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尹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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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0년(선조 33)∼1644년(인조 22) = 45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이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군옥(君玉)이고, 호는 하빈옹(河濱翁)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해숭위(海嵩尉)윤신지(尹新之)이고, 어머니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선조(宣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해창군(海昌君)윤방(尹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윤두수(尹斗壽)이다.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평생 검소하게 살았으며, 이재(吏才)에 뛰어나서 인조에게 건의한 바가 많았다. 여러 고을을 맡아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집안 배경 때문에 끊임없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肅宗)의 정비(正妃)로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김만중(金萬重)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고, 1619년(광해군 11)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0세였다.[『방목(榜目)』] 과거에 급제 한 뒤,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20년(광해군 12) 1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12년 11월 18일)

당시 조정에서는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잡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키려는 <정청운동(庭請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이에 참여하지 않는 서인(西人)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으므로, 할아버지 윤방도 벼슬에서 물러나 노량진(露粱津) 강촌(江村)에서 은거하였다. 그의 어머니 정혜옹주는 선조 때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던 신성군(信城君)의 친누이였으므로, 아버지 윤신지와 어머니 정혜옹주도 근신하기 위하여 대궐에 발걸음을 끊어버렸다. 윤지(尹墀) 또한 혼란한 정국에서 벼슬하기를 싫어하였으므로 자주 휴가를 내고 가끔 출근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대북파 집정자가 그의 불성실한 태도를 보고 공조 좌랑으로 좌천시켰다.

인조 전반기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윤지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어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윤지는 공주(公州)로 피난 가는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는데, 이때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 인조가 도성으로 돌아온 후, 3월에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12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인조실록』 2년 3월 12일),(『인조실록』 2년 12월 7일) 이후 이괄의 난에 연루된 선조의 제 5왕자 인성군(仁城君)의 처벌을 둘러싸고 대간 안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정온(鄭蘊)은 인성군의 처벌을 극력 반대하였다. 사간원 헌납윤지도 정온을 지지하고 발론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소서(小西)의 청서파(淸西派)인 사간원 사간(司諫)유백증(兪伯曾)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25년(인조 3) 2월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고, 4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3년 2월 18일),(『인조실록』 3년 4월 5일) 그때 원접사(遠接使)문례관(問禮官)에 선임되어, 의주까지 가서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 9월 이조 좌랑이 되었고, 1626년(인조 4) 3월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인조실록』 3년 9월 16일),(『인조실록』 4년 3월 22일),[『서석집(瑞石集)』 권13 「외조고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경연사오위도총부부총관세자좌부빈객부군행장(外祖考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事五衛都摠府副摠管世子左副賓客府君行狀)」 이하 「윤지행장」] 10월 이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는데, 정3품 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하여,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4년 10월 12일)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후금(後金)의 아민(阿敏)은 오랑캐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과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분조(分朝)를 맡아서 전주(全州)로 남하하였는데, 윤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세자를 배종(陪從)하였다. 전주의 분조에서는 세자시강원을 육방(六房)으로 나누었고, 윤지는 병방(兵房)을 맡았다. 정묘호란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후 윤지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으며, 사헌부 집의(執義)로 전임되었다.(『인조실록』 5년 6월 25일),(『인조실록』 5년 7월 13일) 이후 제용감(濟用監)정(正)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는데,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윤지행장」]

1628년(인조 6) 1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고, 2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인조실록』 6년 2월 8일) 이어 6월에는 병조 참의(參議)가 되어, 금위(禁衛)를 관리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6월 11일] 이때 명나라 제독(提督)모문룡(毛文龍)이 보낸 관리가 사신으로 와서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대궐 문 안으로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윤지가 대궐을 엄하게 관리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윤지행장」] 10월 인조는 “전 병조 참의윤지는 쓸 만한 재주가 있는데, 한직에 있으니 서용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인조실록』 6년 10월 2일) 그리고 의망(擬望)을 거치지 않고 특별히 윤지를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는데, 이때 사헌부에서 “단독으로 천거하여 특별히 임용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니, 명령을 거두도록 하소서”라며 반대하였으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인조실록』 6년 10월 2일),(『인조실록』 6년 10월 16일)

1629년(인조 7) 2월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로서 지제교와 경연청(經筵廳) 참찬관(參贊官)·춘추관(春秋館)수찬관(修撰官)을 겸임하였으나, 병으로 면직되었다. 3월 여가에 글을 읽고 병을 조리하기 위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자원하여 나갔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3월 17일],[「윤지행장」]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은 1630년(인조 8)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고, 형방(刑房) 승지(承旨)로서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공정하게 심문하여 관대하게 처결하였다. 승정원에서 인조의 신임을 받은 그는 차례로 승진하여, 8월에는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 12월에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인조실록』 8년 8월 1일),(『인조실록』 8년 12월 7일) 그가 승정원에 있을 때, 왕의 명령 중에 부당한 점이 있거나, 각 부처에서 심의하여 보고한 바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반복해서 논의하여 바로잡았다. 그리하여 인조가 그를 칭찬하기를, “그대 같은 사람이야 말로 왕명을 소신대로 출납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윤지행장」]

1631년(인조 9) 병조 참의에 다시 임명되자, 전국 군대의 현황을 자세히 파악하여 개선할 점을 왕에게 개진하였다. 그리고 다시 승정원 우승지로 소환되었는데, 이조 판서(判書)김상용(金尙容)이 직언을 잘하는 언관(言官)을 요직에 추천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윤지가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왕을 설득하여 김상용을 구원하였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전임되었는데, 대간의 김세렴(金世濂)이 직언을 하다가 처벌 받자, 여러 차례 계청(啓請)하여 이를 구원하였다. 1632년(인조 10)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윤지행장」]

1633년(인조 11)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오랫동안 출사(出仕)하지 못하여 해임되었다.(『인조실록』 11년 3월 25일) 그는 전에 남양부사로 부임하였을 때 제대로 지방 행정을 베풀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때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임명되면서 몸을 조리하며 평소 구상했던 대로 지방 행정을 베풀었다. 우선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 4조목을 본떠서 백성들에게 상부상조(相扶相助)하고 예의 바른 풍속을 권장하는 여러 가지 규범을 제정하였으며, 마을마다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배치하여 이를 가르치고 규찰하게 하여 유교의 도덕 정신을 함양하게 하였다. 또 부병(府兵) 3천 명을 징발하여 새로 대오(隊伍)를 짰는데, 이웃집 5가(家)의 1린(隣)을 1오(伍)로, 한 마을 1리(里)를 1대(隊)로 하여, 거주지 중심으로 군사 편제를 개편한 결과, 전군이 노약자에서 장정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순찰사(巡察使)이성구(李聖求)가 수원부사윤지의 향약 제도를 보고 감탄하여 그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윤지행장」]

1635년(인조 13) 1월 총융사(摠戎使)구굉(具宏)이 수원부사윤지의 군사 편제 개혁을 극구 칭찬하고 왕에게 장계(狀啓)하였다. 2월 인조는 그의 업적을 포상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3년 2월 19일] 이어 그해 3월 이조 참판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 13년 3월 4일) 그 뒤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성산현감(星山縣監)윤선도(尹善道)가 탐욕을 부리고 방자하다고 탄핵하여, 파직시켰다.(『인조실록』 13년 7월 19일),[「윤지행장」] 1636년(인조 14) 2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는데, 명나라 감군(監軍)황손무(黃孫茂)가 사신으로 조선에 오자,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안주로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였다.(『인조실록』 14년 2월 11일) 이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어 태학(太學)의 생도들에게 짜임새 있게 학문을 계도(啓導)하기도 하였다.

인조 후반기 활동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여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팔기병(八旗兵) 10만여 명을 거느리고 불과 며칠 만에 서울 근교로 육박하였으므로,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서둘렀다. 그때 윤지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성균관으로 달려가니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기숙하던 유생(儒生)들이 이미 흩어져 도망간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생원(生員)우정(禹鼎) 등과 같이 양무(兩廡)의 위판位版)을 정리하여 뒷산 기슭의 정결한 곳에 안치해 놓고, 5성(五聖)과 10철(十哲)의 위판은 상자 속에 넣어 말에 싣고 장무관(掌務官)이박(李舶)과 같이 인조가 머물던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하였다. 청나라 군사의 선봉대가 이미 도성에 다가왔으므로, 인조는 어가(御駕)를 돌려 수구문(水溝門)을 통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에 성균관 대사성윤지가 위판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매월 초하루 보름에 빠지지 않고 향불을 피우며 예를 행하였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윤신지는 왕명을 받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및 봉림대군(鳳林大君) 등과 함께 강화도로 먼저 피난을 갔다. 그 뒤를 이어 묘사(廟社 : 종묘사직)의 제조(提調)가 된 할아버지 윤방이 종묘의 신주(神主) 40여 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강화도에 분사가 설치되자 할아버지 윤방이 분사의 대신이 되었으며, 아버지 윤신지는 소모대장(召募大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죽산진에 주둔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막냇동생 예친왕(睿親王) 돌곤에게 군사 3만여 명을 주고 강화도를 점령하게 하였는데, 돌곤이 삼판선(三板船) 80척에 군사를 나누어 태우고 홍이포(紅夷砲)를 쏘며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강화성을 포위한 채로 봉림대군에게 화의를 요구하였다. 이에 할아버지 윤방은 봉림대군의 명령을 받고 오랑캐 진영으로 들어가서 돌곤과 교섭하였으며, 이후 봉림대군이 성문을 열고 돌곤을 맞아들였다.

1637년(인조 15) 2월 남한산성의 인조도 오랑캐와 강화를 맺고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청나라에서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요구하였는데, 윤지가 세자 빈객(賓客)에 임명되어 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된 뒤에 그 곳에 있던 할아버지 윤방과 아버지 윤신지와 소식이 끊어졌으므로, 윤지는 박절한 심정을 왕에게 호소하였고, 그 정상을 딱하게 여긴 인조가 세자 빈객을 교체하도록 하였다. 당시 오랑캐 군대가 강나루를 가로막고 곳곳에서 사람들을 사로잡은 후 물건을 노략질하였으나, 그는 단기(單騎)로써 용감하게 오랑캐의 진영을 뚫고 강화도로 건너가 섬을 이리저리 전전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결국 찾아내 모두 만나게 되었다.[「윤지행장」]

2월 홍문관 부제학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사양하는 상소를 거듭 올린 끝에 해직되었다.[「윤지행장」] 그 뒤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경연청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윤 4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사간원 대사간서경우(徐景雨)와 함께 양사(兩司)에서 강화도가 함락된 책임이 분사의 검찰(檢察)김경징(金慶徵)에게 있다며 그를 탄핵하고, 변방에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다.(『인조실록』 15년 윤4월 21일) 그러나 전 판서김시양(金時讓)은 차자(箚子)를 올려 김경징의 죄에 대하여 법을 적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이어 사헌부 대사헌윤지는 김시양의 배척을 받고 사임하여 체직되었으며, 김경징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인조실록』 15년 윤4월 29일)

그해 5월 윤지가 외직으로 나갈 것을 청원하였는데, 이조에서 그를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임명하였으나, 6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충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그리고 9월에 동생 윤구(尹坵)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어머니 정혜옹주가 몸져눕고, 아버지 윤신지는 비통에 잠겨 있었으므로, 그는 부모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당시 그는 연달아 병조 정랑과 예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는데, 청나라 조사(詔使)를 마중하는 문례관(問禮官)에 임명되자 억지로 나가서 청나라 사신을 영송(迎送)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 날마다 경연에서 왕을 배석하여 명백하고 유창하게 강론하여, 왕을 계도한 바가 많았다.[「윤지행장」]

1638년(인조 16) 6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인조실록』 16년 6월 25일) 그때 할아버지 윤방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모시고 간 종묘의 신위 40여 주 가운데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위를 분실하였다고 대간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때 사헌부 대사헌유백증(兪伯曾)이 윤방과 윤지를 아울러 공격하였으므로, 윤지는 속죄의 뜻으로 전라도관찰사를 사직하겠다고 계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오히려 그를 변호하고, 도리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바꾸어 임명하였다.[「윤지행장」] 그러나 그때 마침 윤지가 학질을 심하게 앓았으므로 여러 차례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 그 뒤 세자 빈객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더욱 더 심해졌고, 이에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해 11월에 어머니 정혜옹주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고, 몹시 슬퍼하는 아버지를 곁에서 보살폈다.

어머니의 상례를 끝마친 뒤, 1641년(인조 19) 1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나, 몸이 몹시 야위어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므로, 2월에 다시 세자시강원 좌부빈객(左副賓客)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9년 1월 18일),(『인조실록』 19년 2월 11일) 이때 아버지 윤신지가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하여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조가 이를 허락하였다.(『인조실록』 19년 3월 2일) 사헌부 장령(掌令)홍무적(洪茂績)이 윤지가 죄를 회피하였다고 탄핵한 후 먼 곳으로 유배시킬 것을 청하니, 처음에 인조는 파직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다시 탄핵하자 관작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가, 결국 유배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그해 3월 전라도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으나, 겨우 한 달이 지난 4월 인조는 국법대로 이미 시행하였다면서 그를 특별히 사면하였다.(『인조실록』 19년 3월 6일),(『인조실록』 19년 4월 24일) 이것은 인조가 본래 그를 처벌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지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윤신지의 병을 간호하였다. 이때 대문을 닫고 조용히 방안에 앉아 서예에 몰두하면서 서적을 읽고 한가롭게 살며 벼슬살이 할 생각을 버렸다. 그는 병으로 몸이 더욱 수척해졌으나, 자기 자신의 병보다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려고 애를 썼다.

1644년(인조 22) 병이 점차 위독해져 그해 4월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의 나이가 45세였다.(『인조실록』 22년 4월 8일) 한편 그는 글씨에 뛰어났으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유고(遺稿)도 문집(文集)으로 간행하지 못하였다.

성품과 일화

윤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청렴한 데다 평소에 근신하여, 몸가짐에 태만한 빛을 띠거나 입 밖으로 비루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몸이 수척하여 옷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여위었으나, 마음은 강직하고 방정하여 남에게 굽히거나 흔들린 바가 없었다. 그는 항상 “평생 동안 내가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신조뿐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여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할아버지 윤방에게 가학(家學)을 배웠는데, 학업이 날로 진취하니, 윤방이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 윤지가 어렸을 때 어머니 정혜옹주가 부마인 해숭위윤신지와 함께 궁중에 들어가 아버지 선조를 알현하였다. 선조는 어린 외손자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관상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 아이는 정신과 골격이 해맑으므로 장차 청렴하고 고귀한 명성을 날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겠지만, 수명이 길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는데, 과연 선조의 예언대로 선조의 외손자 윤지는 45세 밖에 살지 못하였다.[「윤지행장」]

윤지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길 때, 공적인 일이 없으면 일찍 퇴청(堆淸)하여 아버지 해숭위윤신지와 어머니 정혜옹주를 모시고, 온화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안색으로 그 뜻을 맞추어 드리려고 애썼다. 간혹 출사(出仕)하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부모 슬하에서 동생 윤구와 함께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으므로, 해숭위윤신지와 정혜옹주도 아들 형제가 곁에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하였다. 윤지와 그 동생 윤구는 서로 우애가 깊어서 이웃에 살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로 만나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삼았다.

1637년(인조 15) 9월 동생 이조 좌랑윤구가 32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더났다. 형 윤지는 크게 슬펐으나,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어머니 정혜옹주를 간호하느라 크게 울지도 못했는데, 그는 종신토록 일찍이 세상을 떠난 동생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윤지행장」]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 정혜옹주는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워 지내다가 마침내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1638년(인조 16) 11월 윤지의 나이 40세 때 어머니 정혜옹주의 상을 당하였고, 윤지는 너무나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느라고 마음 놓고 울지 못하였다. 상례가 끝난 다음에 비록 상복(喪服)을 벗었지만,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애써 주시던 모습을 생각하거나,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과 물건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슬픔이 가시지 않아 눈물을 펑펑 흘리고 울었다. 그는 병을 앓는 아버지 해숭위윤신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전라도 부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도 인조는 윤지가 아버지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는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한 달 만에 그를 사면해 주었다.

그는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 세력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주장하였으나, 남의 숨은 죄악을 들추어내서 정직한 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의 측근에 있을 때에는 온화한 기색과 간절한 언어로 왕에게 건의하였으므로, 충분히 왕을 감동시켜서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가 건의한 내용이 세상에 다 전해지지 않았으나, 인조가 “윤지는 왕명의 출납을 소신껏 했다고 이를 만하다”고 칭찬한 것을 보면, 그가 신하로서 임금을 얼마나 잘 보필하였는지 알 수 있다. 고을과 군영(軍營)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치적이 뛰어났으므로, 평소 자기의 재능과 이치(吏治)에 대하여 자부하던 사람들도 모두 뒷전으로 물러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또 일찍부터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평소에 검소하고 청렴하였다. 의복이나 기물이 빈한한 선비의 집처럼 허술하였고, 거처하는 집도 비좁아 항아리·도마·궤짝 등을 가져다 놓을 자리가 없었다. 세상의 화려한 것과 풍요로운 것들과는 담을 쌓고 지냈는데, 의리에 맞지 않으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며, 노복이나 전답(田畓)을 늘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의 집에 가본 사람들은 “집안에 아무런 물건이 없고 벽만 우뚝 서 있는데, 지나다니는 처자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였다”고 회고하였다.[「윤지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평안도 삭녕군(朔寧郡) 가재동(佳哉洞)에 있는데, 외손자인 김만기가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윤지행장」]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관찰사(觀察使)홍명윤(洪命允)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사촌인 윤점(尹坫)의 3남 윤세흥(尹世興)을 양자로 삼았다. 1녀는 생원(生員)김익겸(金益謙)에게 시집갔다. 김익겸의 두 아들이 숙종의 국구(國舅) 김만기와 공조 판서김만중이다. 소실에서 난 아들 윤세번(尹世藩)은 진사(進士)이다.[「윤지행장」]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묵재일기(黙齋日記)』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안락당집(顔樂堂集)』
  • 『오리집(梧里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지천집(遲川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창주유고(滄洲遺稿)』
  • 『서석집(瑞石集)』
  • 『수곡집(壽谷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만오집(晩悟集)』
  • 『현주집(玄洲集)』
  • 『묵수당집(嘿守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