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姜希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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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4년(세종6)~1483년(성종14) = 60세]. 조선 초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경순(景醇)이고, 호는 사숙재(私淑齋), 또는 운송거사(雲松居士), 국오(菊塢), 만송강(萬松岡)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강회백(姜淮伯)의 손자이며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고 강희안(姜希顔)의 아우이다. 아버지 강석덕(姜碩德)이 세종(世宗)과 동서 간이므로 강희안·강희맹 형제는 문종(文宗)·세조(世祖)와 이종 4촌간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47년(세종29)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과 예조좌랑을 거처 예조정랑에 올랐다. 1455년(세조1) 집현전(集賢殿) 직전(直殿)이 되었고, 병조정랑·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4) 부친상을 당하고 다음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461년(세조7)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뒤 예조·이조의 참의를 거쳐 1463년(세조9) 중추원(中樞院)부사(副使)로 승진하여, 진하사(進賀使)로서 중국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그가 지은 시문(詩文)을 보고 중국 사대부들이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1464년(세조10) 공조참판이 되었고, 1465년(세조11) 인순부(仁順府) 윤(尹)으로 옮겼다가 이조·예조의 참판을 지냈다. 1464년(세조10)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예조판서로 발탁되었다. 그때 세조가 등준시(登俊試)를 열었는데, 그가 갑과(甲科)로 합격하였다. 이때 세조는 “등준시에 뽑힌 자는 모두 나의 문생(門生)이다.”라고 말하고 술을 하사하였다. 또 성균관(成均館)지사(知事)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여 문무(文武)를 아울러 관장하다가 공조판서와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세조는 “강명(剛明)함이 제일이다.”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려 ‘익대공신(翼戴功臣)’의 칭호를 하사 받았다. 이에 앞서 그가 세조에게 건의하기를, “젊은 남이에게 병조를 맡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남이가 과연 모반죄로 죽으니, 사람들은 그의 사람 보는 식견에 감탄하였다. 1470년(성종1)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 받았다. 또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修撰)하였고, 1471년(성종2) 돈령부(敦寧府)판사로서 경연(經筵) 지사를 겸임하였고, 1473년(성종4) 병조판서로 전임되었다. 1476년(성종7) 중추부(中樞府)판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이조판서로 옮겨서 전선(銓選)을 주관하였는데, 청렴한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물리쳤다. 1479년(성종10) 의정부(議政府)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했고, 1481년(성종12) 의금부(義禁府)판사가 되었다가, 1482년(성종13) 좌찬성(左贊成)으로 옮겼다. 1483년(성종14) 2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으니, 향년 60세였다.

편찬 사업

그는 문장가로서 항상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편찬 작업을 담당하였으므로, 40여 년 동안 지기(知己)로서 하루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거의 같이 생활하였다. 신숙주는 그의 형 강희안과 동갑으로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였으므로, 신숙주가 그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세조 때 그가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예의에 관련된 제도를 당시의 형편에 맞도록 개혁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신숙주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또 세조의 명령을 받고, 신숙주 등 6~7명의 유학자들과 함께 업무를 분장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왕조의 율령(律令) 체제를 제정하여 조선의 여러 제도와 법률을 완비하는 방대한 작업이었으므로, 그 뒤 성종 때 완성되었다. 또 성종의 왕명을 받고 서거정(徐居正)·신숙주 등과 함께 신라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명한 시문(詩文)을 모아서 1478년(성종 9)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문학의 총결산이라고 일컬어진다. 뿐만 아니라 왕명을 받고 노사신(盧思愼)·신숙주 등과 함께 세종 때 편찬한 지리지(地理志)에 시문(詩文)을 더하여 1481년(성종12)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정정(訂正) 보완되어 1486년(성종17)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책명으로 간행되었다.

문장과 그림, 글씨

그의 문장은 조부 강회백의 단려(端麗)한 글과 아버지 강석덕의 간결(簡潔)한 글과 형 강희안의 충담(沖澹)한 글을 모두 아울렀다. 그의 시문은 법식에 들어맞고, 우아하면서도 감흥이 무르익어, 조선 시대 여러 문사들 중에 가장 맑고 깨끗한 글로 꼽힌다. 이들 3대의 글을 모은 것이 『진산세고(晉山世稿)』이고, 그의 글만을 모은 것이 『사숙재집(私叔齋集)』이다.

그는 형 강희안처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소나무와 대나무를 주제로 하는 산수화를 잘 그렸고, 글씨는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썼다. 지금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일본의 오구라 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 등의 그림이 있고,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과 그의 아버지 강석덕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陜川) 홍류동(紅流洞) 체필암각(泚筆巖刻) 등의 글씨가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군(安山郡) 집곶리(戢串里)에 있는데, 신숙주가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이 남아 있다. 부인 안씨(安氏)와 합장되었는데, 안씨는 한백당(寒栢堂)안숭효(安崇孝)의 딸로서 2남 2녀를 낳았으며, 현모양처로서 칭송을 받았으므로, 강희맹이 직접 그 부인의 행장을 지었다. 조선 시대 출세한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강희안과 강희맹의 후손이 많은데, 강희안은 후손이 없었으므로, 모두 강희맹과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이에 태어난 강귀손(姜龜孫), 강학손(姜鶴孫)의 후손들이다.

관력, 행적

참고 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사숙재집(私叔齋集)』

『진산세고(晉山世稿)』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용재총화(慵齋叢話)』

『해동잡록(海東雜錄)』

『사가집(四佳集)』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