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陶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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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선조 7) 경상북도안동에 건립하여 이황(李滉)을 배향한 서원.

개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退溪)이황(李滉)이 독서·강학하던 도산서당(陶山書堂)을 모체로 1574년 창건한 서원이다. 이듬해 사액(賜額)을 받고, 1615년(광해군 7) 월천(月川)조목(趙穆)을 종향하였다. 영남 지역에 기반을 둔 남인의 대표 서원으로, 고종대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고종실록』 8년 3월 20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도산서원 관련 기사는 18건이다. 이황을 주향(主享)한 서원으로 17세기 이후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위상에 비추어 다른 서원에 비해 많은 자료를 기록하고 있다. 이황이 만년에 경상도예안에서 독서 강학한 사실을 기록하여 이후 서원 건립의 배경을 살필 수 있는 이황의 졸기(卒記)와 1595년(선조 28) 이황서당(李滉書堂)의 중수 기록 등은 서원 건립 초기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다.

또한 17세기 사림(士林) 정치의 전개 과정에서 조목의 종향을 둘러싼 중앙 정치 세력의 개입에 대한 기사, 인조 연간 도산서원 원장 이유도(李有道: 이황의 형 이해(李瀣)의 손자)의 치폐(致斃)를 둘러싼 영남 남인계 사류(士類)의 대응 등 서원의 정치 사회적 지위를 살필 수 있는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서원에 대한 통제가 시행되던 시기에도 중앙에서는 도산서원에는 거듭 치제(致祭)하여 영남을 대표하는 도학(道學) 서원의 위상을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1792년(정조 16) 영남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도산서원에 치제한 후 서원에서 유생을 시취(試取)한 사실은 당시 도산서원의 위상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때문에 도산서원은 1871년(고종 8)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1885년(고종 22) 원임(院任)의 차정(差定)을 둘러싼 신향(新鄕)과 구향(舊鄕) 간의 향전(鄕戰)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도산서원의 창립 과정과 사림 정치기 서원의 정치 사회적 기능, 그리고 신분제 변동기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세기 사림의 향촌 활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서원은 선조대 이후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도산서원을 건립하는 데 계기를 마련한 인물은 이황이다. 이황은 명종 후반~선조 초년 사림의 영수로 활동하였고, 만년에는 예안에 은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도산서당을 세워 인근의 사류들과 독서 강학하였고,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서원 건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4년 뒤인 1574년(선조 7) 문인과 일향 사림의 발의로 기존 서당을 모체로 서원을 창건하였고 이듬해 도산(陶山)이라 사액을 받았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도산서원의 조직은 상·하 유사(有司)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상유사는 원장과 같은 의미로 영남 지역 서원 조직의 기본을 이루는 원장-유사 체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또한 도산서원의 원장은 예안현에 있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원장을 겸임하였다. 역동서원은 고려시대 인물인 우탁(禹倬)을 제향하는 곳으로 도산서원보다 먼저 건립되었지만 이후 서원의 비중과 일향이원(一鄕二院)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 도산서원에서 운영을 총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원장을 겸임하는 것은 영남 지역에서도 예안만의 특별한 사례였다.

서원의 원규(院規)는 따로 규정된 것은 없지만, 이황이 생전에 지은 이산서원(伊山書院) 원규를 저본으로 유생들의 강학과 장수(藏修)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보인다. 도산서원 건립 당시의 재정 규모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도산서당의 재정적 기반을 토대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1619년(광해군 11)의 「전답안(田畓案)」에 나타난 도산서원의 전답 규모는 총 12결(結) 15복(卜) 8속(束) 33두락(斗落)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원전은 일반적으로 속공전, 사사전, 원납전, 면역전 등을 기반으로 하였고, 이후 매입하는 방식으로 전답을 확보해 나갔다. 서원의 전답은 18세기에는 약 20여 결, 19세기에는 약 30여 결로 점차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서원 재정을 지원하려는 지방관의 조치로 영해·영덕 등지의 어염(魚鹽)을 영구히 분정(分定)받아 서원의 운영비를 마련하였다.

변천

선조 연간에 건립된 도산서원은 이황을 제향한다는 데에서 기호학파에 대칭되는 영남학파의 본산이었다. 정치적으로 서인 또는 노론 집권층에 대항하는 재야 남인의 중심지로서 영남 지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7세기 이래 도산서원의 이 같은 위상으로 인해 중앙 정국의 변동에 따라 정치 세력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있었다. 광해군 연간 도산서원에 조목을 종향하는 일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림 세력 사이의 갈등을 통해 이를 살필 수 있다.

1615년 조목의 종향은 정치적 의미가 강한 사건으로 퇴계·남명(南冥, 조식) 학파로 대표되는 남인과 북인 사이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 연간 중앙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북인 세력은 남인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경상도의 안동·예안 지역에 자파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서원을 활용하였다. 즉 도산서원에 이황의 제자들 중 유독 조목의 종향만을 지원하여 북인 세력의 확산을 시도한 것이다.

조목은 동문이며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柳成龍)의 정치 노선에 반대하여 북인과 가까웠으므로 중앙 정국의 북인 세력은 조목의 배향을 지원함으로써 이 지역에 북인 세력의 기반을 확산시켜 나갔다. 향론(鄕論)을 심각하게 분열시켰던 조목의 종향이 실현된 이후 예안에는 남인과 북인이 공존하는 형세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북인 세력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처형되거나 훼가(毁家) 출향되어 다시 도태되고 만다.

남인과 북인 간의 갈등을 겪었던 도산서원은 인조대 이후 남인 세력의 총 본산으로 집권 서인 세력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서인으로 대표되는 관권(官權)과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충돌했던 사건이 1626년(인조 4) 윤6월 6일에 발생한 도산서원 원장 이유도의 치폐사(致斃死)이다. 당시 경상감사로 부임한 원탁(元鐸)은 사송(詞訟)을 처리하는 도중에 사건에 관련된 이유도를 소환 심문하였다(『인조실록』 4년 윤6월 6일).

조사 과정에서 이유도의 답변이 공손하지 못하자, 원탁은 도주(道主)를 능욕한다고 하여 형신을 가했는데, 이로 인해 이유도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도산서원에서는 여러 군현에 통문(通文)하여 감사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정에서는 도신(道臣)을 함부로 몰아내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여 통문을 돌린 유생들을 잡아들였다. 그러자 정경세(鄭經世) 등 재경 남인 관료들은 집권 서인 세력의 유생 탄압에 반대하여 그들을 옹호함으로써 이 문제는 중앙 정국에서 정쟁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였다.

결국 반정 이후 정치 세력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인조의 온건 수습책으로 유생들은 용서받고 원탁은 파직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도산서원은 서원에 관련된 인물을 보호하는 데 서원 조직을 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서원이 향촌의 기구로서 존재했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이후 점차 서인과 남인의 정쟁이 격화되어 가자,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이황에 대한 존숭이 신격화되어 갔고 도산서원의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었다. 중앙에서도 이황이 선조 연간 동서 분당 이전의 인물이었고, 사림의 도학 계보에서 차지했던 비중이 높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대우를 했다. 도산서원의 이 같은 지위는 18세기 서원에 대한 통제가 진행되던 상황에서도 왕으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는 배경이 되었다.

영조는 도산서원에 거듭 치제하고 이황이 거주하던 예안 고택과 도산서원의 전경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며,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을 간행하였다(" title="도산 서원에 제사하라고 명하다 『영조실록』 9년 11월 19일). 정조대에 들어와서도 서적을 하사하는 등 도산서원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특히 1792년 규장각 신료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고 겸하여 영남 인재의 등용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설행하였다.[『정조실록』 16년 4월 4일]

당시 도산서원에서의 과거 설행은 탕평 정치의 기반을 확산하기 위해 추진한 지방 인재의 등용책과 직결되어 있었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攷)』,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등의 편찬으로 이어졌던 정조 연간의 지방 인재 수용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서원에서의 과거 설행은 영남의 대표 서원으로서의 도산서원의 지위를 잘 드러낸 사례라 하겠다.

18세기 이후 신분제 변동을 배경으로 향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향전은 이른바 신향의 등장으로 인한 신분 계층 간의 갈등이었다. 향촌 내 신분 갈등의 초점은 종래 사족만 등재될 수 있었던 교안(校案)·향안(鄕案)·원안(院案)에 신향을 소통하는 문제였다. 영남 신향의 핵심은 서얼들이었다. 적서 갈등은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18세기 이후 중앙 정부의 서얼 허통(許通) 조치로 점차 격화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도산서원에서도 원임의 임명을 둘러싼 향전이 발생했다. 1885년 신·구향 간의 상호 공격과 상언으로 갈등을 빚었던 도산서원의 서얼 소통 문제는 조정의 개입에 따라 신향의 승리로 끝났다(『고종실록』 22년 6월 9일). 적서 문제에 가장 보수적으로 대응했던 영남 사림의 총본산인 도산서원에서 향전이 일어났다는 점은 사족의 향촌 지배 체제가 붕괴되어 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의의

도산서원은 선조 연간 이황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건립된 이후 영남 지역의 으뜸가는 서원으로 위상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도산서원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앙 정치 세력과 서원과의 연관성을 기록한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서원의 내부적 운영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고문서 자료들을 종합한다면 도산서원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
  • 이상현,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도산서원 종향논의」, 『북악사론』8, 2001.
  • 정만조, 「인조 4년 도산원장 이유도(李有道) 치폐사 논란」, 『한국학논총』26,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