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士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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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에 좁게는 문·무반 관원, 넓게는 지배층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

개설

사대부(士大夫)는 ‘사’와 ‘대부’를 포괄하는 용어다. 박지원(朴趾源)이 「양반전」에서 "독서하는 사람은 ‘사’,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부’"라고 정의한 것처럼 사대부는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인 문·무 관원과 ‘독서하는 사람’인 벼슬하지 않은 포의(布衣)의 선비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문반 위주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무반은 점차 사대부의 범주에서 탈락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내용 및 특징

사대부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기원했다. 그 기원은 멀리 선진(先秦)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사회 계층은 천자·제후·경(卿)·대부·사의 위계로 구성되었는데, 대부와 사는 주로 제후의 가신이었다. 특히 사는 전사(戰士)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는 대부와 사의 서열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와 사를 하나로 묶어 ‘사대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대부’라는 용어는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되었다. 전국시대는 여러 제후국이 할거하고 새로운 전략과 철학을 표방한 수많은 인재가 등장한 혼란의 시대이자 발전의 시대였다. 문학유세지사(文學遊說之士)나 임협지사(任俠之士)로 불린 새로운 계층은 기존의 신분 질서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문·무의 관직에 발탁되었고, 그들은 점차 ‘사대부’라는 표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는 그 뒤 한·당대까지 이어져 기본적으로 문·무 관원을 ‘사대부’라고 불렀다.

이런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송대였다. 송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문치주의와 강남 개발인데, 사대부의 범주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즉, 강남 개발로 부를 축적해 지주로 성장한 독서인이나 처사(處士)까지 사대부에 포함되었고, 반면에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무반은 점차 사대부에서 제외되어 간 것이다.

변천

한국사에서 ‘사대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후기 무신의 난 이후였다. 고려전기에는 문·무 양반 체제가 마련되었지만, 집권층의 주류는 문반 귀족이 차지했다. 문반 귀족은 개국공신 계열, 신라의 귀족 계열(진골·육두품), 과거나 서리직을 거쳐 올라온 호족 등이 중심을 형성했다. 이런 구조는 무신의 난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약간 변화했다. 무신 귀족과 친원 세력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고 그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일부 문신 가문도 새롭게 지배층에 편입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고려전기 이래의 주요 가문이 지배층의 중심을 형성하는 추세가 유지되었다.

원 간섭기를 거치며 나타난 중요한 사상적 변화는 성리학의 도입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하게 된 일부 지배층은 불교와 가까운 구 귀족을 배척하면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장과 협력해 조선을 건국했다.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는 고려후기에 등장한 이런 세력을 ‘사대부’라는 용어로 지칭했다.

조선전기에 사대부는 주로 문·무 관원을 가리켰는데 4품 이상을 대부, 5품 이하를 사라고 불렀다. 이런 흐름에 변화를 가져온 동력은 역시 성리학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이 확산되어 중심적 사조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사대부의 개념은 중국 송대와 비슷한 변화를 나타냈다. 즉, 새로운 농법을 발전시켜 경제력을 확보한 독서인이나 처사가 사대부의 범주에 포함되어 간 것이다. 그들은 지방에 광범하게 분포하면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유향소(留鄕所)·경재소(京在所)·향약(鄕約)·향청(鄕廳)·계(稧)·향안(鄕案)·향음주례(鄕飮酒禮)·향사례(鄕射禮)·서원·서당 등 다양한 기구와 제도를 발전시키면서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광철, 『고려후기 세족층 연구』, 동아대학교출판부, 1991.
  •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조선 왕조의 기원 ; 고려-조선 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실증적으로 탐구한 역작』, 너머북스, 2013.
  • 이성무, 「여말선초의 사대부」, 『조선 양반 사회 연구』, 일조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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