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관(具致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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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6년(태종6)~1470년(성종1) = 65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이율(而栗)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구치홍(具致洪)의 형이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구수영(具壽永)의 백부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34년(세종16) 세종(世宗)이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여 직접 책문(策問)할 때 24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검열(檢閱)을 거쳐 대교(待敎)·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로 승진하였다.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을 거쳐 1444년(세종26)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학사(學士)들과 교유하여 가깝게 지냈다. 1446년 모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을 치룬 다음, 병조정랑·성균관사예(司藝)·의정부(議政府)검상(檢詳)·사복시(司僕寺) 윤(尹)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함길도(咸吉道)로 파견되어 김종서(金宗瑞)를 지지하던 토착 세력을 토벌하고 보공대장군(保功大將軍)에 임명되었다. 1454년(단종2)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도승지(都承旨)강맹경(姜孟卿)과 함께 왕명을 출납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유(李瑈)를 적극 도왔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5년(세조1)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봉되었으며, 공조참판·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457년 세조가 제 2자 해양대군(海陽大君: 예종)을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주청사(奏請使)를 중국에 보낼 때 부사(副使)로서 북경(北京)에 가서 명(明)나라의 허락을 받아서 돌아오니,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평안도(平安道)가 북방의 관문이므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중신(重臣)이 절도사(節度使)를 맡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1458년(세조4) 구치관(具致寬)을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에 임명하였다. 1459년(세조5)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전선(銓選)의 업무를 맡았는데, 지극히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하였다. 1461년(세조6) 여진족(女眞族) 낭볼칸(浪甫兒罕)이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고 반란을 일으키자,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에 임명되어, 그 반란을 진압하였다. 1462년(세조8)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 그해 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1464년(세조10) 좌의정(左議政)을 거쳐서 1466년(세조12)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1467년(세조13)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하여 파저강(婆猪江)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정복하였는데,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을 맡아서 조선의 정벌군을 지휘하였다. 이것이 “성화(成化) 3년의 역사(役事)”라고 하는데, 세조는 좌우(左右)에게 말하기를, “능성군은 나의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같은 신하이다.”라고 칭찬하였다.

1468년(예종즉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서 호조판서를 겸임하였고, 1469년(성종즉위)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원상으로서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2) 사후에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었는데, 성종은 그를 ‘선왕조(先王朝)의 구신(舊臣)’이라 하여, 매우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1470년(성종1) 9월 병으로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치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며 지조가 굳고 식견이 높아서, 해박한 경술(經術)로써 임금을 보좌하였다. 국사(國事)를 의논할 때에는 대범하고 엄격하며 언행이 바르고 곧았으므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밝고 정대하였다. 평생 동안 오직 나랏일만을 걱정하여 부지런히 뛰어다녔으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한 마디 말은 들어볼 수 없었다. 세조가 개혁 정치를 추진할 때 그가 계획을 철저하게 수립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니, 세조가 감탄하기를, “능성군은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니, 내가 어찌 나라에 장상(將相)의 재목이 없다고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의정부에서 벼슬할 때에는 정사(政事)를 너그럽게 펴고 경장(更張)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재상(宰相)의 체모를 가졌다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여미리(餘未里) 건강(乾岡)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해동잡록(海東雜錄)』
  • 『불우헌집(不憂軒集)』
  • 『동문선(東文選)』
  • 『필원잡기(筆苑雜記)』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