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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인 : [[서갑호]](徐甲虎 방림방적 창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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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울산 출생. 1929년 일본에 건너가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紡績業)에 크게 성공하였다. 196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카모토[阪本]방적·오사카방적·히타치[常陸]방적 등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 고베[神戶]국제관광토지개발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국내실업계에 투신, 한국산업은행 관리 하의 태창방적을 인수하여 판본방적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사명을 방림(邦林)방적으로 변경하고 1972년에는 일본 사카모토방적의 합작투자가 허가되어 증설하였다. 그리고 1973년는 구미에 윤성방적를 설립하였다. | 경상남도 울산 출생. 1929년 일본에 건너가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紡績業)에 크게 성공하였다. 196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카모토[阪本]방적·오사카방적·히타치[常陸]방적 등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 고베[神戶]국제관광토지개발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국내실업계에 투신, 한국산업은행 관리 하의 태창방적을 인수하여 판본방적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사명을 방림(邦林)방적으로 변경하고 1972년에는 일본 사카모토방적의 합작투자가 허가되어 증설하였다. 그리고 1973년는 구미에 윤성방적를 설립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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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용지와 건물을 1951년부터 대사관에 무상으로 대여했으며 1962년에 소유권을 정부에 제공하는 용단을 내렸다. | 이후 이 용지와 건물을 1951년부터 대사관에 무상으로 대여했으며 1962년에 소유권을 정부에 제공하는 용단을 내렸다. | ||
이 땅의 현재 시가는 1조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이 땅의 현재 시가는 1조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
− |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이 방적공장은 해방 이후 경상대 이공학부(현 서울공대) 출신인 한국인 간부 홍종모 씨에게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태창방직으로 바뀐 후 서갑호 선생이 인수해 사카모토 방직(판본방직)으로 바꿨다. 그 후 영등포 소재 | + |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이 방적공장은 해방 이후 경상대 이공학부(현 서울공대) 출신인 한국인 간부 홍종모 씨에게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태창방직으로 바뀐 후 서갑호 선생이 인수해 사카모토 방직(판본방직)으로 바꿨다. 그 후 영등포 소재 공장(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은 방림방적으로 이름이 바뀐 채 시설을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공장 부지는 아파트단지로 매각했다. 따라서 한국에는 방림방적 설비와 부지는 없다. |
서갑호 회장의 아들이자 방림방 회장을 물려받았던 서상근 회장(1940년생)은 방림방을 정리한 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서갑호 회장의 아들이자 방림방 회장을 물려받았던 서상근 회장(1940년생)은 방림방을 정리한 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
서갑호 씨의 고국을 위한 거액 쾌척은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게 평가받고 있다. | 서갑호 씨의 고국을 위한 거액 쾌척은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게 평가받고 있다. | ||
한편 서갑호 선생과 함께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해외 한국 기업인 중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상업으로 거액을 모아 1905년 한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한편 서갑호 선생과 함께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해외 한국 기업인 중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상업으로 거액을 모아 1905년 한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
또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난 후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해 미국에 정착한 후 쌀농사로 큰 부를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농장 일부를 내놓고 비행학교 설립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으로 적극 지원한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 또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난 후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해 미국에 정착한 후 쌀농사로 큰 부를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농장 일부를 내놓고 비행학교 설립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으로 적극 지원한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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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후 방림방직 자리인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 주변에 서갑호 선생 동상과 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 |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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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 대종회 [[http://icheonseo.com/]] | 이천서씨 대종회 [[http://icheonseo.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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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방림]] == | ||
+ | 대한민국의 방직업체로, 롯데그룹처럼 일본에서 시작했으며 과거 경방과 함께 서울 영등포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 | ||
+ | 본사의 모태는 1948년에 재일교포 [[서갑호]]가 폐기된 방적기들을 모아 세운 사카모토방적을 기반으로 한다. 초기에는 간사이 지역을 사업영역으로 삼아 1954년 오사카방적을 세우고 1956년에 부실기업 히타리방적을 인수하여 일본 내에서 성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1년에 [[서갑호]] 사장 자신이 학교법인 금강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일교포들을 도왔으며,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주일한국대표부 건물을 임대해줬다가 1962년 한국 정부에 넘겼다. | ||
== 서씨 분파 == | == 서씨 분파 == |
2024년 3월 26일 (화) 13:03 기준 최신판
서갑호(徐甲虎)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에 크게 성공하였다. 한국에서 방림방적 및 윤성방적을 설립하였다.
출생-사망 1915 ~ 1976
활동분야 경제
출생지 경남 울산
주요수상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 국민훈장동백장
목차
가족 관계
- 본인 : 서갑호(徐甲虎 방림방적 창업자)
- 아들 : 서상근(徐相根 방림 명예회장)
- 아들 : 서상운(徐相雲 재일한국동포 권익옹호추진운동본부 회장)
경상남도 울산 출생. 1929년 일본에 건너가 재일실업인으로 활동, 방적업(紡績業)에 크게 성공하였다. 196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카모토[阪本]방적·오사카방적·히타치[常陸]방적 등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 고베[神戶]국제관광토지개발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국내실업계에 투신, 한국산업은행 관리 하의 태창방적을 인수하여 판본방적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사명을 방림(邦林)방적으로 변경하고 1972년에는 일본 사카모토방적의 합작투자가 허가되어 증설하였다. 그리고 1973년는 구미에 윤성방적를 설립하였다.
한편 1962년 11월에 주일(駐日) 대한민국대사관 자리에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사망 후에는 국민훈장동백장이 추서되었다.
임대 전전하던 '최빈국' 대사관 '한' 을 푼 것은 동포들의 피와 땀이었다. 무시받던 일본에서 교포 기부로 도쿄, 오사카에 번듯한 공관을 마련했다.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 서갑호 등의 기여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5월의 일본 도쿄, 대한민국 공사가 오사카의 한 기업인을 찾아와 읍소한다. 도쿄 공사관이 작은 빌딩 한 층에 월세로 들어가 있는데 쫓겨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임차료를 못 내니 건물주가 나가라고 독촉하지만 갈 곳이 없어 버텼는데,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엘리베이터를 꺼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한 국가의 외교부 대표로서는 참담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기업인에게 어쩌란 말인가! 며칠 후 그 기업인이, 공사를 대동하고 부촌으로 유명한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한다. 7934㎡(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입이 딱 벌어진 공사, 뭐라고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기업인은 당시 돈으로 4200만엔을 주고 그 건물을 매입했고 공사관은 바로 이사했다. 월세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한국 정부에 기증된 그 건물이 현재 일본의 대한민국 대사관이다.
서갑호, 먹고 살기 힘들어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서 시작해 온갖 거친 일을 거쳐 방직산업으로 성공했다. 한때 서일본에서 소득세 1위까지 했던 분이다. 1915년에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는데 신격호 회장의 옆 동네였고 ‘도쿄의 신격호, 오사카의 서갑호’로 불리며 의형제로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동네, 뭔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의 공사관도 동포들의 성금으로 운영비를 내다가, 1963년에 와서 사달이 났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데 보증금 2700만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또 그가 나섰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했다. 그래 놓고도 월세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7년 뒤에는 아예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공사관을 옮기자는 결의를 한다.
그래도 염치가 있었는지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동포들은 그건 우리가 쪽 팔려서 안된다고 말하며 도심 한복판인 신사이바시의 대지를 매입키로 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했다.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했고 그 즉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교포들이 설계, 부지 매입, 공사 비용으로 당시 돈 8억엔을 전액 기부한 최초의 사례다.
벌써 감동이 오는가? 아직 멀었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외교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들이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려 조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 부동산, 현재 가치로 2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동포들이 또 존재할까? 독하다는 유대인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다시 나선다. 그때 돈으로 100억엔의 성금을 모아서 기증했고 올림픽공원에 있는 경기장, 올림픽파크텔, 올림픽회관 신축 비용, 미사리 조정경기장과 장충체육관의 보수 비용으로 집행됐다. 서울의 66㎡(약 20평) 아파트가 2000만원 하던 시절에 541억원이었다. 당시에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의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 총 6억원 이었으니 비교가 된다. 지독한 차별 아래 힘들게 살던 자신들이 쪽팔리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결기였다.
서갑호, 망해가던 방림방적을 인수해 한국의 방직업을 선진화했다. 구미에 대규모 공장을 추가 완공했는데 불의의 화재로 전소됐다. 그때 1차 오일쇼크의 불운이 겹치고 또 하필 그 순간에 일본 은행들이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부도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고국의 정부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에 모국에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국민들이 재일동포들을 백안시하게 했다.
이젠 그 누구도 서갑호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도쿄 대사관 지하의 작은 기념관만이 그가 그곳에 존재했고, 조국을 너무나도 짝사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영민 (롯데벤쳐스 대표)
당시 재일교포들의 헌신에 관련된 미담은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의 처절했던 조국에 대한 헌신은 향후 언젠가 낫낫히 밝혀지겠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해외에서 거액의 부를 쌓아 모은 재산을 모국을 위해 쾌척한 훌륭한 기업인 3인에 대한 초· 중· 고교 교과서 수록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재일교포 기업인 출신인 전 방림방적 오너인 서갑호 씨가 포함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고국에 거액을 지원한 서갑호 방림방적 전신 판본방직 회장(1915~1976)과 러시아에서 최고 부자가 된 최재형 선생(1860~1920), 미국에서 쌀농사로 큰돈을 번 김종림 선생(1886~1973) 등 3인의 업적을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우리나라 섬유산업 선구자인 서갑호 선생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모진 고생 끝에 사카모토 방직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해 현 주일대사관부지와 건물을 고국에 기증했으며 이 부지는 현 시가로 따져 1조 원대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갑호 선생은 191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4세 때인 1928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의 상점 점원을 거쳐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해방 이후 폐기처분된 방적기를 사 모아 사카모토방직을 설립하며 승승장구했다. 일본에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한 그는 1950년 오사카 내 고액소득자 1위, 1952년 일본 전체 부호 순위 5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 재계 거물이 됐다. 이후 일본에서 잇따라 새 공장 설립과 부실경쟁사 인수 등으로 급성장한 그는 일본 ‘섬유 왕’으로 불릴 정도로 섬유산업의 간판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또 1963년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같은 시기에 재일교포 고국 투자 권유를 받고 당시 산업은행 관리에 있던 태창방직(전 고려방직)을 인수해 판본방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바로 이 회사가 국내 대방(大紡) 중의 하나였던 방림방적의 전신이었다. 특히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가를 위해 현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 용지를 구입해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이 용지와 건물을 1951년부터 대사관에 무상으로 대여했으며 1962년에 소유권을 정부에 제공하는 용단을 내렸다. 이 땅의 현재 시가는 1조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이 방적공장은 해방 이후 경상대 이공학부(현 서울공대) 출신인 한국인 간부 홍종모 씨에게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태창방직으로 바뀐 후 서갑호 선생이 인수해 사카모토 방직(판본방직)으로 바꿨다. 그 후 영등포 소재 공장(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은 방림방적으로 이름이 바뀐 채 시설을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공장 부지는 아파트단지로 매각했다. 따라서 한국에는 방림방적 설비와 부지는 없다. 서갑호 회장의 아들이자 방림방 회장을 물려받았던 서상근 회장(1940년생)은 방림방을 정리한 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갑호 씨의 고국을 위한 거액 쾌척은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게 평가받고 있다. 한편 서갑호 선생과 함께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해외 한국 기업인 중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상업으로 거액을 모아 1905년 한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난 후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해 미국에 정착한 후 쌀농사로 큰 부를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농장 일부를 내놓고 비행학교 설립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으로 적극 지원한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향후 방림방직 자리인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75 에이스하이테크시티,문래자이아파트,문래로데오먹자골목거리 주변에 서갑호 선생 동상과 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통일신라시대 아간대부(정2품)를 지내시고 이천(利川)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孝養山)에 있다.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가족 관계
- 본인: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 부인 :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
- 아들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
- 손자 : 서염(徐廉)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손녀: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徐氏)
- 고손자: 서수(徐琇 종1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 고고손자: 서장기(徐長己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
- 고고손자: 서준방(徐俊邦 정3품 형부상서(刑部尙書). 평당 서씨(平當徐氏) 시조)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고손자: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손자: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 고고고손자: 서원(徐元)(정2품 평장사)
- 원손자: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
- 아들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고손자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고고손자 :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 고고손자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 고고손자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 고고손자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고고고손자 :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 서울시장.장관)
- 고고고손자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고고고고손자 : 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
- 고고고고손자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
- 고고고손자: 서상(徐祥)
- 고손자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손자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아들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원손자: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
- 고고고손자: 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
- 고고고손자: 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고손자: 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
- 고고고고손자: 서저(徐氐 병부낭중. 종 3품. 차관급)
- 고고고고손자: 서평(徐坪 판도좌랑)
- 고고고고손자: 서광(徐珖-예빈소경))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손자: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左承旨)정3품.장관)
- 고고고고고손자: 서온(徐溫.승지.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충(徐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 고고고손자: 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
- 고고고손자: 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
- 고고고손자: 서원(徐元)(정2품 평장사)
- 고고손자: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 고손자: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손자: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춘(徐椿 부여서씨파(扶餘徐氏派 대종)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2품)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릉(서능)(徐稜 장성서씨파(長城徐氏派)=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박(徐樸(부여서씨(扶餘徐氏) 봉례공파(奉禮公派))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남양(당성)서씨파(南陽((唐城)徐氏派)
- 원손자: 서원길(교리공(校理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직(徐稷(연산서씨파(連山徐氏派)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수(徐宗秀 현감(縣監))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
- 증손자: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손자: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고고손자: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고고고손자: 서찬(徐瓚 (정4품 장령)
- 고고고고손자: 서인(徐諲 교수(학자)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徐勖 정3품 승지)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천(徐思川)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근(徐楊根)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경흥(徐敬興.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晋 정3품 사재감정 교리공파(校理公派))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徐勖 정3품 승지)
- 고고고고손자: 서인(徐諲 교수(학자)
- 고고고손자: 서찬(徐瓚 (정4품 장령)
- 고고손자: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고손자: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증손자: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손자: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손자: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손자: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손자: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손자 : 서영(徐英)
- 동생 : 서신통(徐新通)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2]]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3]]
달성서씨 서진 시조묘소 참배 [[4]]
대구서씨 서한 시조묘소 참배 [[5]]
연산서씨시조 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6]]
이천서씨 대종회 [[7]]
방림
대한민국의 방직업체로, 롯데그룹처럼 일본에서 시작했으며 과거 경방과 함께 서울 영등포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 본사의 모태는 1948년에 재일교포 서갑호가 폐기된 방적기들을 모아 세운 사카모토방적을 기반으로 한다. 초기에는 간사이 지역을 사업영역으로 삼아 1954년 오사카방적을 세우고 1956년에 부실기업 히타리방적을 인수하여 일본 내에서 성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1년에 서갑호 사장 자신이 학교법인 금강학원 이사장을 맡아 재일교포들을 도왔으며,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주일한국대표부 건물을 임대해줬다가 1962년 한국 정부에 넘겼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묘소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서신일(徐神逸)의 음덕(陰德)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서신일(徐神逸)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고려(高麗) 초에 개성(開城) 교외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에 갔을 때, 사슴이 뛰어왔다. 가만히 보니, 사슴이 화살을 맞고 있었다. 그는 살을 뽑아주고, 사삼을 숨겨 주었다.
얼마 후 사냥꾼이 와서 사슴 간 곳을 물을 때, 다른 곳을 가리켜 주어 사슴을 살려 주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당신이 오늘 살려 준 사슴은 내 아들이오. 당신 때문에 내 아들이 살았으니, 대단히 고맙다고 하며, 당신의 자손들은 대대로 재상(宰相)이 될 것이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 후 서신일(徐神逸)은 나이 80에 아들 서필(徐弼)을 낳았다. 서필(徐弼)은 명상(名相)이었고, 서필(徐弼)의 아들 서희(徐熙)는 요(遼) 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 봉산군(蓬山郡)에서 만나 담판하여 요(遼)의 공격을 막아 냄으로써 유명하였고, 서희(徐熙)의 아들 서눌(徐訥)은 고려 8대 왕 현종(顯宗)의 장인(丈人)이 되었다. 그는 현종(顯宗), 9대 덕종(德宗), 10대 정종(靖宗) 등 3대의 명상(名相)으로 후에 정종(靖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는 등 역대로 내려오며 이름을 날렸다.
서공(徐恭)은 서희(徐熙)의 현손(玄孫)으로, 18대 의종(毅宗) 때 서경에 같이 가 문무관과 함께 활쏘기를 할 때 서경 사람은 잘 맞추었으나, 종신(從臣) 중에는 한 사람도 맞추지 못하여 왕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었을 때 서공(徐恭)이 두 번 맞추어 왕을 기쁘게 하였다.
그 후 서공(徐恭)은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를 두 번 지냈고, 재상(宰相)이 된 후에도 더욱 겸손하였다. 그 중에도 경박(輕薄)한 문사(文士)들을 질시하였고, 무인(武人)을 예로 대우해 주었다. 의종(毅宗) 때 정중부(鄭仲夫)가 문신을 살해할 때 중방(重房)에서 순검군(巡檢軍) 22명을 보내어 그의 집을 호위해 준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서씨(徐氏) 집안은 고려 초기부터 혁혁한 집안으로 내려왔다. 모두 사슴을 살려 준 은덕(隱德)이라 한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