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안(鄕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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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향촌 사회 지배층의 자치 기구인 유향소를 운영한 사족의 명부.

개설

향안(鄕案)은 조선시대 향촌 사회 지배층인 재지사족(在地士族) 중 입록이 허락된 향원(鄕員)의 명부이다. 이 향안에 수록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유향소(留鄕所), 즉 향청이 운영되었다. 향안록(鄕案錄), 향적(鄕籍), 좌목(座目), 유향좌목(留鄕座目), 품관좌목(品官座目), 향언록(鄕彦錄), 삼참록(三參錄), 향록(鄕錄), 향좌목(鄕座目), 향중좌목(鄕中座目)이라고도 부른다. 향안은 ‘향풍(鄕風)을 규찰하고 유품(流品)을 견별(甄別)하는’ 고려시대 사심관(事審官)의 기능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경재소(京在所)·유향소(留鄕所) 체제에서 유향소 품관의 명단을 기재한 「유향좌목(留鄕座目)」에서 유래되었다.

향안은 17세기에 들어와 거의 전국적으로 작성되었다. 가장 먼저 작성된 향안은 함흥 지방의 「함흥신구향헌목(咸興新舊鄕憲目)」에 보이는 1469년의 「성화5년기축향좌목(成化五年己丑鄕座目)」이다. 『이재만록(頤齋漫錄)』에 조선초기 하륜(河崙)이 진주 향안에 오르지 못하자 태종이 강권을 발동하여 입록시켰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향안은 이전에도 작성되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숙주(申叔舟)가 광주(光州)의 향적(鄕籍)에 입록되었다는 단편적인 기사도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신숙주가 광주의 향안에 들어 있어서 광주에 있는 희경루(喜慶樓)의 기문을 짓게 하였다는 것인데, 신숙주가 광주를 본향으로 갖고 있었던가, 아니면 경재소의 겸임 방식에 따라서 광주가 신숙주의 8향 또는 6향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조사된 향안 중 현존하는 최고의 필사본은 1530년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작성된 「가정경인좌목(嘉靖庚寅座目)」이다. 「안동향손사적통록(安東鄕孫事蹟通錄)」에도 15명의 향원(鄕員)이 인용되어 있다. 이 자료는 조선전기 안동 지방의 사족 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편찬/발간 경위

"홍문록은 쉬워도 향안은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향안 입록에는 엄격한 기준이 따랐다. 즉 향촌 사회에서 세족(世族)을 변별하는 것이 향안의 주된 기능이기도 했기 때문에 본인의 학덕이나 관작에 관계없이 부·모·처 3향(三鄕)이 해당 지역의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가의 여부가 향안 입록의 1차 기준이었다. 향안을 3참록(三參錄)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향안에 입록되기 위해서는 직서(直書)와 권점(圈點)을 통하여 기존 구성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부향·모향·처향 중 셋이 모두 그 고을의 향안에 입록되어 있으면 3향(三鄕), 그 중 둘이 입록되어 있으면 2향(二鄕)이라 하여 자기 지역 출신 여부가 향안 입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등 지역적인 폐쇄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서얼(庶孼)이나 하천민(下賤民)을 규제하는 등 신분적인 폐쇄성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였다.

태종조의 공신인 하륜이 진주의 향안에 입록되지 못하자 태종이 강권을 발동하여 비로소 입록시켰다는 사실이나, 『성소복부고(醒所覆瓿藁)』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한 면앙정(俛仰亭)송순(宋純)이 담양의 향안에 입록되는 데 많은 곤욕을 치른 사실을 볼 수 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예천에서 약포(藥圃)정탁(鄭琢)이 입록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나와 있다. 이처럼 향안 입록은 중앙의 관직과 관계없이 향촌의 자율적인 규범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각 지역에서의 향안 입록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향안 조직의 규정인 향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경상북도 봉화의 경우 16세기 후반에 3향은 직서하고 그 미만인 경우에는 권점을 하여 입록하도록 하였다. 1600년대 작성된 경상남도 창녕 향안의 「입의(立議)」에서도 매년 정조(正朝)에 3불(三不) 이상의 품관과 별천(別薦)된 1불(一不) 이상의 내외향참자제(內外鄕參子弟)를 향안에 입록하도록 하였다. 창녕의 경우 향임과 품관과 향리를 구분하면서 품관 중에서 향임을 배출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곧 품관안이 향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24년에 작성된 경상남도 밀양의 「향헌절목」에서도 3참의 자지(子枝)만을 허록하고, 3참의 자지도 다시 심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상은 경상도 지역의 사례인데, 전라도의 담양이나 남원·장수, 충청도의 공주·연기 등의 경우에도 대략 비슷한 기준의 향안 입록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隨錄)』 권9 「교선지제향약사목(敎選之制鄕約事目)」에서 "향안에 양반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 비록 학행이 있거나 관직을 역임한 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면서, 대부분의 사류는 모두 입록하고 나이순으로 좌차를 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향안은 지방에서 세족을 변별하고 일향의 기강을 바로잡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선후기로 갈수록 재지사족이 관직을 가지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향안이 세족을 구별해 주는 명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향안이 가지는 의미는 지역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특히 일찍이 사족이 없던 평안도나 함경도 등 양계 지역에서는 품관, 즉 향족이 사족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삼수(三水)와 같은 변방 지역에서는 17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향안이 새로 마련되고 있었다.

지역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향안에 입록될 수 있는 기준은 학덕이나 관작보다는 3향의 여부에 두어졌다. 3향이 향안 입록의 1차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은 향안의 신분적 폐쇄성과 지역적 폐쇄성을 의미한다. 즉 신분적으로 외조 또는 외삼촌을 포함한 부·모, 처부를 포함한 처가가 본향의 향안에 입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부·모·처 3향에 서얼이나 향리 또는 범법자의 피가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안의 지역적·신분적 폐쇄성을 의미한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인근 읍의 향안을 인정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 읍의 향안에 입록이 되어 있어야 3향으로 인정하였다.

구성/내용

향안은 거의 전국에서 작성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향안은 대개 17세기를 중심으로 작성, 수정되었다는 시기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17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향안의 체제가 정비되어 작성되기 시작하고, 18세기 초에는 당색간의 갈등이나 신분상의 갈등으로 야기되는, 향안을 둘러싼 향전 등으로 대개의 경우 파치(罷置)되었음을 말해 준다. 파치란 파기되기는 하였지만 버리지 않고 두는 것, 즉 더 이상 새로운 향안은 만들지 않지만 기존의 향안은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파치되어 더 이상 작성될 수 없는 경우에도 향안은 계속 향청에 보존되었다. 또한 17세기와 같은 향안 중심의 향촌 사회 질서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때도 향안이 기계적으로 작성된 지역이 있었는데, 이는 향안이 여전히 각 향촌 사회에서 그 지역의 사족임을 증명하는 준거(準據)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통적인 의미의 사족이 없던 평안도·함경도와 연해읍(沿海邑) 또는 소읍(小邑)의 경우는 삼남 지방의 대읍(大邑)들과 달리 향안 작성이 17세기 중반이나 18세기로 조금 늦었다. 그리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18세기 말이나 19세기까지도 향안이 계속적으로 개수되고, 그 기능이 변질된 형태로 유지되기도 하였다. 또한 경기도의 경우 향안 작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 없는 데 반해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경우 향안 작성이 활발했는데, 이는 경기나 충청 지역의 토착 사족이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위세에 억눌려 자율성이 유지될 수 없었던 데 기인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향안 구성원인 향원들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鄕會)를 통하여 향중의 공론을 결정하였다. 일정 지역의 사족을 대표하는 향원들은 왕권 대행자인 수령의 자문 역할을 하면서, 수령을 보좌하는 좌수·별감 등의 자리에 향임층을 추천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일정 부분 지역적 자치권을 확보하였다.

현존하는 향안은 대개 필사본의 형태로 향교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전라남도구례의 「향안이안기(鄕案移安記)」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1895년 근대적인 지방제도 개혁 때 향청이 폐지되면서 향청 소관 문서들이 향교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향안이 몇몇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활판본으로 간행되어 유포되었는데, 근래의 연구 성과들은 대개 이렇게 간행된 향안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몇몇 지역에는 향안을 중심으로 한 향회 운영과 관련한 고문서들도 남아 있어 향안 중심의 향촌 사회 운영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향안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의 「가정경인좌목(嘉靖庚寅座目)」, 상주의 「향언록(鄕彦錄)」, 창녕의 「창녕향안증주(昌寧鄕案增註)」, 밀양의 「향안(鄕案)」 및 「향사당좌목(鄕射堂座目)」과 전라남도 담양의 「구향적(舊鄕籍)」과 「향적(鄕籍)」, 전라북도 남원의 「용성향안(龍城鄕案)」,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의 「향안」, 충청남도 공주의 「향안」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이르러 서얼들의 향안 입록이 허용됨으로써 향안이 가지는 세족의 변별성이 상실되자 파치되는 향안이 늘어났다. 당시 서얼들은 통청운동의 하나로 향안·유안·청금안 등에 입록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서얼들의 집단 상소에 어쩔 수 없이 지역에 따라 서얼의 향안 입록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유안이나 청금안 입록의 경우 학문을 하느냐의 여부가 1차적 기준이기 때문에 서얼들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향안 입록의 경우 각 지역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졌던 까닭에 영조로서도 향촌의 자치성을 인정하여 지역의 자율적 규제에 맡겨 두었다. 1722년 서얼 출신 유생인 전성천(全性天) 등이 향안 소통을 청원하자, 영조는 처음에는 허락했다가 영남 향안의 방한이 매우 심하다는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를 듣고 "국가의 일과 지역의 일은 별개이다.[朝廷自朝廷鄕黨自鄕黨]"라고 하며 자율에 맡길 것을 결정하였다.

서얼들의 이러한 통청 노력은 정조대에 달성되었다. 1778년에 서얼들이 이미 허록되었던 청금안과 향안에서 자신들이 박탈된 데 대하여 다시 입록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조 2년 8월 무오조에 보면, 영조가 자율에 맡기는 조치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 정조는 향안과 유안 등에 서얼과 사족을 간격을 두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승정원일기』 정조 6년 6월 을해조에 의하면, 정조는 1782년에 전교를 내려서 서얼도 수임을 제외한 유임과 향임에 쓰도록 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안동 지역에서도 향안에 ‘신통(新通)’이라 하여 서얼이 함께 입록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안동 지역에서는 더 이상 향안 작성을 하지 않았다. 즉 향안을 파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서얼들이 향안에 입록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계층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향안을 매개로 한 사족의 향촌 지배 질서가 붕괴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서얼의 입록 허용과 거의 동시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향안이 파치되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향안은 임진왜란 후에 작성된 것으로, 본격적으로 향안이 작성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또한 이러한 자료들도 대부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친 것들이기 때문에 자료를 이용할 때에는 많은 주의가 요구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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