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복(愼希復)
총론
[1493년(성종 24)∼1565년(명종 20) = 73세].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문신. 명종의 잠저(潛邸) 때 사부(師傅)다. 도승지(都承旨)와 의정부(議政府)참찬(參贊)을 지냈고,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자는 양숙(養叔)이고, 호는 매천(梅川)인데, 자호는 관천자(觀泉子) · 관천(觀川)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인데,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평산(平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부여 현감(夫餘縣監)신돈례(申敦禮)이고, 어머니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유팽수(柳彭壽)의 딸이다. 황해도 관찰사신전(愼詮)의 증손자이고, 영의정신승선(愼承善)의 종손자(宗孫子)다. 그 장인 참봉(參奉)성수근(成守瑾)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백부(伯父)였으므로, 신희복은 성혼의 4촌 매형(妹兄)이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고, 성혼이 아버지인 성수침(成守琛)과 김안국(金安國) · 조욱(趙昱)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방목』]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와 그 문하생 중에서 그와 친한 친구들이 화(禍)를 당하자, 그는 몸을 피해서 고향 황해도 평산으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었는데, 아무도 그가 어디에 가서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 그가 일본 왜구에게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도망하여 유구국(琉球國)을 거쳐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선 후기 이원명(李源命)의『동야휘집(東野彙輯)』에 「신희복과 유구국 공주」라는 설화를 실어서 신희복이 더욱 유명해졌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6년만에 신희복은 서울에 나타나서 사마시의 생원과에 합격하였으나 문과(文科)에는 실패한 것 같다. 그 뒤에 여러 번 대과(大科)에 낙방(落榜)하자, 부모와 처자식을 봉양하기 위하여 음직(蔭職)으로 6품 이하의 하급 관직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부친상을 당하여, 신희복은 평산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신희복은 풍수지리를 배워서 명당(明堂)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 산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명당자리를 찾아서 헤매다가, 마침내 길지(吉地)를 찾아내어, 아버지의 무덤을 명당자리로 옮겼다. 1544년(중종 39) 상복을 벗자마자, 처갓집 친척 이조 판서성세창(成世昌)이 중종의 제 2왕자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 이환(李峘)의 사부(師傅)로서 그를 천거하여, 뜻하지도 않게 신희복은 경원대군의 사부가 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그때 그는 대군의 사부가 되어서 평생 부귀를 누리는 것이 아버지를 명당자리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풍수학(風水學)에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굳게 믿게 되었다. 신희복은 대군의 사부로서 명종이 11~12세 때 약 2년 정도 가르쳤는데, 그때가 바로 대윤(大尹)윤임(尹任)과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이 인종과 명종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전개할 때였다. 그는 경원대군을 성실하게 가르치면서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라고 타이르고 거듭 경계하였으므로, 경원대군이 그의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그를 따르고 좋아하였다.
1544년 11월 중종이 57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인종이 3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그때 경원대군은 나이가 겨우 11세였다. 경원대군은 중종의 적자(嫡子)에 불과하였을 뿐이고,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므로, 경원대군과 그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몹시 불안해하였다. 신희복은 경원대군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면서 글을 가르치다가, 1545년(인종 1)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평산으로 돌아갔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 7월 병약한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경원대군이환이 왕위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명종이다. 그때 명종의 나이가 겨우 12세 밖에 안 되었으므로, 그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1546년(명종 1) 어린 명종이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참찬관유진동(柳辰仝)이 아뢰기를, “전하가 잠저 시절의 사부 신희복이 지금 평산 땅에 있는데, 상중(喪中)에 생활이 곤궁하여 제사도 받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니, 명종이 깜짝 놀라서 황해도 감사로 하여금 수시로 상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도록 명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년 4월 12일) 이리하여 신희복은 상중에 있을 때 명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1548년(명종 3) 모친상이 끝나자마자, 신희복은 바로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이때 명종이 신희복을 대궐로 불러서 인견(引見)하였는데, 사관(史官)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두 사람이 마음 놓고 환담(歡談)하였다가, 대신들의 질책을 받았다. 그러나 명종은 신희복을 군기시(軍器寺) 판관(判官)으로 특별히 승진시켰다.(『명종실록』 명종 3년 5월 17일·" 『명종실록』 명종 3년 5월 18일) 1550년(명종 5) 신희복은 호조 정랑에 임명되어 내승(內乘)을 겸임하였으며,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어 외직(外職)으로 나갔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參贊愼公希復神道碑銘)」]
1553년(명종 8) 명종이 20세가 되자,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親政)하게 되었다. 명종은 스승 신희복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다시 향시(鄕試)를 보도록 독려하고 만약 전시(殿試)에 응시한다면 합격시켜 줄 생각이었는데, 금산 군수신희복은 향시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명종이 선농단(先農壇)에 나가서, 임금이 몸소 밭을 가는 친경(親耕)을 하는 날 특별히 이를 축하하는 과거인 경과(慶科)를 보이고 신희복에게 응시하게 하였다. 그때 신희복은 별시(別試) 합격자 33명 명단[榜目]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명종이 합격자를 40명으로 늘이라고 명하여, 마침내 신희복이 별시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1세였다.[『방목』] 명종은 과거에 합격한 신희복에게 마침내 청요직을 임명하였는데, 금산군수신희복을 조정으로 불러서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에 임명하였다. 1554년(명종 9)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서 장령(掌令) · 집의(執義)로 차례로 승진하고, 홍문관 응교(應敎)를 맡았다.(『명종실록』 명종 9년 2월 14일 · 『명종실록』 명종 9년 4월 13일 · 『명종실록』 명종 9년 8월 5일 ·『명종실록』 명종 9년 9월 26일) 1555년(명종 10) 명종의 특명으로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는데(『명종실록』 명종 10년 3월 22일) 신희복이 사은(謝恩)할 때 명종이 자신이 착용하던 옥관자(玉貫子)를 풀어서 하사하였다. [『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얼마 뒤에 명종은 신희복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시키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여,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시켜서 최측근에 두고 정치를 자문 받았다.(『명종실록』 명종 10년 5월 16일 · 『명종실록』 명종 10년 7월 14일 ·『명종실록』 명종 10년 8월 16일) 그때 명종은 어머니 문전왕후와 외삼촌 윤원형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부 신희복을 중용하였으나, 도승지신희복은 정치적 감각이 무디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욕망이 없어서 자기 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하였다. 1556년(명종 11)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에서 반대하기를, “도승지는 바로 승정원의 우두머리로서 왕명을 출납하는 등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희복은 나이가 적지 않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이제 겨우 4년입니다. 지난번 좌승지가 되었을 때도 이미 너무 빨리 승진되었다는 비난과 사체(事體)를 잘 모른다는 논란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도승지를 맡았으니, 여러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승정원의 일이 반드시 이로부터 해이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명망이 있고 능력을 갖춘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임명하소서.” 하니, 명종이 여러 사람들이 불평 불만한다는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도승지를 교체하도록 명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1년 5월 8일) 명종은 도승지신희복을 해임하고, 그 뒤에 그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심씨(沈氏)의 외삼촌 이량(李樑)을 발탁하여, 그 세력을 키워서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1557년(명종 12) 신희복은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지(參知: 참의)가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2년 2월 10일 · 『명종실록』 명종 12년 10월 24일) 1558년(명종 13)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수령들에게 물품을 요구하고 청탁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높았으며, 또 가뭄과 홍수가 잇달아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궁핍해졌다. 1559(명종 14)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이 황해도 평산의 자모산성(恣母山城)에 웅거하여 평산과 봉산(鳳山)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관가를 습격하고 창고를 약탈하였다. 그때 관찰사신희복은 병마사(兵馬使)를 보내어 임꺽정 일당을 소탕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관망하다가 임꺽정의 세력을 크게 키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임꺽정의 의적에 가담한 농민들은 모두 그가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황해도의 흉악한 대도(大盜)의 무리는 그 숫자가 점차 불어나서 그 피해가 더욱 심합니다. 황해도 관찰사신희복은 그 부모의 무덤과 전장(田庄)이 평산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보복을 염려하여 절제사(節制使)에게 명령하여 도둑의 체포를 독촉하지 않고 있으니, 그를 속히 체직하소서,” 하니, 명종이 관찰사를 교체하게 하였다. 그때 사신(史臣)은 논평하기를, “신희복이 감사의 중임을 맡고서도 도적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들을 체포하는 데에 나서지 않았으니, 그 용렬하고 나약함이 너무 심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감사를 교체한다면, 조정이 도적에게 허약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희복 자신도 교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4년 3월 25일) 임꺽정은 신희복이 교체된 다음에 3년 동안 황해도를 중심으로 강원도 · 평안도까지 세력을 넓히고, 서울과 평양에도 출몰하며, 정부를 괴롭혔으나, 3년 만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얼마 안 되어 신희복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참판(參判)으로 옮겼다.(『명종실록』 명종 14년 5월 3일 · 『명종실록』 명종 14년 6월 15일) 권상하(權尙夏)의 신도비명을 보면, “신희복이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검약(儉約)하고 너그럽고 공평(公平)하게 다스려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에 병조 참판으로 승진하자, 명종이 또 금패 품대(金貝品帶)를 하사하였다.” 하였으나,[『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그 내용이 실제와는 다르고, 관직도 병조 참판이 아니라, 예조 참판이었다.
1560년(명종 15) 경기도 관찰사 나갔다가, 1563년(명종 18)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명종 15년 9월 18일, 『명종실록』 명종 18년 1월 27일) 그때 명종이 전교하기를, “신희복은 잠저 때 사부로서 나이도 이미 늙었으니, 정2품에 올릴 수 있으므로 특별히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제수하겠다.” 하고, 정2품의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였는데, 그때 신희복의 나이가 71세였다. 1563년(명종 18)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임명되어 개성으로 나갔다.(『명종실록』 명종 18년 12월 1일) 그러나 1565년(명종 20) 신희복은 늙어서 건강이 나쁘다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자, 명종이 허락하면서, “경의 소장을 보고 경이 질환으로 관직에 있기가 어려운 형편을 알았다. 체직하도록 명하니, 경은 그리 알라.”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0년 5월 20일) 그가 개성 유수로 있을 때 윤원형의 집에서 개성부 사람들과 소송을 제기하여 그 농토를 빼앗으려고, 개성 유후신희복에게 부탁하여 소송의 판결을 통하여 그들을 농장에서 추방하려고 꾀하였으나, 그는 끝내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명종이 신희복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임명하였으나, 신희복은 조정에 잘 나가지 아니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늙은 관리들을 대접하는 곳이다. 또 그는 스스로 나이가 70세가 넘었다고 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기[致仕]를 간청하니, 명종이 허락하였다. 신희복은 황해도 평산의 별장(別莊)으로 돌아갔는데, 명종이 슬퍼하여 손수 ‘매천한려(梅川閑閭)’ 하는 네 글자를 금(金)으로 크게 써서 주어 별장에 걸게 하였다. 매천한려는 매천의 조용한 집이란 뜻이다. 신희복이 황해도 평산으로 돌아간 지 1년도 안되어, 1566년(명종 21) 7월 24일 노병으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4세였다. 명종이 크게 슬퍼하여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법에 정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내려주었다. 명종도 바로 다음해에 35세의 나이로 돌아갔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명종의 사부 신희복
1541년(중종 36) 신희복이 부친상을 당하여, 평산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하였는데, 1544년(중종 39) 상복을 벗자마자, 처갓집 장인 성수근의 8촌 이조 판서성세창이 경원대군이환의 사부(師傅)로서 신희복과 성수침을 천거하여, 중종이 신희복을 대군의 사부로 낙점(落點)하였다.[『명종실록』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성수근과 성수침은 형제이고, 성수침의 아들이 우계성혼이다. 이식(李拭)이 쓴 「성세창 비명」[『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는, 둔재(遯齋)성세창이 중종 말년에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이 되어서 세자(世子)이호(李晧) 곧 인종을 가르쳤는데, 중종이 가끔 세자시강원에 들여서 그의 강론을 듣고 감탄하기를, “모름지기 세자의 보도(輔導)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고, 그에게 둘째 아들 경원대군의 사부를 추천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권상하(權尙夏)가 쓴 「신희복 신도비명」에 보면, “마침 경원대군의 사부를 선택할 때 이조 판서성현(成俔)이 선발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신희복을 첫째로 추천하고, 성수침을 둘째로 추천하였다.” 하였으나, 용재(容齋)성현은 이때 이미 작고한 지 40년이나 되었으므로, 신희복을 대군의 사부로 추천한 사람은 그 아들 이조 판서성세창이다.
신희복은 경원대군의 사부에 임명되자, 온갖 성의를 다하여 대군을 가르쳤는데, 경서(經書)를 가르칠 때에는 경의(經義)를 분명하고 자세하게 가르쳤으며, 대군의 언동(言動)과 기거(起居)에 대해서도 사안에 따라서 반드시 경계할 부분을 지적하였으므로, 명종이 잠저 때 마음을 기울여 그 가르침과 충언(忠言)을 받아들이고 신희복을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명종이 임금이 되고 나서 경연(經筵)에서 많은 석학(碩學)들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명종은 항상 신희복만을 자신의 유일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극진한 예우를 다하였다. 세종이 충녕대군(忠寧大君) 때의 사부 심은(深隱)이수(李隨)를 그의 유일한 스승으로 모셨던 것과 같다.
1546년(명종 1) 어린 명종이 경연에 나아갔는데, 참찬관유진동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임금들은 사부를 존중하였지만, 미천(微賤)한 시절의 사부는 더욱 차마 잊지 못하여 더욱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전하가 잠저 시절의 사부 신희복이 지금 평산 땅에 있는데, 그 생활이 곤궁하여 상중에 제사도 받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수시로 성상의 은혜를 베풀어서 그의 어려움을 도와주소서.” 하니, 명종이 대답하기를, “전 사부 신희복이 상중에 있으면서 형편이 곤궁하다는 말을 내가 이미 들었는데, 지금 경연 석상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그 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수시로 상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도록 하라.”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년 4월 12일) 또 1547년(명종 2) 명종이 전교하기를, “전 사부 신희복이 평산에서 상중에 있으니, 상가의 물품을 하사하도록 본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하였다.[『명종실록』명종 2년 4월 24일] 이리하여 신희복이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평산에 있을 때 명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수시로 상가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 받았다.
명종은 사부 신희복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그에게 청요직을 임명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1550년(명종 5) 신희복이 금산군수로 나가 있을 때 다시 공부하여 과거를 보도록 독려하여, 신희복이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53년(명종 8) 명종이 선농단에 나가서 친경하는 날 특별히 이를 축하하는 경과를 보이고 신희복을 불러올려서 경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희복은 별시 방목(榜目)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때 명종은 신희복을 합격시키기 위하여 과거 합격자를 33명에서 40명으로 늘이도록 면하여, 마침내 신희복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과거에서 임금이 그 정원을 마음대로 늘이는 법은 없었으므로, 많은 비난이 들끓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를 보면, “무오년의 별시에 신희복이 전시에 응시하였는데, 시관(試官)이 채점을 마치고 합격한 시권(試券)을 임금에게 바쳤는데, 신희복의 이름이 없었다. 명종의 특명으로 차중(次中) 이상의 사람을 모두 넣어서 40명을 급제시키니, 심희복이 비로소 방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노(老)·미(微)·약(弱)에 해당하는 자와 공사천(公私賤)을 모두 합격시켰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희복은 나이가 40세가 넘었으므로 노(老)이고, 유조순(柳祖詢)은 집안이 한미(寒微)하였으니 미(微)이고, 윤근수(尹根壽)는 나이가 22세의 약관이었으므로 약(弱)이고, 강문우(姜文佑)는 천민으로 갓 양민(良民)이 된 사람이니 천(賤)이다.” 하였다.[『기재잡기』 권3] 사관(史官)이 비판하기를, “신희복은 중국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사부 감릉(甘陵)과 같다.” 하였다. [『명종실록』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당시 ‘노 · 미 · 약 · 천’이라는 말과 감릉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따라다녔다.
1560년(명종 15)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는데, 그해 9월 명종이 서총대(瑞葱臺) 곧 창덕궁 후원에 있는 석대에서 조정의 중신(重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외관(外官)에 나가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초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명종이 시종에게 자리 하나를 특별히 만들도록 명하고 경기도 관찰사신희복을 초청하여 그 자리에 앉게 하여, 중신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명종은 언제나 사부 신희복을 특별하게 대우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5년 9월 18일)
명종은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신희복을 불러서 그 의견을 물었다. 또 신희복이 외방에 나가 있을 때에는 명종이 손수 쓴 편지인 수찰(手札)을 보내어 자문하였는데, 그 수찰이 수십 통이 넘었다. 그러므로 신희복은 임금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정성껏 충언(忠言)을 다하였고, 가끔 은미하게 풍자하여 임금을 깨우쳐 주었다. 1565년(명종 20) 신희복이 개성 유수로 송도(松都)에 나가 있을 때 명종이 보낸 어찰(御札)을 보면, “쇠를 녹이는 무더위에 언제나 경의 기거를 걱정하다가 갑자기 편지를 받으니, 기쁘고 안심이 된다. 유수가 내 마음을 너그럽고 편안하게 가지도록 위로하니, 나도 또한 매우 기쁘고 감격스럽다. 나의 생각은 새로운 경사(慶事)를 빨리 보아 국가를 튼튼하게 하려는 마음뿐이다. 여기에 무슨 잡념(雜念)이 있겠는가마는, 인생살이란 참으로 우습도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환절기에 모름지기 몸을 보중(保重)하기 바라면서, 감히 회답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1563년(명조 18) 명종의 외동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13세의 나이로 죽자, 문정대비와 명종이 너무나 비통해 하다가, 어머니 문정대비마저 돌아갔으므로, 그때 개성 유후신희복이 명종을 위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명종의 어찰은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이 서찰에서 “경사를 빨리 보고 싶다”라는 말은 당시 33세의 명종이 새로운 왕자를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고, “인생살이란 참으로 우습다”라는 말은 문정대비가 <기묘사화>를 일으켜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아들 명종과 손자 순회 세자에게 왕위를 이어받게 하였던 것인데, 이때 유일한 혈손 순회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명종마저 2년 뒤에 1567년(명종 22) 6월 젊은 나이로 혈손이 없이 돌아갔으므로, 중종의 젊은 후궁 안창빈(安昌嬪)이 낳은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 선조가 왕이 되었다. 이 글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맺어진 끈끈한 인정을 엿볼 수 있다. 명종은 옛날 서로의 은정(恩情)을 잊지 못하여 신희복이 서울에 올라오면, 가끔 한밤중에 신희복의 서울집으로 몰래 찾아가서 서로 회포(懷抱)를 푸는 일도 있었는데, 임금이 남몰래 오고가는 형적은 궁인들의 눈에 곧잘 띄었다.(『명종실록』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명종은 신희복을 높은 고관(高官)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1563년(명종 18) 명종은 경연 자리[筵席]에서 당시의 실권자 이조 판서이량(李樑)에게 묻기를, “신희복을 정승으로 삼으면, 인망(人望)에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조 판서이량이 반대하기를, “그 사람은 참으로 오래도록 쌓은 덕행과 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많으니, 무거운 임무를 맡아서 일을 해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으므로, 명종이 마침내 그만두었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1565년(명종 20) 신희복이 70세가 넘어서 건강이 나빠져서 개성 유후를 사임하고 들것에 실려서 서울로 돌아오자, 명종은 그를 한직인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 신희복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고, 평안도 감사의 자리가 비게 되자, 명종이 이조에 전교하기를, “평안도 감사의 3망(望)에 우참찬신희복도 아울러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나 신희복은 건강이 나빠져서 도저히 부임할 수가 없었다.(『명종실록』 명종 18년 10월 28일)
성품과 일화
신희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희복은 어려서부터 넓은 도량이 있었으므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장차 뜻이 깊은 큰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일찍이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청송(聽松)성수침 · 모재(慕齋)김안국 ·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 용문(龍門)조욱 등과 함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는데,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와 그 문인 가운데 그와 친한 친구들이 화(慘)를 당하자, 그는 몸을 피하여 황해도 평산으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었다. 한 동안 아무도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황해도 민담으로 전해져서, 혼례식 날 신희복이 왜구에게 사로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운남국(雲南國)을 거쳐 유구국에 이르러, 그 공주와 혼인하여 살았는데, 그가 고향의 부모와 처자식을 그리워하자, 유구공주가 도와주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원명(李源命)이 황해도 민담을 채록하여 『동야휘집(東野彙輯)』에 「신휘복과 유구국 공주」라는 설화를 실어서, 조선 후기에 신희복은 설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신희복의 설화는 사실이 아니고 와전(訛傳)된 것이다.
신희복은 문묵(文墨)에 뛰어났다. 글을 짓는 데에 식견이 높고 문리에 밝아서 모든 종류의 글을 두루 잘 지었는데, 절대로 남의 글을 모방하거나 억지로 글을 꾸며서 쓰지 않았다. 글씨도 그 필법(筆法)이 힘차고 아름다웠으므로, 청송성수침은 항상 그의 글이나 편지를 받으면, 버리지 않고 서첩(書帖)으로 잘 만들어서 집안의 보배처럼 간수하고 때때로 완상(琓賞)하였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신희복은 일찍이 도참설(圖讖說)에 관심을 가지고 풍수지리학을 연구하여 풍수설에 말하는 명당자리에다 아버지 산소를 모셨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산천(山川)과 인간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명승지(名勝地)에다 별장을 짓고 살았다.
1541년(중종 36) 부친상을 당하여, 평산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신희복은 풍수지리학을 배워서 명당자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에 아버지를 모신 산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좋은 길지(吉地)를 찾아서 헤맸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명당자리를 점지(點指)하여 주어서, 그 자리에다 아버지를 옮겨서 묻었다. 1544년(중종 39) 상복을 벗자마자, 이조 판서성세창이 그를 천거하여, 경원대군의 사부가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그가 사부가 되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아버지의 산소를 명당자리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명당자리라고 일컫는 ‘좌청룡 우백호’를 찾아서 조상의 묘소를 모시면 그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풍수 사상을 신봉하였는데, 명종이 갑자기 아버지 중종의 왕릉인 정릉(靖陵)을 천장(遷葬)하였을 때 사람들은 “정릉의 천장은 반드시 신희복이 명종에게 부추긴 면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신희복은 황해도 평산 서북쪽 9리에 있는 천신산(天神山) 아래 예성강(禮成江) 가에 수석(水石)의 좋은 경관을 이룬 명승지에다 별장을 지었는데, 그 별장은 호화로운 기와집이 아니라 몇 칸의 초가집[茅屋]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한가로운 시간이 나면, 이곳에다 정원을 꾸미고 자연을 즐겼다. 명종은 그의 별장을 가보고 싶어 하였으나, 가지 못하고 어필(御筆)로서 ‘정관천류 묵계도기(靜觀川流黙契道機)’란 여덟 글자를 편액(扁額)으로 쓰서 주었는데, 그 뜻은 “옥류천(玉流泉)의 흐름을 조용히 바라보면, 도학(道學)의 실마리를 은연중에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스스로 호(號)를 ‘옥류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뜻의 관천자(觀泉子), 또는 관천(觀川)이라고 일컬었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명종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한번 가보고 싶어 하다가 가지 못하자, 화원(畵員)을 시켜서 그림을 그려오도록 하여 그림을 보고 그 풍경을 완상하였다는 일화에서 보듯이, 명종도 스승 신희복에게 배워서 자연 지리의 원리를 터득하고 수석(水石)을 좋아하고 자연을 즐겼던 것이다.
신희복이 개성 유수로 있었을 때 개성의 어느 선비의 집에 고려 때 궁궐의 후원인 화원(花園)에 있던 괴석(怪石) 하나가 있었는데, 그 집안에서 대대로 고려의 유물로서 숨겨두고 애지중지하면서 보물로 전해 오던 것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개성 유후신희복은 강제로 구경하기를 요구하여 한번 괴석을 완상하였다. 그 괴석을 몹시 탐냈던 신희복은 하례(下隷)를 데리고 밤을 틈타서 그 괴석을 몰래 파내어 싣고 왔다. 조금 뒤에 주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달려와서 중도에서 가로막자, 개성 유후신희복은 크게 노하여 하례들을 시켜서 그 괴석을 깨뜨려서 산산조각 내버렸다.(『명종실록』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이리하여 『명종실록』의 「신희복 졸기」에서 그를 비평하기를, “그가 개성 유수로 있을 때, 자녀들의 말을 듣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고, 재상[윤원형]의 청탁을 받아서 죄 없는 백성들의 집을 부수고 위협하여 토지를 버리고 멀리 변방으로 쫓겨가게 만들었다.”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그러나, 권상하의 신도비명을 보면, “신희복은 일찍이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나의 후손 가운데 나의 묘소 아래 살게 되는 자는 기와집을 짓지 말고 꽃과 과일나무를 심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가 사치를 멀리 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자손들은 조상의 무덤 아래 동네에 모여서 살았다.
신희복의 서울집이 마침 명종의 처외삼촌 이량의 집과 서로 가까웠는데, 명종 후기에 이량이 한창 자기 세력을 넓히면서 명종의 사부 신희복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이량은 여러 번 신희복의 집을 찾아와서 환심을 사려고 하였으나, 신희복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이량이 정원 가운데에 피어난 화초(花草)를 한 포기 보고 이것을 얻어가려고 하였으나, 신희복이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이량은 신희복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명종 말년에 명종이 그를 정승으로 등용하려고 하자, 적극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신희복의 벼슬이 참찬으로 끝나고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신희복의 사람됨이 노년에 이르러 자질과 행동이 느리고 둔하며, 생각이 편협하고 사리에 밝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운 정무를 만나면 사리에 어두워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그가 한성부 판윤으로 있을 적에 아전들이 문서를 가지고 와서 그의 앞에 놓으면, 그는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오직 문서를 읽어보고 머리만 끄덕이다가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눈금 없는 저울[無星之稱]’이라고 조롱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0년 7월 25일 「신희복 졸기」) 그러나 신희복이 평소 지나치게 겸손하였기 때문에 남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능(無能)하게 행동하였고, 일찍이 학술(學術)을 배웠다고 남에게 한번도 자랑하지 않았다. 신희복의 지나친 겸손은 <기묘사화> 때 자기 학식을 자랑하던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활에 한번 다친 새는 활시위 소리만 들어도 놀라서 높이 달아난다.”는 ‘상궁지계(傷弓之戒)’를 생활신조로 삼고 평생을 살았던 결과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묘소는 황해도 강음현 평산 서쪽 천신산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한수재(寒水齋)권상하가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 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參贊愼公希復神道碑銘)」] 명종은 신희복이 죽은 직후에 궁중에 속한 내노(內奴) 3백 명을 한 달 동안 황해도 평산으로 보내서 신희복의 산소를 아름답게 꾸미고 매만지도록 하였다. 명종이 죽은 신희복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은전(恩典)을 베풀었던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그 산소의 혼유석(魂遊石) 위에서 항상 노닐며, 죽은 자의 보금자리인 무덤과 그 주변을 맴돈다는 샤머니즘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명종실록』의 「신희복 졸기」에서는 신희복이 돌아간 기일(忌日)을 7월 25일이라고 기록하였으나, 권상하의 「신희복 신도비명」에서는 7월 24일이라고 하였다. 신도비명은 1백여 년 뒤에 지어졌으므로, 실록의 기록보다 잘못된 부분이 많으나, 기일만큼은 자손들의 제사를 지내는 날이므로 신도비명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본다. 권상하의 신도비명은 그의 현손(玄孫) 신경윤(愼景尹)의 가장(家狀)과 그 4촌 동생 신동윤(愼東尹)의 행장(行狀)을 바탕으로 썼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참봉성수근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신유(愼有)는 학식이 있었는데 음직으로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를 지냈고, 차남 신존(愼存)은 직장(直長)을 지냈고, 3남 신재(愼在)는 좌랑을 지냈다. 장녀는 부사(府使)송율(宋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士人)한여호(韓汝虎)에게 시집갔다.[『한수재집』 권24 「참찬 신공희복 신도비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수재집(寒水齋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잡기(寄齋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모재집(慕齋集)』
- 『태촌집(泰村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