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우정(尹遇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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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7년(광해군 9)∼1664년(현종 5) = 48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지냈고, 증직은 이조 참판이다. 자는 사형(士衡)이다. 본관은 칠원(漆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윤유길(尹有吉)이고,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선교랑(宣敎郞) 임선(任瑄)의 딸이다. 형조 정랑(正郞)윤자신(尹自莘)의 손자이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윤지화(尹志和)의 조부다.

인조 ~ 효종 시대 활동

1642년(인조 20) 사마시(司馬試)의 진사(進仕)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644년(인조 22)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거상(居喪)하였다. 다시 성균관에서 열심히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서인 계통의 유생들을 이끌고 그 소두(疏頭) 곧 상소자의 우두머리가 되어, 서인의 태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인조에게 상소하였다. 동인의 태두 이황(李滉)은 이미 문묘에 배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인은 성균관 유생들을 동원하여 동인과 당파 싸움을 벌였는데, 윤우정은 유생 가운데 비교적 나이가 많았으므로 그 상소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윤우정은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으나 여러 번 실패하였다. 효종 때 윤우정은 하는 수 없이 서인의 추천을 받아 음직(蔭職)에 진출하였다. 1653년(효종 4)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가 되었으나, 그해 7월 부친상을 당하여 집에서 3년 상복을 입었다. 1657년(효종 8) 전설사(典設司)별검(別檢)이 되었다가, 사재서(司宰署) 직장(直長)으로 옮겼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6 「장령 윤공우정 묘갈명(掌令尹公遇丁墓碣銘)」] 당시 효종은 북벌 정책(北伐政策)을 추진하여 서인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중용하였는데, 윤우정은 그 실무를 맡아서 활동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0년(현종 1) 윤우정은 다시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공조 좌랑(佐郞)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겨울에 전라도함열 현감(咸悅縣監)이 되었으나, 과장(科場)의 소란 때문에 파직되었다. 이때 식년시를 앞두고 전라도 함열에서도 향시(鄕試) 과장(科場)을 설치되었는데 시험관인 시관(試官)이 체통을 잃었다고 하여 시험에 응시한 부시자(赴試者)들이 들고 일어나서 소동을 벌였다. 현감윤우정이 금란관(禁亂官)으로서 이것을 제때에 수습하지 못하였다는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한수재집』 권26 「장령 윤공우정 묘갈명」] 1662년(현종 3) 다시 공조 좌랑이 되었다가,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 그해 10월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6세였다. 곧바로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1663년(현종 4)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때 홍문관 수찬(修撰)홍우원(洪宇遠)은 유배된 윤선도(尹善道)의 석방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59년 5월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繼妃) 조대비(趙大妃)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났다.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 상복(朞年喪服)을 주장하였으나, 남인의 허목(許穆)과 윤선도 등은 3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기년 상복이 채택되어, 남인 윤선도 등은 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몇 년이 지난 후에 홍우원이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한 것이다. 홍문관과 사간원 · 사헌부의 삼사(三司)에서 여론을 주도하는데, 당시에는 홍문관과 양사(兩司)가 서로 대립하였다. 사간원 정언윤우정은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남인 홍우원을 관리들의 명단인 사판(仕版)에서 제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사에서 분쟁을 일으켰다고 하여, 윤우정은 병조 좌랑으로 좌천되었다가[『백호전서(白湖全書)』부록2 「윤휴 행장(尹鑴行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고, 12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64년(현종 5)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서인의 강경파로서 대간(臺諫)언관(言官)을 맡아서 활동하였는데, 그 해 4월 갑자기 기이한 중병에 걸려서 관직을 사임하였다. 6월 건강을 위하여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로 나갔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2월 17일 서울 본가(本家)의 정침(正寢)에서 운명하니, 향년이 48세였다.[『한수재집』 권26 「장령 윤공우정 묘갈명」] 과거에 급제하여 불과 2년 동안 대간에서 활동하다가 갑자기 돌아가니, 영의정정태화(鄭太和)는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고 한탄하였다.

<제 1차 예송 논쟁>과 윤우정

1642년(인조 20) 윤우정은 사마시에 합격한 다음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서인 계통의 유생들을 이끌고 그 소두가 되어 율곡(栗谷)이이와 우계(牛溪)성혼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인조에게 상소하였다. 그때 성균관 유생 윤우정과 장세명(張世鳴)은 이 논의를 주도하면서, 여기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유생들을 배척하여 정거(停擧)시키거나 혹은 삭적(削籍)시켰다. 정거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삭적은 유정을 삭제하는 것이다. [『백호전서』부록2 「윤휴 행장」] 이때부터 윤우정은 서인 측의 강경파가 되어서, 동인 측과 극렬한 논쟁을 벌였다.

1662년(현종 3) 나이 46세 때 늦게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1663년(현종 4)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1664년(현종 5) 죽을 때까지 2년 동안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 장령 등을 역임하면서 대간으로 주로 활동하였다. 윤우정은 논쟁을 주도하고 강직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서인 측의 언관(言官)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당시 서인 측과 남인 측은 <예송 논쟁>에서 자기파의 젊은 이론가를 언관에 임명하여, 복제(服制)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繼妃)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기간(服制期間)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정권의 사활을 건 이념 투쟁을 벌였다.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서인 노론(老論)으로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의하여 기년 상복을 주장하였으나, 남인의 허목과 윤선도 등은 공자(孔子)의 ‘육경(六經)’에 근거하여 3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이 문제의 발단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가 그 장손을 <강빈 옥사(姜嬪獄事)>에 연루시켜 제주도에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그 대신에 차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준 데 있었다. 봉림대군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는데,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니고, 둘째아들이므로, 그 계모(繼母)인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기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이 되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서 3년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이 팽팽히 대립하자, 영의정정태화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장자이거나 차자이거나 어머니의 상복은 1년으로 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들어서 조대비의 상복을 서인의 기년으로 결정하였다. 이때의 <예송 논쟁>에서는 『경국대전』 곧 국제(國制)의 기년복 규정 곧 <국제 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남인 윤휴(尹鑴) · 허목 · 윤선도(尹善道) 등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여 다시 논쟁이 일어났다. 남인 허목은 “비록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차장자설(次長子說)’을 주장하였다. 윤선도는 한 걸음 더욱 나아가서 “왕이 되는 사람의 예는 사대부나 서민과는 다르다[王者禮不同士庶]”고 하여, 적장자(嫡長子) 상속을 원칙으로 삼는 종법(宗法)도 왕의 경우에는 변칙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서인의 송시열은 왕가의 상복도 일반 사대부와 서민의 상복과 똑같이 종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으나, 윤선도는 왕권(王權)은 신성하므로 “서출의 왕도 적장자가 될 수 있다.[聖庶奪嫡]”고까지 표현하였다.

서인 측은 효종처럼 왕위 계승이 종법의 적장자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왕가의 의례는 종법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왕권 부정의 관념이 강하였다. 서인 측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臣權)을 강화하려는 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조씨(趙氏)는 종법에 따라 당연히 1년 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남인 측의 견해는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이 되었으므로, 장자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왕가의 의례는 사대부나 서민의 의례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입장이었다. 윤선도는 송시열의 기년상에 대하여 왕권을 부정하고 신권을 강화하려는 속셈이 있다고 주장하여 송시열 등을 역모로 몰아서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는 효종의 구신(舊臣) 송시열 · 송준길 등을 몰아내는 것보다 아들 현종의 정권이 빨리 안정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도리어 윤선도를 북변(北邊)으로 유배시켰다. 이것이 <제 1차 예송 논쟁>인데, 여기서 서인이 승리하고 남인이 패배하였다. 현종 시대 왕권은 약하고 서인 송시열 등의 신권이 강하였기 때문에, 1674년 8월 현종이 승하하자 조문사(弔問使)로 조선에 왔던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의 접반사오시복(吳始復)에게, 현종 시대가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하였다[王弱臣强]”라고 비판하여 큰 문제를 일으켰던 적도 있다.

1663년(현종 4) 윤우정이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을 때, 홍문관 수찬홍우원은 유배된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면서 남인 측의 3년상이 옳다고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홍문관은 사간원 · 사헌부의 양사(兩司)와 함께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임금에게 건의하기 때문에 삼사(三司)라고 하였다. 보통 중요한 정책을 입안할 때 홍문관과 양사의 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의론을 조정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수찬홍우원이 혼자 상소를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사간원 정언윤우정은 앞장서서 남인 홍우원을 사판에서 제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홍우원은 파직되었으나, 1674년(현종 15)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자, 복직되어 이조 판서가 되었다.[『명재유고(明齋遺稿)』, 『백호전서』]

주자학을 신봉하던 노론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스승 김장생(金長生)의 예학(禮學)을 계승하여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종법(宗法)을 중시하였으나, 유교의 ‘육경(六經)’을 중시하던 남인의 허목과 윤선도는 주자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종법을 변칙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뒤에 남인 계통에서 양명학(陽明學)과 서학(西學)을 수용하려고 하자, 서인은 주자학을 비판하는 자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서 추방하였다.

<제 1차 예송 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였으나, <제 2차 예송 논쟁>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현종 시대의 <예송 논쟁>으로 말미암아, 숙종 시대에는 왕권과 신권의 직접 대결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당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예송 논쟁>은 호서 · 호남 지방의 대지주 출신인 노론과 근기(近畿)의 소농(小農) 출신의 남인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붕당 정치(朋黨政治)를 벌이면서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성품과 일화

윤우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그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한수재집』 권26 「장령 윤공우정 묘갈명」] 그의 모습은 온화하고 단아하였으나, 성품은 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몸가짐은 소탈하고 과묵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다. 8세 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활쏘기를 하였는데, 어른 한 사람이 어린 윤우정에게 시험삼아 글귀를 한번 지어보라고 하였다. 윤우정은 즉석에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시를 짓기를, “대낮에 달무리가 지고, 밤도 아닌데 별이 달린다.[當晝月暈 不夜星馳]”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듣고 깜짝 놀라서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점차 자라면서, 문장 가운데 사부(辭賦)를 잘 지어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니, 당시에 문인(文人)과 재사(才士)들이 모두 한번씩 찾아와서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또 윤우정은 우애가 돈독하였다. 서출 형제자매를 대할 때에 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고 아끼고 뒤를 보살펴 주었다. 그는 아들들과 조카들을 정의롭게 살도록 가르쳤으며, 집안사람 중에 재주가 있는 아이들을 보면 집에 데려다가 기르면서 가르쳤다. 이리하여 칠원 윤씨 가문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이 나와서 명문(名門) 거족(巨族)이 되었다. 그는 은혜롭게 사람들을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에 그가 쉰 살도 채우지 못하고 별세하자, 마치 가까운 친척이 죽은 것처럼 모두 애통해 하였다.

집안의 4촌형이 전염병에 걸려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무도 전염될까봐 두려워하여 문병 가지 않았다. 그는 의원에게서 “환자가 땀을 흠뻑 흘리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4촌형을 밤새도록 간호하면서 환자가 땀을 많이 흘리도록 보살폈다. 그는 피곤하여 환자와 함께 같은 이불을 덮고 자다가 아침에 깨어보니, 4촌형은 이미 운명하고 말았다. 염습(殮襲)할 때 날씨가 몹시 추웠으나, 그는 자기가 입었던 옷을 벗어서 4촌형에게 입혔다. 마침 그때 그의 친구도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는데, 아무도 문상하지 않았으나, 그는 상가(喪家)를 찾아가서 통곡하고 염습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뒤에도 그는 친구의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들을 끝까지 보살펴주었다. 그는 평소 곤궁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선뜻 주머니의 돈을 몽땅 털어서 구제해 주었다.

그가 젊었을 때 어느 날 밤중에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장차 역모(逆謀)의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니, 그 뒤에 반드시 이를 축하하는 경과(慶科)의 별시(別試)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어찌 제술(製述) 공부는 하지 않고 책을 읽기만 하는가?” 하였다. 윤우정이 준엄히 그 친구를 꾸짖기를, “어찌 그리도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가?” 하고, 그대로 책을 읽고 중단하지 않았다. 그 뒤에 고변(告變)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또한 거기에 연루되었다. 그 친구는 참혹한 형벌을 받으면서 심문을 받을 때 그가 일찍이 경과(慶科) 별시(別試)가 있을 것이라고 서로 말을 나눈 사람들을 모조리 옥사에 끌어들였는데, 그는 윤우정과 주고받은 말까지 고해바쳤다. 유사(有司)에서 윤우정을 체포하여 문초할 것을 청하자, 효종이 특별히 분부하기를, “그는 체포하지 말라. 그는 허망하다고 꾸짖었는데, 그에게 무슨 말을 따져서 물어볼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 일화에서 윤우정이 평소에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한 것을 알 수 있다.[『한수재집』 권26 「장령 윤공우정 묘갈명」]

1663년(현종4) 9월 사헌부 지평윤우정이 소의 전염병으로 도살을 줄일 것을 청하기를, “금년에 우역(牛疫)이 대단하여 살아남은 소가 얼마 안 되는데, 도살은 종전과 똑같이 하고 있으므로, 장차 소의 종자가 끊길 염려가 있습니다. 지난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 우역 끝에 소를 도살한 자는 살인을 한 죄와 똑같이 취급하도록 법령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절대 금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현종이 그대로 따라서 소의 도살을 금지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4년 9월 15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4년 9월 15일] 이리하여 소고기를 살 수 없게 되자, 사대부 집안에서 윤우정을 비난하였다. 그해 12월 현종이 윤우정을 인견(引見)할 때, 조정의 여러 대신들이 비난하기를, “가축을 사람에 비교하다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고 하고 “윤우정이 일찍이 가축의 도살을 사람의 살인죄에 적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였으므로, 윤우정은 인피(引避)하였다. 그 뒤에 사헌부에서 윤우정을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여 현종이 출사를 허락하였으나, 윤우정은 소명(召命)을 받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현종실록』현종 4년 12월 10일, 『현종개수실록』현종 4년 12월 10일]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면천군(沔川郡) 북쪽 주절동(駐節洞)의 언덕에 있는데,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6 「장령 윤공우정 묘갈명(掌令尹公遇丁墓碣銘)」] 4남이 출세하여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호조 참판이후산(李後山)의 딸인데,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윤치적(尹致績)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를 지냈고, 차남 윤서적(尹敍績)은 윤세적(尹世績)이라고도 하는데, 생원시에 장원하여 호조 정랑을 지냈다. 4남 윤가적(尹嘉績)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으며, 딸은 판관(判官)박태여(朴泰輿)의 처가 되었는데, 박태여는 좌의정박세채(朴世采)의 차남이다. 그러므로 윤우정의 후손들은 소론의 거두 박세채 영향을 받아서 서인의 소론파가 되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문과방목(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한수재집(寒水齋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남계집(南溪集)』
  • 『북헌집(北軒集)』
  • 『죽서집(竹西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