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등(長明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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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陵)·원(園)·묘(墓)의 봉분(封墳) 앞에 조성한 석등(石燈).

내용

장명등은 불교 사원의 석등에서 유래되었다. 꺼지지 않고 언제나 타오르기 때문에 장명등이라고 한다. 조선은 고려의 왕릉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장명등을 그대로 설치하였다. 장명등을 불교적인 것으로 파악한 유학자들은 장명등을 켜놓고 분향을 올리는 것은 유교의 제사 절차와 맞지 않다며 쓸데없는 물건이니 설치하지 말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미 설치한 장명등을 없애지는 못하였지만 세종 때부터 불을 켜지 않고 분향하는 것으로 정리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설치되었다.

장명등은 꼭대기의 정자석(頂子石)개석(蓋石), 화창이 있는 격석(隔石)과 대석(臺石), 받침돌인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과 격석의 형태에 따라 크게 8각, 4각형의 장명등이 만들어졌다. 조선전기 정릉(貞陵), 후릉(厚陵)과 후기의 장릉(莊陵)부터 효창원(孝昌園)까지의 13개 능원과 수릉(綏陵), 경릉(景陵), 홍릉(洪陵), 유릉(裕陵)은 장명등의 형태가 4각형이며, 그 외의 능·원·묘는 모두 8각형 구조로 제작되었다.

개석은 조선전기의 경우 상단부에 원수(圓首), 연주(連珠)를 만들고 그 아래 지붕 모양으로 제작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원수 아래에 미개연화(未開蓮花)와 이개연화(已開蓮花)를 만들고 지붕 모양의 개석을 함께 사용하는 등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장명등의 크기는 『세종실록』 「오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에 규정을 마련해 두었으나 각 능·원·묘마다 다르게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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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

中階正中近北 設長明燈[『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치장]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춘관통고(春官通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