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장(治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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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이 발생했을 때 장사지낼 능역을 조성하는 것.

개설

능역에는 재궁을 안치할 광(壙), 명기(明器)복완(服玩) 등을 매안하는 퇴광, 봉분, 봉분을 보호하는 사대석(莎臺石), 봉분 주변의 각종 상설(象設), 북장, 비각(碑閣) 등으로 구성되며, 능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정자각, 예감(瘞坎), 고방(庫房), 재주(齋廚), 재방(齋坊) 등의 시설물이 있다. 상설에는 묘비, 혼유석, 장명등, 석호, 석양, 석마,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으며, 이는 산릉의 위엄을 표현한 것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국상 때 문무백관을 형상한 제도이다.

내용 및 특징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된 치장조 곧 장사지낼 곳을 조성하는 의절을 살펴보자.

왕은 5개월 만에 장사를 지내는데, 이를 위해 먼저 예조(禮曹) 당상(堂上)과 풍수학(風水學) 제조(提調)가 서운관(書雲觀) 관원을 거느리고 장사지낼 만한 땅을 가렸다. 이를 다시 의정부(議政府) 관원이 살핀 뒤 왕의 재가를 받은 다음, 길일을 택하여 영역(塋域)의 네 모퉁이에 각각 표지를 세운다. 남문(南門)에는 표지 두 개를 세운다. 서운관의 관원은 중간 표지의 왼쪽에서 후토(后土)에게 제사지낸다. 그리고는 산릉을 조성하는 여러 작업을 시작하는 날로 점쳐진 길일에 이를 착수하도록 되어 있다.

1) 광의 조성

광은 깊이가 10척, 너비가 29척이다. 숯가루로써 쌓아 올리는데, 두께는 동쪽과 서쪽이 각각 5촌이다. 삼물(三物) 즉 석회(石灰)·세사(細沙)·황토(黃土) 등 세 가지를 서로 배합하여 쌓아 올리는데, 두께는 동쪽과 서쪽이 각각 4척이다. 석실(石室)은 동쪽·서쪽 방석(旁石)의 두께가 각각 2척 5촌이고, 중간 격석(隔石)의 두께는 4척이다. 동쪽·서쪽 실내(室內)의 너비는 각각 5척 5촌이니, 합계가 29척이다. 길이는 25척 5촌이다. 북쪽 우석(隅石)의 두께는 2척 5촌이고, 문비석(門扉石)과 문의석(門倚石)의 두께는 각기 2척이다. 석실 안의 길이는 10척이니, 합계가 25척 5촌이다. 남면(南面)을 터서 연도(羨道)로 만든다.

2) 재궁대석체(梓宮臺石砌)

재궁대석체의 당처(當處)에도 또한 깊이 7촌을 더 파서 굵은 모래와 본 흙을 사용하여 도로 메우고 쌓아 올리지 말게 하며, 협석(挾石)의 있는 곳은 단단히 이를 쌓아서 동망(銅網)을 석실 안에 펴고, 유회(油灰)를 지석 위에 펴고, 다음에 박석과 문역석을 추가한 후에 격석을 양쪽 석실 사이에 설치한다. 격석 가운데에는 창구멍[窓穴]이 있는데, 돌 양면에서 구멍을 만든다. 다음에 북쪽 우석과 방석 및 우석과 방석의 서로 접한 곳에는 모두 파서 대인정(大引釘)을 쳐서 물러 나가지 못하게 한다.

다음에 석체(石砌)를 설치한다. 석체는 양쪽 석실에 각각 1개씩인데, 전석(全石)을 사용한다. 높이는 1척 8촌, 길이는 8척 7촌, 너비는 3척 9촌이다. 개석(蓋石) 각각 1개를 양쪽 석실의 위에 추가하고, 개석 1개를 양쪽 개석의 사이에 더 얹어둔다. 격석의 창구멍에는 황장판(黃腸板)으로 막고, 모래흙과 석회재 등의 깨끗한 물질을 사용하여 수실(壽室) 안을 메우고 가문비석(假門扉石)으로 막는다. 양쪽 석실의 우석·방석·문비석의 밖에 판자를 빙 둘러 설치하고, 석회·세사·황토로 단단히 쌓아올리고 숯가루를 빙 둘러 쌓아서 더 얹어둔 개석 위에까지 이르러, 가운데는 높고 사방을 낮게 하여 물이 새어 들어오는 걱정이 없게 한다.

3) 사대석

광 밖은 평지 위의 동쪽·서쪽·북쪽 3면에 지대석이 배치된 곳의 밑바닥을 단단히 쌓아 올린다. 먼저 초지대석(初地臺石) 24개를 배치하고 정지대석(正地臺石) 12개를 초지대(初地臺)의 위에 두고, 다음에 운채(雲彩)를 새긴 우석 12개와 돌마다 외변 한복판에 방위(方位)의 신(神)을 새기고, 사방에 운채를 새긴 면석(面石) 12개를 정지대석 위에 두고, 다음에 돌마다 하면(下面) 외변의 5촌에 앙련(仰蓮)을 새겨 만든 만석(滿石) 12개를 우석과 면석 위에 두고, 또 돌마다 외단(外端)에 모란 혹은 해바리기꽃[葵花]을 새겨 서로 섞어서 배설하는 인석(引石) 12개를 만석 위의 판 곳에 더하게 한다.

4) 개석

그 사면의 배치한 돌의 안과 숯가루의 위에 본 흙을 사용하여 단단히 쌓아올려서 만석의 상변에 5촌을 이르지 못해서 그치는데, 가운데는 높고 사방을 낮게 한다. 이에 개석의 내면에는 묵(墨)으로써 천형(天形)·일월·성신·은하를 그리되, 모두 전차(躔次)에 의거하고 천상(天象)의 밖과 사방의 방석(傍石)에는 모두 분으로 바탕을 삼아,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북쪽에는 현무, 남쪽은 문비(門扉)의 양쪽 돌이 서로 합치는 곳에 주작을 그린다. 다음에 황장판을 석체에 두고, 지의(地衣)와 욕석(褥席)을 그 위에 펴고, 또 석체 밖의 지상(地上)에 빙 둘러 대자리와 돗자리를 펴고 재궁을 욕석 위에 안치하고 마침내 발을 문 안에 드리운다. 문비석을 닫고 문의석을 추가한다.

5) 편방

문의석 밖에 돌로 편방(便房)을 만든다. 석회·세사·황토의 세 가지 물질과 숯가루를 쌓아 올리고 그밖에 돌을 배열하며 흙을 섞어서 메워 쌓은 후에 초지대석을 석실의 전면에 배치하고, 다음에 정지대석을 두고, 다음에 우석과 면석을 두고, 다음에 만석을 두고, 다음에 인석을 두고 다음에 석회·세사·황토의 세 가지 물질을 만석의 안에 채우고, 만석의 상변(上邊)으로부터 5촌을 쌓아 올리지 못해서 비로소 빙 둘러 쌓는데, 모양이 엎은 가마솥[覆釜]과 같으며, 두께는 2척 5촌이 되면 그친다. 또 본 흙을 그 위에 쌓아 올리되, 뾰족하고 둥그스름한 데[剡圓]에 이르러 그친다. 사토(莎土)를 덮는데, 능의 높이는 만석으로부터 12척 5촌이 된다.

6) 난간석

또 12면 초지대석의 밖에, 먼저 나간 아래 지대[欄干下地] 12개와 우석 12개를 설치하되, 서로 섞어서 배치하고, 초지대석과 난간 아래 지대석[欄干下地臺石]은 우석의 사이에 양쪽 박석(博石)의 서로 접하는 곳을 헤아려서 각각 지석(支石)을 설치하고, 그 돌 사이에는 석회·세사·황토의 세 가지 물질을 사용하여 단단히 쌓아 올리고, 위에는 외박석(外博石)을 설치해서 밖을 향하여 기울어지게 하여 물을 멈추어지지 못하게 하고, 석주(石柱) 12개로써 우석의 위에 세우고, 다음에 동자석주 12개로써 지대석의 위에 세우고, 죽석 24개를 석주의 사이와 동자석주의 위에 가로로 세우고 차례로 빙 둘러 연하여 배치하고, 그 서로 접하는 곳에는 모두 유회를 사용하여 이를 채운다.

난간의 1면은 길이가 15척 3촌이니, 12면의 둘레는 183척 6촌이나 된다. 우석마다 외면에 흙을 파서 외지석(外支石) 12개를 배치하여, 우석을 물러 나가지 못하게 한다.

7) 북장

지대석과 우석 밖의 공지(空地)에 빙 둘러 너비 3척, 깊이 2척 가량을 파서 석회·세사·황토의 세 가지 물질을 단단히 쌓아 올린다. 동쪽·서쪽·북쪽의 3면에 원장(垣墻)을 두르는데, 높이가 3척 4촌이다. 북장(北墻) 아래에 2개의 층계를 설치하고 담장 안에 석양(石羊) 4개를 동서에 각각 2개씩을 설치하고, 석호(石虎) 4개를 북쪽에 2개, 동서에 각각 1개를 설치하되, 모두 밖을 향하게 한다. 남쪽에 3개의 층계를 설치하고 석실의 남쪽 7척쯤에 땅을 깊이 5척을 파서 석회·세사·황토의 세 가지 물질을 사용하여 밑바닥을 쌓아 올리되, 두께는 1척 5푼으로 한다. 유회로써 지석(誌石)의 내변(內邊) 사변(四邊)을 잠시 발라서 자획(字畫)에 침근(侵近)하지 못하게 하고, 곧 개석(蓋石)으로 서로 합친다. 또 유회를 양쪽 돌의 합봉(合逢)한 틈에 바르고, 동철승(銅鐵繩)으로써 이를 묶되, 가로와 세로를 각각 1개씩으로 하여 판 땅의 속에 설치한다. 그 사방과 상면에는 석회·세사·황토의 세 가지 물질로 서서히 쌓아 올려서, 두께를 1척 5푼이 되게 한 후에 본 흙으로 메워 쌓아서 이를 묻는다.

8) 삼계(三階)

석실의 남쪽 한복판에 석상(石床) 1개를 두고, 그 좌우에 석망주(石望柱)를 세운다. 중계(中階)의 한복판 북쪽 가까이에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좌우에 문석인(文石人) 각각 1개와 석마(石馬) 각각 1개씩을 세운다. 하계(下階)의 좌우에 무석인(武石人) 각각 1개를 세우고, 또 석마 각각 1개를 세우되, 모두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보게 한다.

9) 제전(祭殿)

석실 정남방의 산기슭에 정자각을 건축하고, 예감을 그 북쪽의 임지(壬地)에 판다. 그 동쪽에는 비각을 세우고, 남쪽에 고방을 설치하고, 그 재주와 재방은 땅의 적당한 데 따라 세운다. 능지기 2인과 수호군(守護軍) 100호(戶)를 두어서 청소와 초채(樵採)를 금지하는 일을 맡게 한다.

변천

각 상설과 제전(祭殿) 등은 1420년(세종 2)의 기록과 오례, 의궤를 비교하여 보면, 그 규격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그것은 산릉의 조영 환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왕의 의지와 제도의 변화에 따른 양식의 차이도 많이 보이고 있다.

세종의 영릉(英陵), 단종의 장릉(莊陵), 추존된 왕인 원종의 장릉(章陵)과 진종의 영릉(永陵), 장조의 융릉(隆陵) 등에는 난간석이 없다. 그러나 익종의 능인 수릉(綏陵)에는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세종의 영릉은 여주로 옮기기 이전에는 난간석과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세조의 유명으로 천봉하면서 신도비는 땅에 묻고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또한 사대석도 시설하지 않았다. 사대석은 왕의 능에만 조영되었다. 그러나 단종과 효종 등 여러 왕의 능에는 조영되지 않았다. 왕비의 단독 능에도 조영할 수 없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에는 이를 조영했다. 명종의 능인 강릉(康陵)과 원종의 능인 장릉은 쌍분으로 왕비의 능에 사대석이 마련되었는데, 선조와 인조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망주석은 조선초기에는 전죽석(錢竹石)이라 불렸다. 문인석은 초기의 높이에서 대석이 도입됨으로써 더 커졌다. 그러다가 숙종대 이래 실물 크기로 축소되었다. 복식은 조선초기에는 복두(幞頭)공복(公服) 차림으로 홀을 들었는데, 명종조 이후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으로 점차 바뀌어 나갔다. 석마는 1442년(세종 24)부터 조영하기 시작했다.

왕의 광은 석실을 사용했다. 반면, 1406년(태종 6) 윤7월에 대신(大臣)의 예장(禮葬)에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회격을 쓰고 석실을 쓰는 것을 금하였다(『태종실록』 6년 윤7월 28일). 1418년(태종 18)에는 종친 이하의 예장에도 석실을 없애고 회격을 쓰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1월 11일). 그러나 산릉에 대해서는 1408년(태종 8) 7월에 서운관에서 상서하여 석실을 영조(營造)할 것을 청하였다(『태종실록』 8년 7월 9일).

석실 사용의 전거로는 호순신(胡舜申)의 기혈론(基穴論)과 『주자가례』를 들었다. 그리하여 대행태상왕(大行太上王)의 능은 돌을 써서 실(室)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 이 문제는 의정부에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합의되지 않자, 태종이 세자를 명하여 종묘에 나아가 점[栍]을 쳐서 결국 석실로 정하였다.

1757년(영조 33)에는 정성왕후(貞聖王后) 국장에 홍릉(弘陵)사방석(四方石)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영조실록』 33년 5월 5일). 태종 때에 왕후의 능에서 광(壙) 위의 개석(蓋石)을 전석(全石)으로 쓰던 것을 두 조각의 돌로 쓰도록 하였는데, 지금 전석을 사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내광(內壙)에는 천회(天灰)만 사용하고 사방석의 덮개는 없는 것이며, 더구나 천회는 오래되면 돌이 되어 곧 하나의 석광(石壙)이 되므로 석광 위에 또 편석(片石)을 더하는 것은 형식 가운데 형식이라는 것이다. 수도각(隧道閣)도 긴 나무를 가져다 쓰는 폐단을 방지하고자 처음으로 제도를 변경하여 그림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싣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석(誌石)도 영릉(寧陵)에 쓰고 남은 자지(磁誌)를 쓰도록 했다.

의의

산릉은 궁궐의 영건구조를 모방하여 중축선을 따라 조영되었다. 이것은 왕의 권위와 위신을 높이는 차원에서 고안되었다. 이러한 건축사상은 광의 구조와 각 상설 및 제전에도 투영되었다. 따라서 산릉 조영의 실제인 치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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