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死六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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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여섯 명의 신하.

개설

문종이 죽고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당시 정승으로 있던 김종서(金宗瑞) 일파가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였다고 본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는 1453년 이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이것을 왕위 찬탈로 본 한 무리의 신료들이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는 다수의 문무관이 연루되어 있었지만, 후대에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여섯 사람을 특히 사육신이라고 불렀다.

내용 및 특징

단종 복위를 주도한 사람이 사육신이라고 단정할 증거는 없다. 추국(推鞫) 과정에서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이 같이 모의하였다고 하였고, 박팽년은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鈴孫)·이휘(李徽)·박중림(朴仲林) 등 13인이 모의하였다고 자백하였다(『세조실록』 2년 6월 2일). 따라서 주모자임이 확실한 성삼문과 박팽년을 제외하고 사육신이 꼭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육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유래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였던 남효온은 1478년(성종 9)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성종실록』 9년 4월 15일), 이 때문에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관을 깨고 사지를 절단하는 부관능지(剖棺陵遲)의 극형을 당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1월 13일). 단종 복위 시도가 실패하여 큰 옥사가 일어나고, 단종마저 영월로 귀양 가서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주도한 복위 음모에 연루되어 죽기에 이르자(『세조실록』 3년 10월 21일), 이를 동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육신의 이름이 전해져 온 것을 문집에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육신이라는 호칭은 남효온에게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그와 함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불린 김시습(金時習)도 마찬가지였다.

변천

이후 단종 관련 사적은 윤순거(尹舜擧)가 1663년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하여 정리하였는데, 여기에는 사육신뿐 아니라 황보인·김종서 등과 김시습·남효온 등도 들어 있다. 1691년(숙종 17) 사육신을 정식으로 국가에서 공인하여 복관시키고 신위를 모실 묘우(廟宇)를 만들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숙종실록』 17년 12월 6일). 1698년(숙종 24)에는 단종이 복위되었으며(『숙종실록』 24년 11월 6일), 1711년에 『노릉지』를 보완하여 『장릉지(莊陵志)』를 편찬하였다. 1791년(정조 15)에는 범위를 넓혀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수록한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즉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비롯한 6인의 종친인 육종영(六宗英),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한 4인의 외척인 사의척(四懿戚), 황보인·김종서·정분(鄭苯) 등 3정승을 일컫는 삼상신(三相臣), 성삼문·이개·유성원·박팽년·하위지·유응부를 일컫는 육신(六臣), 민중(閔仲)·조극관(趙克寬)·김문기를 일컫는 삼중신(三重臣), 성승·박쟁의 양운검(兩雲劒) 등으로 구분하여 정단(正壇)에 배식할 인원을 32명으로 정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사육신만을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흐름을 바꾸어 군주에 대한 충성을 보다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추강집(秋江集)』
  • 김용흠, 「조선 세조대 정치를 보는 시각과 생육신」, 『역사와 현실』64, 2007.
  • 유영박, 「단종복위 모의자의 사법처리」, 『진단학보』78, 1994.
  • 이재호, 「사육신교정론의 허점」, 『한국사의 비정』, 우석,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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