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홍(具致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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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1(세종3)~1507년(중종2) = 87세]. 조선 초기 세조(世祖)~중종(中宗) 때의 무신.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영의정구치관(具致寬)의 동생이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구수영(具壽永)의 아버지이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조의 어머니)의 아버지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구사맹(具思孟)의 선조이다.

세조 시대 활동

1458년(세조4) 세조(世祖)가 선전관(宣傳官)의 선발을 중시하여,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한 사람을 가려 뽑아서 임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구치관이 그 동생을 추천하자 세조가 그 사람됨을 보고 바로 선전관에 임명하였다. 그 이듬해 무과(武科)에 급제하니, 세조가 친히 그에게 『육변진서(六變陣書)』를 가르쳐 주었다. 1461년(세조7) 세조가 풍양(豐壤)에 거둥하여 강무(講武)를 하였는데, 구치홍(具致洪)을 위장(衛將)으로 삼았다. 그 뒤 예빈시(禮賓寺)소윤(少尹)에 임명되어, 사복시(司僕寺)를 거쳐서 내자시(內資寺) 윤(尹)으로 전임되었다. 또 예빈시정(正)으로 승진하여 내승(內乘)을 겸임하였는데, 그가 맡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세조의 뜻에 맞아서 더욱 그를 사랑하였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의 종사관이 되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 공로로 1469년(예종1)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성종(成宗) 때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발탁되어, 1472년(성종3)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가, 1475년(성종6) 돈령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 1482년(성종13)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나갔는데, 도내(道內)의 여러 고을에 잡물(雜物)을 요구한 죄로 고신(告身)을 빼앗겼다가, 3년 뒤인 1485년(성종16) 고신을 되돌려 받았다. 1488년(성종19)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중추부첨지사에 임명되었다. 1505년(연산군11)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고, 1506년(중종1)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중추부지사(知事)로서 훈련원(訓鍊院)지사를 겸임하였다. 1507년(중종2)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 87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치홍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엄격하였으며, 평소 가정에서 자제들을 대하는 데에도 매우 법도가 있었다. 젊어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업으로 삼아서 무예가 크게 이루어질수록 행동을 더욱 신중하게 하였다. 성격은 소탈하고 대범하였으며, 순박한 가운데 자긍심이 강하였다. 평소에 조용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감히 무시하여 일개 무사(武士)로 대우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팔순(八旬)이 넘었어도 총명하고 강건함이 젊은 사람과 같아서 조정의 하례(賀禮)에는 언제나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그는 말을 타고 갈 때에도 견마(牽馬)를 두지 않았고, 걸어갈 때에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으며 그가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나무를 세워 놓은 것과 같았다고 한다.

묘소와 성품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 선영(先塋)에 있는데, 강혼(姜渾)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