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서(朴彛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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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1년(명종 16)~1621년(광해군 13) = 6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참판(參判)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자는 서오(敍吾)이고, 호는 비천(泌川)·동고(東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박율(朴栗)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영양수(永陽守)이춘복(李春福)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학유(權知學諭)가 되었고,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으로 선발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어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병조 좌랑(佐郞)으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이 때 그는 세자(世子)분조(分朝)를 수행하여 순찰사(巡察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해서(海西)의 군량 조달 임무를 맡았다. 1593년(선조 26)에 어머니가 임시로 송화현(松禾縣)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병란(兵亂)과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상례(喪禮)를 등한히 하였으나, 그는 마음을 다하여 3년 상(喪)을 마쳤다.

상(喪)을 마친 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이 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때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거짓으로 강화(講和)를 요청하자, 조선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수와 화친할 수 없다고 상소를 올려 극구 반대하다가 정부의 의논을 크게 거슬렸으므로, 해서 독운어사(海西督運御使)로 좌천되었다. 일본과의 강화가 실패하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자 명(明)나라 군사가 대대적으로 조선에 집합하였다. 당시 그는 혼자 큰 지역의 군량 조달 임무를 맡았는데, 그 공로로 군사와 백성이 구제되었다.

1599년(선조 32) 3월초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3월 중순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며, 4월 중순에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 그가 교리가 되었을 무렵, 이이첨(李爾瞻)이 또 다시 사림의 의논을 반대하고, 홍여순(洪汝諄)이 권력을 잡아 그 기세가 한창 치성하였다. 그러므로 6월 중순에 부교리로서 응교(應敎)박이장(朴而章), 부교리이덕형(李德泂), 수찬(修撰)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이들은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해 12월초 삭탈관직되어 8년간 여강(驪江)으로 물러나 살았다. 1607년(선조 40) 여름에 대사면(大赦免)으로 인해 복권되어, 12월 말경에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이 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2월 초순에 사간(司諫)이 되었고, 2월 말에 홍문관 부응교 되었으며, 4월에 다시 사간이 되었다. 그 뒤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1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간이 되었고, 이 해 5월에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으며, 12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3월에 형조 참의가 되었고, 4월에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12월에 경기안무사(京畿按撫使)가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2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5월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 임기가 차자, 1612년(광해군 4) 6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로 들어왔는데, 9월 초에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전조(銓曹)에서 개정 추천하여 9월 중순에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달에 병조 참의가 되었다. 11월 중순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며칠 안 되어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5월에 성균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11월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며, 1614년(광해군 6)에 의금부(義禁府) 동지사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에 “국법을 무시하고 한갓 같은 당파인 소북파만 감싸고 동료들의 의견을 배척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그 뒤에 서반직(西班職)으로 복직, 1618년(광해군 10) 1월에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었다. 그가 영광군수로 나간 지 1년이 지났을 때, 이창후(李昌後)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탐욕을 부리자, 그는 그의 밑에 있기가 부끄러워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서반에 기용되었는데, 1620년(광해군 12)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1621년(광해군 13) 4월 중순 귀국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바다에 빠져 표류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박이서가 진위사로 차출되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60이 된데다가, 요동(遼東)을 청(淸)나라의 군사가 압박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친한 사람들이 병을 핑계 삼아 사신 가는 것을 사양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이는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하고 길을 떠났다. 사신이 연경에 도착하였을 때, 요심(遼瀋: 요동, 심양지방)이 갑자기 함락되었으므로 명나라에서는 이들에게 해로(海路)로 귀국하도록 하였다. 산해관(山海關)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향하였는데, 해로가 불통된 지 이미 2백여 년이나 되어 뱃사람들이 길을 잘 몰랐고 철산(鐵山)의 끝에 도착하였을 때는 갑자기 폭풍을 만났다. 동행한 사람들이 여순(旅順)의 포구로 들어가 기(旗)를 흔들어 그의 배를 불렀으나 불응하였다. 이는 그의 생각에 요동 지역이 이미 오랑캐에게 점령되었으므로 배를 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배가 어디에서 침몰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침몰된 날짜는 1621년 5월 10일이었다. 이 해 10월에 이르러 조선 조정에서는 그가 바다에서 익사하였다는 확실한 통보를 받았으므로, 그를 증직(贈職)하고 아내와 자식에게 월봉(月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이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에 따라 뜻을 가다듬었으므로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었다. 타고난 자질이 엄중하여 사무에 따라 처리하는 바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었으며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는 재능이 있어 여유 만만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고 글을 읽었다.

그는 조정에서 논의할 때, 남의 의견에 구차하게 동의하지 않고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를 보아서 결정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수년간 연달아 청요직(淸要職)에 있으면서 힘써 선류(善類)를 끌어 올리고 간사한 사람을 탄핵하였기 때문에, 거듭 이이첨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무고의 옥사(獄事)가 잇따라 일어나 화(禍)가 매우 참혹하였는데, 그가 여러모로 해명하고 구원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으므로, 사림(士林)들이 또한 그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묘소와 추증

1793년(정조 17) 12월에 충간(忠簡)의 시호를 내렸다. 이식(李植)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치소(治所)의 동쪽 비암산(鼻巖山) 선영(先塋)의 뒤에 있다. 이조 판서로 증직(贈職)되었다.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군수(郡守)이사율(李士栗)의 딸인데,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관찰사(觀察使)박노(朴魯)이고, 2자는 박진(朴晋)이다. 1녀는 관찰사윤지경(尹知敬)의 처가 되었고, 2녀 송길룡(宋吉龍)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