이었다. 선조가 명나라에 망명하기 위하여 의주로 가서 머무는 동안 세자 광해군은 국내를 전전하며 왜적과의 항전을 주도하였다. 반면에 임해군은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함경도 회령에서 군사를 모으다가 왜군들에게 사로잡혔다. 사나운 하인들을 풀어 민간을 노략질하던 임해군은 회령의 아전들에게 결박당하여 왜적의 손에 넘겨졌다. 임해군은 기나긴 협상 끝에 1593년(선조 26) 8월에야 왜적들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임해군은 조심하지 않았다. 결국 선조의 국상이 난 1608년 2월 1일로부터 13일째 되던 14일부터 삼사에서 임해군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14일 당일로 임해군은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20일에는 강화도 교동으로 옮겨졌고, 1609년(광해군 1) 4월 29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5월에 임해군을 탄핵하여 숙청한 익사공신 48명을 책봉하였다. 1등은 효충분의병기결책익사공신(效忠奮義炳幾決策翼社功臣)이라 하였으며 허성·김신원·유희분 등 5명이었다. 효충분의병기익사공신(效忠奮義炳幾翼社功臣)이라 불린 2등은 김위·이원익·이덕형 등 15명이었으며 효충분의익사공신(效忠奮義翼社功臣)이라 불린 3등은 이이첨 등 28명이었다. 익사공신은 인조반정 이후 삭제되었다.
용례
效忠奮義炳幾決策翼社功臣 二等減決策二字 三等減炳幾決策四字 一等五人 二等十五人 三等二十八人 許筬金履元柳希奮崔有源尹孝全等爲之首 宦官衛士 皆參錄(『광해군일기』 5년 3월 12일)
참고문헌
-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