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효원(黃孝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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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4년(태종 14)∼1481년(성종 12) = 68세.] 조선 초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은 참찬(參贊)이고, 봉호는 상산군(商山君)이고,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자는 자영(子永) · 사행(士行)이고 호는 소원(少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황사간(黃士幹)이고, 어머니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오현(吳顯)의 딸이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1444년(세종 26) 나이 31세 때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대학자 서거정(徐居正)과 같이 합격하였다. 서거정은 황효원을 “황동년(黃同年)”이라고 부르고 가깝게 지냈다. 세종은 대개 장원 급제한 젊은 인재를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임명하였는데, 황효원을 바로 예빈시(禮賓寺)주부(主簿)에 임명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차등 있게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에 황효원이 신급제자 33인을 대표하여 전문(箋文)을 올려 은영연(恩榮宴)을 하사한 세종에게 사례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승진하고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 1449년(세종 31)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을 맡아 세종 말년에 활동하였다.

1450년 2월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좌헌납황효원은 궁중에서 승하한 부왕 세종을 위하여 금으로써 불경(佛經)을 베껴 쓰는 것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유(李瑈)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이 함께 상서(上書)하여, “이것은 선왕(先王)을 헐뜯고 새 임금을 우롱(愚弄)하는 짓이니,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비난하였으므로, 문종이 황효원을 파직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대죄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합동으로 함께 상소하여 황효원의 주장을 지지하고 모두 사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까지 상소하여 그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문종은 황효원을 다시 부르고, 곧 예조 정랑(正郞)으로 승진시켰다.

1451년(문종 1) 서울 도성(都城) 사람들 가운데 승하한 세종을 위하여 쌀과 곡식을 모아서 홍제원(洪濟院) 석불(石佛)에 기도하는 자가 날마다 1천 명이나 되었다. 예조 정랑한효원이 서활인원(西活人院)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그 거둔 미곡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용으로 쓰려고 하였다. 사헌부에서 이를 듣고 예조 정랑황효원을 탄핵하기를, “유식한 문신으로서 미륵당(彌勒堂)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거둔 미곡을 공처(公處)에 쓰고자 하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하니, 황효원이 대답하기를, “잘못을 금지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은 예조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황효원은 자기 맡은 직무에 충실한 현실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단종 시대 활동

1452년 5월 문종이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황효원은 이조 정랑(正郞)으로 문관을 임명하는 문선사(文選司)를 맡아서,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김문기(金文起)의 사위 생원 박장윤(朴長胤)을 동부 녹사(東部錄事)에 임명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였다. 여기서 황효원은 처음에 수양대군 일파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뒤이어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에 임명되었는데, 의정부 당상(堂上)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 정분(鄭笨) · 이양(李穰) · 허후(許詡) 등의 의논을 가지고 어린 단종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 일을 담당하였다. 당시 단종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정사를 제대로 판결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의정부 대신들이 모여서 정사를 의논하고 검상을 보내어 보고할 때 결재할 부문에 황색 표식인 이른 바 ‘황표(黃標)’를 붙여 두었고, 단종이 이 황표에 결재하였다. 이를 일러 ‘황표 정사(黃標政事)’라 하였다. 이렇게 했던 까닭은 당시에 수렴청정(垂簾聽政)할 대비(大妃) 혹은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권(臣權)과 왕권(王權)의 대립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단종 시대에는 신권이 우세한 시기였는데, 수양대군이 여기에 반발하여 쿠테타를 일으켜서 권신(權臣)들을 죽이고 왕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학자풍의 안평대군은 3의정 황보인 · 김종서 · 정분 등과 가까워서 안평대군의 일파가 많이 등용되었다. 무사풍의 수양대군은 ‘황표 정사’에 불평불만을 품고서,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보인 ·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계유정란(癸酉靖亂)>이다. 수양대군이 의정부 영의정이 되어 정부와 종친을 장악하였는데, 그때 황효원은 의정부 4품 사인(舍人)에 승진하여, 의정부 영의정수양대군의 명령을 받들어 어린 단종에게 전달하고 윤허(允許)를 받아내는 어려운 일을 맡게 되었다. 황효원은 의정부 사인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민하고 성실하게 일하였으므로, 후일 세조가 좌익공신으로 책봉하는 교서(敎書)에서, “내가 영의정으로 정사를 보필할 때 그대가 동료와 더불어 일을 당하면 과감히 처리하고, 처리하기 곤란한 일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모든 여러 가지 일을 시행하는 데 잘못된 실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매우 훌륭한 그릇으로 여기었다.” 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4년 6월 29일 「황효원 책훈 교서」]

그가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상중의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하도록 권유하는 일을 맡아서, 마침내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에 공훈을 세웠다. 당시 단종을 키운 양혜빈(楊惠嬪)의 부탁으로 영의정수양대군이 왕비를 맞이하는 일을 추진하였는데, 모든 유신들이 이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의정정인지(鄭麟趾)도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황효원이 우의정정인지를 찾아가서 설득하자, 정인지가 화를 내면서, “상중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을 어찌 예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황효원이 돌아와서 수양대군에게 보고하자, 수양대군이 독촉하기를, “양혜빈이 빨리 왕비를 맞아들이자고 부탁하니,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라.”고 하였다. 황효원이 또 정인지를 찾아가니, 정인지가 말하기를, “양씨는 세종이 빈(嬪)으로 봉하긴 하였으나, 원래가 천한 여자인데, 어찌 국가의 일에 참람하게 간섭한다는 말인가?” 하였다. 양혜빈은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1446년(세종 28) 승하한 이후 세종의 명령으로 궁중의 내명부(內命婦)를 총괄하던 궁내 최고 실력자였다. 황효원이 정인지 앞에 꿇어앉아 간곡히 부탁하자, 정인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일 내가 일찍 대궐에 들어가겠으니, 술이나 많이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의정부에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을 논의할 때 정인지는 일찍 대궐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모여 앉아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흠뻑 취하여 마침내 그 의논에 대하여 한 마디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소문쇄록(謏聞瑣錄)』]

어린 단종도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을 원하지 않았으나, 여러 날 황효원 등이 단종을 종용하자, 단종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와 같이 아뢰니, 끝내 내 뜻을 고집할 수가 없구나.” 하고,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왕후로 책봉하고, 장인 송현수를 돈령부(敦寧府) 지사(知事)로 임명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 『해동야언(海東野言)』] 그러나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혜빈과 그녀가 낳은 세 아들 한남군(漢南君) · 수춘군(壽春君) · 영풍군(永豊君)을 모두 죽이고, 또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송씨(宋氏)의 아버지 송현수도 죽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권4]

황효원이 의정부 사인으로 있다가, 1454년(단종 2) 사복시(司僕寺) 윤(尹)으로 승진하였는데, 그가 사인으로 1년 정도 재임할 때 이징석(李澄石) 부자를 살려주었고, 또 인재(仁齋)강희안(姜希顔)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 <계유정난> 직후에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인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이징옥(李澄玉)이 반란을 일으켜서 수양대군 일파가 장악한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자, 그의 형 이징석의 처리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그때 사인황효원은 단종에게 넌지시 아뢰기를, “그 아우를 죄 주고 그 형은 보전하는 것은 이미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임금에게 어찌 그만한 권한이야 있을 수 없겠습니까? 마땅히 의정부에서 논의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여, 아들과 함께 투옥되었던 이징석을 석방시켜서 멸문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수양대군 일파가 이징석의 무예를 아껴서, 이징석을 좌익공신 3등 양산군(梁山君)에 봉하여, 그 뒤에 양산 이씨(梁山李氏)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사인황효원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직제학(直提學)강희안은 서자(書字)의 공(功)이 있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올리더라도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여, 한글의 서체를 개발한 서예가 강희안에게 자급을 올려주도록 하였다. 강희안은 사숙재(私淑齋)강희맹(姜希孟)의 형인데,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강희안 · 강희맹 형제의 공로로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9월 세조가 즉위하는 데에 공훈이 많았던 44명의 신하들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책훈(策勳)하였는데, 황효원은 3등으로 책봉되었다.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은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체포되어 문초를 받던 강희안을 보고, 성삼문은 “이 사람은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름 있는 선비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이 사람은 살려두고 쓰시지요.”라고 변호해 주어서,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세조가 이종 4촌간인 강희안 형제를 특별히 보호하여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1457년(세조 3) 2월 황효원은 형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8월에 공조 참판으로 옮겼는데,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9월에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10월에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事)가 되었다. 그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1458년(세조 4)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으로 옮겼다. 그해 2월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 · 정사공신(靖社功臣) · 좌명공신(佐命功臣) · 정난공신(靖難功臣) · 좌익공신(佐翼功臣)의 5대 공신(功臣)들에게 중삭연(仲朔宴)을 베풀자, 예문관 제학황효원이 축수(祝壽)의 시를 올리기를, “뼈가 가루가 되도록 임금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므로[糜粉不可酬], 길이 금석(金石)에 새겨서 보존하리라[永言保金石]. 다만 지극히 어진 임금을 받들고[但願奉至仁] 만세토록 동국(東國)을 다스리도록 원하네[萬歲御東國].”라고 하였다. 황효원은 세조의 사랑을 받아서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그해 6월 세조는 황효원을 좌익 3등 공신(佐翼三等功臣)에 책훈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그 부모와 부인에게도 봉작(封爵)하고, 전지 80결(結), 노비 8구(口), 백은(白銀) 25냥쭝 등을 하사하였다.

그해 여름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수령과 아전들의 횡포를 막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1459년(세조 5) 세조가 관찰사황효원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듣건대, 경이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환심을 얻었다고 하니, 내가 멀리서 경을 위로한다.” 하고, 경계하기를, “경이 나이 어린 세자에게 여러 번 붓과 먹을 올리고, 또 중궁(中宮)에게 은으로 장식한 장도 등의 물품을 바쳤는데, 경의 충성은 내가 가상히 여기지마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였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황효원은 호패법(號牌法)을 철저히 시행하여 호적 장부에 누락된 장정(壯丁)을 수색하여 찾아내자고 주장하였다.

그해 7월에 예조 참판이 되었는데, 경기도에 기근(氣根)이 들자, 세조가 특별히 황효원을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1460년(세조 6) 경기도 관찰사황효원이 미곡 1만 석(石)을 호조에 요청하자, 세조가 이를 특별히 하사하여, 경기도의 기민을 구제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다시 한성부 윤이 되었고, 이듬해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할 때 그 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 1462년(세조 8)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한성부 윤을 거쳐, 인순부(仁順府) 윤(尹)으로 옮겼다. 1463년(세조 9)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나갔다가 뱀이나 독사(毒蛇)에게 물린 데에 특효약인 관음초(觀音草)가 나는 곳을 찾아냈다. 세조가 이를 듣고, “이러한 풀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니, 이것은 바로 백성을 위해 하늘이 낸 풀이다. 황효원에게 명하여 채취(採取)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1466(세조 12) 황효원이 모친상을 당하여 용인(龍仁)에서 여묘살이를 하다가, 이듬해 병이 나자, 세조가 상중의 황효원에게 고기를 먹도록 권유하였다. 1467(세조 13) 황효원이 상례(喪禮)를 끝마치자, 세조가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으로 승품하여 상산군에 봉하고,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9(예종 1) 예종 때 황효원을 상산군 봉조하(奉朝賀)로 임명하였는데, 세조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예종을 잘 보필하라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윤씨(尹氏)의 뜻이었다. 1469년 11월 젊은 예종이 20세로 승하하고, 13세의 어린 성종이 즉위하였는데, 1470(성종 1) 종 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품되고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세조가 공신들에게 하사한 난신(亂臣)의 부녀자 가운데 봉원군(蓬原君)정창손(鄭昌孫)에게 내려준 난신(亂臣)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와 우참찬황효원에게 내려준 이유기의 딸 이소근소사(李小斤召史) 등을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었는데, 소근소사(小斤召史: 작은 조이)는 황효원의 셋째 부인이었고, 설비는 그 장모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1년 4월 15일) 1471(성종 2) 3월 성종이 즉위하는 데에 보필한 공훈으로 황효원은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훈되었다.

참찬황효원은 성종 때 첫째 부인 신씨(辛氏)와 둘째 부인 임씨(林氏)의 처첩 문제로 제 1차 소송에 휘말렸다. 두 부인이 죽고 난 뒤에 늦게 혼인한 이유기의 딸 이소근소사의 신분 문제로 제 2차 소송에 휘말렸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집요하게 황효원을 공격하였으나, 황효원은 임씨 소생 두 아들과 이씨 소생 두 아들을 위하여 대간(臺諫)과 맞서서 싸워서 서얼(庶孼) 제도의 높은 장벽을 넘었다. 실록에도 조선 전기에 대간과 맞서 싸워서 이긴 사람은 김종서와 황효원뿐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그 논쟁은 매우 극렬하였다.(『성종실록』 성종 7년 7월 20일)

제 1차 소송은 황효원이 첫째 부인 신씨(申氏)를 버리고, 둘째 부인 임씨(林氏)에게 장가들어 황석경(黃碩卿)과 황준경(黃俊卿)의 두 아들을 낳고, 또 둘째 부인 임씨를 버리고 첫째 부인 신씨(申氏)와 다시 결합하여 동거(同居)한 데서 비롯되었다. 충훈부(忠勳府)에서 두 아들을 공신(功臣)의 적자(嫡子)라고 기록하였으므로, 황석경 형제가 생원(生員) ·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應試)하였다. 처음에 신씨의 오빠가 황효원이 까닭없이 전처를 버렸다고 고발하였고, 다음에 4부 학당(學堂)에서 첩의 아들 황석경 등은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황효원은 임씨가 양가집 처녀이고 첩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신씨가 그 두 아들을 길러서 혼인을 시켰다고 반박하였다. 성종은 할머니 정희대비(貞喜大妃)의 분부에 따라서 황효원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였으나, 대간들은 끈질기게 황효원을 공격하였다.

제 2차 소송은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과 혼인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황효원은 공신(功臣)에게 하사한 난신 이유기의 딸 이소근소사를 10여 동안 종으로 부리다가 두 부인이 죽고 난 다음에 비첩(婢妾)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정희대비의 명에 따라서 이유기의 아내 설비와 그 딸 이소근소사를 노비의 신분에서 풀어주었다. 황효원은 설비가 주관하여 이소근소사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는데, 장모의 혼서(婚書)는 추후 작성하여 호적에 올렸다. 그러다가 난신의 딸을 적처(嫡妻)로 삼은 문제로 여론이 비등해지자, 황효원은 여종[婢]을 처(妻)로 삼은 사실은 인정했으나, 혼서를 추후하여 작성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정희대비는 성삼문이 <사육신 사건>에 끌어들인 진무(鎭撫)이유기를 전주 이씨 종실(宗室)이라고 비호하여 면천(免賤)시켰으므로, 성종은 황효원을 논죄하지 말고 이씨(李氏)를 후처(後妻)로 삼도록 명하였다.

1481(성종 12) 9월 19일 황효원이 송사(訟事)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병으로 서울 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68세였다. 성종은 철조(輟朝)하고, 예관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나라에서 예장(禮葬)토록 하였다. 그때 함께 과거에 급제한 33인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서거정(徐居正)은 「상산군 황동년(黃同年)에게 곡(哭)한다」는 시(詩)에서, “일전에 그대의 집을 방문해서[日者訪君家], 서로 술을 권하여 여러 잔을 마셨는데[相勸累十觴]. 오늘 아침 갑자기 부음을 받으니[今朝忽聞訃], 사별이 무엇이 그다지도 바빴다는 말인가[死別何大忙]. 그대를 북망산에 장사지내니[送君葬北邙], 이내 마음이 너무너무 비통하구나[慘慘心悲傷].” 하였다.[『사가시집(四佳詩集)』 권40]

성품과 일화

『성종실록』성종 12년 9월 19일 「황효원 졸기」에서는 그에 관하여 “성질이 가혹하고 지독하여 수령을 종처럼 대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황효원이 충청도 · 경기도 · 전라도 · 강원도 등 4도의 관찰사를 지낼 때 아전과 수령의 횡포를 막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빈틈없이 관리하고 호패법을 철저하게 실시하였기 때문에 받은 평가라 할 수 있다. 세조는 관찰사황효원에게 “그대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칭찬하고 거듭 상사(賞賜)를 내렸는데, 이에 대하여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황효원은 민첩한데다가 관리의 재능이 있어서 몇 번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가 유능(有能)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가정에서,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고, 또 셋째 부인의 신분 문제로 인하여 종신토록 소송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의정부에서 나라의 큰일을 논의하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는 재화를 늘리는 데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집안 종들로 하여금 항상 남의 헌 집을 사가지고 깨끗하게 고치게 하고, 그는 이것을 다시 되팔아서 이득을 취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때의 유학자들은 그가 탐욕스러워서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고 ‘화가옹(貨家翁)’이라고 비난하였으나, 그는 다만 재물을 탐하여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물건을 사고팔아서 자산(資産)을 늘이기를 즐기던 “재텍크의 귀재(鬼才)”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청백리(淸白吏)로 선임되었던 것을 보더라도 재물만을 탐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사평(史評)에서는 “황효원은 희로(喜怒) 애락(哀樂)이 변화무상하며, 부정에 비분강개하는 선비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사람들을 오만한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속으로는 여자와 재물을 음탐하여 추잡한 집안 행실이 많이 바깥으로 알려져서, 사람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2년 9월 19일 「황효원 졸기」]

황효원이 일찍이 의금부 제조가 되었을 때 어떤 문사(文士)의 아내가 자기 집 남자종과 사통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고소를 당하였는데, 의금부에서 조사하였으나 문사의 아내는 끝까지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황효원의 친구 구진무(具鎭撫)가 국문(鞫問)을 맡고 있다가, 황효원에게 농담하기를, “문사의 아내가 완강히 숨기고 있으나, 그 아이의 생김새를 가만히 살펴보니, 이 놈은 황효원의 아들 같은데….”라고 하였다. 황효원이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만약 내 아들이라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여 의금부 당상관들이 청사(廳舍)가 떠나갈 정도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필원잡기(筆苑雜記)』「해동잡록」 권6] 이를 통해 젊었을 때 황효원이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서 얼마나 후손을 걱정하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평(襄平)이고, 묘소는 현재 경기도 수원시 영동구 이의동 광교산 아래 쇠죽골에 있다. 수원시 영동구 이의동을 ‘상사구니’라고 부르는데, 황효원의 상산군에서 나온 말이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양벌리(陽筏里)에 양평묘(襄平廟)가 있는데, 후손들이 그의 기일(忌日)에 이곳에 모여서 제향(祭享)한다.

첫째 부인 은풍 신씨(殷豊辛氏)는 후손이 없고, 둘째 부인 옥구 임씨(沃溝林氏)는 임수강(林守剛)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고, 셋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진무(鎭撫)이유기(李裕基)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황석경(黃碩卿)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차남 황준경(黃俊卿)은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냈는데, 모두 임씨(林氏)의 소생이었다. 3남 황윤충(黃允忠)과 4남 황극충(黃克忠)은 모두 이씨(李氏)의 소생이었다. 상주 황씨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한 사람들은 대개 황효원의 후손들인데, 이는 황효원인 당시 대간과 맞서 싸우면서 서얼 제도의 장벽을 넘었기 때문이다. 후손 가운데 문관으로 뛰어난 인물은 현손 황우한(黃佑漢)인데, 황우한은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도승지 · 대사헌을 지냈다. 무관으로 유명한 인물은 6대손 황징(黃徵)인데, 황징은 무과에 급제하여 숙종 때 어영대장(御營大將)을 두 번이나 지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필원잡기(筆苑雜記)』
  • 『청파극담(靑坡劇談)』
  • 『사가집(四佳集)』
  • 『눌재집(訥齋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각잡기(東閣雜記)』
  • 『종묘의궤(宗廟儀軌)』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