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山海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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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화북과 동북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관문이자 성보.

개설

산해관은 산해관성(山海關城)을 일컫는 말이었다. 유관(渝關)·임유관(臨渝關)·유관(楡關)이라고도 하였다. 명초 지금의 자리로 옮겨 관성을 지은 뒤 현재의 이름으로 칭하였다. 산해관은 명대 만리장성의 동쪽 주요 관진 중의 하나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의 칭호가 있었다. 북쪽으로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바다에 닿는 좁고 긴 통로가 있어 육지와 바다를 제어하는 인후(咽喉: 목구멍으로 중요 지점을 빗댈 때 씀)의 요지에 해당하였다. 또한 조선의 사절이 북경에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명칭 유래

산해관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한(漢)대에 임유현(臨渝縣)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유수(渝水)의 주변이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다. 당(唐)대에 이곳에 관성(關城)을 수축하고 주변에 느릅나무가 많기 때문에 유관(榆關)이라고 하였다. 또한 유수의 이름을 따서 유관(渝關)이라고도 하였다.

자연 환경

동북 지역과 화북 지역의 경계 지역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연산(燕山)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발해에 이르렀다. 바다와 육지의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특성으로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연산과 발해의 해안까지는 약 7.5㎞의 거리에 불과하며 좁고 긴 길이 형성되어 산해관주랑(山海關走廊)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1381년 대장군 서달(徐達)이 본래 유관이 있었던 곳에서 약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관성을 수축하였다. 명대 산해관의 동문은 한 일(一) 자의 장방형 성대(城臺)의 형태로 위로는 성루를 쌓았다. 남북으로는 장성을 연결하고 있어 동쪽이 관외, 서쪽이 관내가 되었다. 행정구역상 명대 산해관은 영평부(永平府)에 속해 있었다. 당시 영평부는 노룡현(盧龍縣)·무녕현(撫寧縣)·창려현(昌黎縣)·영평위(永平衛)·산해위(山海衛)를 관할하였다. 청초에는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노룡현·무녕현·창려현(昌黎縣)과 함께 영평부에 속하였으나 1737년 산해관에 임유현(臨渝縣)이 설치되었다.

산해관의 평면은 사방으로 건물이 들어선 형태로 주위는 4㎞이며 성벽의 너비는 약 7m 높이는 14m였다. 네 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문은 진동문(鎭東門), 서쪽문은 영은문(迎恩門),남쪽문은 망양문(望洋門), 북쪽문은 위원문(威遠門)이라고 하였다. 네 개의 문은 모두 위로 성루를 쌓았고 성의 중심에는 종고루(鍾鼓樓)를 두었다. 산해관의 입구는 한 일[ㅡ] 자의 장방형 성대로 높이 12m에 달하였다. 성 위에는 누각을 지었는데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위치 비정

현재 하북성(河北省)의 진황도시(秦皇島市)에서 동북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다.

관련 기록

『대명일통지(大明一通志)』에 따르면 산해관은 무녕현 동북에 있으며 북쪽으로 산이 있고 남쪽으로 바다가 있는데 그 거리가 몇 리에 불과하여 육지와 바다를 제어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라고 하였다. 자연·지리적 환경에 기반하여 수비에 효율적이었던 관성이었기 때문에 군사요충지로서 중요하였을 뿐 아니라 동북 지역의 여러 민족들을 통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특히 조선 사신들의 사행로이자 외교 통로로서 빈번하게 사료에서 언급하고 있다. 대개 연행 사절들은 조선의 의주와 진강을 지나 중국의 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연산(連山)·첨수(甜水)·요동(遼東)·안산(鞍山)·해주(海州)·우장(牛莊)·광녕(廣寧) 등지를 거쳐 산해관에 들러 유숙한 후 북경에 이르는 노정을 많이 이용하였다. 연행 사절들이 산해관에 들어오면 그곳을 관할하는 주사(主事)와 선물을 교환하는 주·객의 예를 한 뒤 숙소에 묵었다. 또한 중국과 조선 간에 오가는 외교문서나 공문들은 이곳을 통하여 전달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도 산해관은 외교 통로로서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산해관은 군사적·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화(華)와 이(夷)를 구분 짓는 문화적 경계로서의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변에 거주하는 민족들까지 참여하는 시장인 변시(邊市)가 열리기도 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 지역에서 발원하였던 만주족들이 중국을 통치함에 따라 산해관은 교통과 상업 방면에서 기능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곳은 동북 지역과 화북 지역을 지나는 주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에 지나는 사절이나 그 밖에 출입하는 자의 신분과 여정을 주의 깊게 관리하곤 하였다(『정조실록』 10년 윤7월 18일). 『무오연행록』 등에서도 출입의 통제가 상당히 엄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만주족 황제들은 심양(沈陽)과 무순(撫順) 일대에 조상의 능묘를 조영하고 황제가 능묘에 직접 참배하고 유람하였는데 산해관은 황제의 어가가 지나는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정조실록』 7년 2월 27일)(『순조실록』 4년 11월 4일). 또한 산해관은 교통과 상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한인과 만주족이 뒤섞여 거주하고 주변으로 민가가 조성되었다. 『담헌서(湛軒書)』에 따르면 북경과 심양·통주(通州)에 이어 산해관이 시장과 점포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담헌서(湛軒書)』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간역집(簡易集)』
  • 남의현, 「16~17세기 두만강 변경지대 여진의 성장과 국제질서의 변화: 와이객(瓦爾喀) 등 여진족 통합과정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41, 명청사학회, 2014.
  • 남의현, 「16~17세기 여진의 성장과 요동 변경지대 성격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34, 동북아역사재단, 2011.
  • 남의현, 「요동도사 방어체계와 지배력의 한계: 방어체계의 형성-변화-약화과정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93, 동양사학회, 2005.
  • 홍성구, 「중국 학계의 연행록 연구」, 『대동한문학』, 대동한문학회, 2011.
  • 黃普基, 「從“遼燕舊界”到“華夷大界”-朝鮮人筆下的山海關意象」, 『淸史硏究』, 中國人民大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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