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洪陵)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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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릉 |
한글표제 | 홍릉 |
한자표제 | 洪陵 |
상위어 | 능원(陵園) |
관련어 | 고종황제(高宗皇帝), 명성황후(明成皇后), 황제릉(皇帝陵)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
집필자 | 강성원 |
장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릉(洪陵) |
조선 고종황제와 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능.
개설
고종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함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1866년(고종 3)에는 민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 뒤 1895년(고종 32)에 이른바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되었는데,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 장사를 치르지는 못했다. 1897년(고종 34) 1월에서야 왕비의 시호를 명성, 능호를 홍릉으로 정하였다. 그해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연호는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에 따라 명성왕후 역시 황후로 추존되었고, 그해 11월에 양주군에 안장되었다. 10년 뒤인 1907년(융희 1)에 순종에게 황위를 넘긴 고종은 1919년에 승하하여, 양주 금곡(金谷)에 명성황후와 합장되었다.
조성 경위
명성황후의 능은 맨 처음 1895년 11월 16일에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정자각에 사용할 대들보를 구하면서 조성이 시작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동구릉 내에 정자각과 비각, 재실 등을 완공했으나, 그해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국장을 연기하게 되었다. 1897년(고종 34) 2월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그해 11월 기존 산릉 터를 포기하고 새로 청량리에 조성된 홍릉에 명성황후를 예장하였다.
이후 홍릉의 자리가 좋지 못하다는 논의에 따라 홍릉을 옮기기 위해 천릉도감(遷陵都監)과 산릉도감을 설치하였고, 1900년(광무 4)에 새 능지를 현재의 위치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효정왕후(孝定王后)와 순명(純明) 황태자비의 장례, 경운궁 화재 등을 거치면서 연기되었고, 결국 1904년(광무 8)에 두 도감이 철폐되면서 천릉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21일에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명성황후의 재궁을 옮겨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마련한 홍릉에 합장하였다.
조성 상황
홍릉 천릉이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1900년에 새 산릉 터를 정한 뒤부터 1904년까지 산릉의 조성이 이미 진행되었던 상태였다. 침전·비각·안향청·내재실·어재실·예재실·각감청·상선 처소·나인 처소 등이 이때에 조성된 것이다. 결국 이 건물들은 1919년 고종의 국장 때 쓰이게 된다. 『매일신보』 1919년 1월 28일자의 ‘금곡어묘소(金谷御墓所)의 배치(配置)’를 보면 당시의 건물 배치를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침전, 비각, 내재실, 어재실이 있다. 이는 현재의 홍릉 배치와도 같다.
홍릉은 동원(同園) 합장릉(合葬陵)으로, 능침 뒤로 3면에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반구형의 봉분과 화문(花紋)이 조각된 12면의 병풍석을 두었다. 침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인데, 당시의 도설(圖說)은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高宗太皇帝山陵主監儀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대 기단을 네벌대로 놓고 박석을 깔았다. 침전 왼쪽에는 비각을 두었고, 침전과 홍살문 사이에 수복방과 수라간을 배치하였다.
변천
홍릉이 왕릉에서 황제릉으로 바뀌면서 정자각이 침전으로 대체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1897년 2월 25일 기록을 보면, 기존 왕릉의 일반적인 정자각은 정전과 배위청(拜位廳)을 합해 8칸 혹은 5칸 규모였는데, 이번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거하여 침전으로 일컫고 규모는 5칸으로 정하며, 배위청의 역할을 침전 내에 두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고종은 1897년에 명나라의 능제를 살펴보기 위해 직접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중국공사로 북경에 있던 박제순(朴齊純)이 명나라 제왕의 능침 제도를 도사(圖寫)하여 보내오자, 그것을 참고하여 규모를 정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침전으로의 변모 및 십이간지석과 문무인석 등을 능침 위에 세우지 않고 침전 앞에 세우는 등의 변화는 황제릉의 격을 갖추려는 고종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高宗太皇帝山陵主監儀軌)』
-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明成皇后洪陵山陵都監儀軌)』
- 『매일신보』, 1919년 1월 28일.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