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조(分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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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 거느리는 조정 외에 전시 등 위급한 상황에서 따로 설치한 작은 조정.

개설

1592년(선조 25) 일본의 침략을 맞아 선조는 전세가 갈수록 악화되자 자신은 요동(遼東)으로 옮겨갈 생각을 하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조선에 머물도록 하면서 조정을 나누었다. 이후 선조가 머물렀던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를 원조정(元朝廷) 또는 대조(大朝)라 하고, 세자가 거느린 조정을 분조 또는 소조(小朝)라고 불렀다.

내용 및 특징

1592년 4월 30일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5월 1일 개성에 도착하였다. 5월 3일 도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개성을 떠나 4일 평산, 5일 봉산, 6일 황주를 거쳐, 7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갈수록 전세는 악화되었고, 6월 10일 다시 평양을 버리고 12일 안주성(安州城)을 지나 13일 영변에 도착했다. 영변에서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임시로 국사를 처리토록 하였고(『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자신은 요동으로 향하겠다며 광해군에게 분조를 이끌 것을 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그리고 선조는 선군(先君)을 위해 주선하는 일과 명에 청병하는 일만을 맡겠다며 그 외의 일들을 분조에서 처리케 하였다[『선조실록』(한 칸 띄움)25년 10월 20일 3번째기사].

분조는 기존 비변사와 호종하는 신하들을 나누어 분비변사(分備邊司)와 분조신(分朝臣)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분조의 총책임자인 권섭국사(權攝國事)에 임명된 광해군은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일본군에게 빼앗긴 영토 회복과 국가 부흥을 위한 제반 업무를 맡았다. 군사조직은 호위군인 의용대(義勇隊)와 관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592년 6월 영변에서 분조를 형성한 광해군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의병 활동을 격려하는 등 전란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천에 일본군이 출몰하자 분조를 평안도 성천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했다.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고, 이틀 후인 20일 정주에 있던 광해군은 선조를 맞이하였다. 이로써 분조신 대부분은 원래 소속 기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신하들은 선조가 친정할 것을 주장했다(『선조실록』 26년 1월 22일). 이는 사실상 분조의 폐지를 건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조는 왕위를 광해군에게 넘겨줄 것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분조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2월에도 신하들은 분조의 설치는 부득이한 것이며 임시방편적인 것인 만큼 분조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선조실록』 26년 2월 2일), 이후 지속적으로 분조의 폐지를 건의했다. 하지만 17일 선조는 가산으로 향하면서 광해군에게는 정주에 남아 종묘사직을 받들게 하여 사실상 분조를 그대로 두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17일).

1593년 윤11월 광해군이 도성에 돌아오면서 분조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8일). 하지만 광해군은 다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돌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광해군은 분조 활동 등을 통해 군량과 말먹이를 모아 전선에 보급하고, 의병 봉기를 독려했다. 도성 수복 이후에는 군수지원뿐 아니라 군사훈련, 무기제조, 축성 등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하여 전란 극복에 최선을 다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분조 활동을 함께 펼친 80명을 위성공신(衛聖功臣)으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위성공신 역시 삭탈되었다.

변천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정엽(鄭曄)은 분조 설치를 건의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7일). 하지만 인조는 세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627년 후금의 침략을 맞아 강화도로 피난을 가던 인조에게 이귀(李貴)는 세자가 분조를 거느리고 남쪽 지역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건의했다(『인조실록』 5년 1월 18일). 결국 세자는 전주로 내려가 무군사(撫軍司)를 개설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이 침략하자 신하들은 다시 분조 설치를 건의했다(『인조실록』 14년 12월 13일).

분조는 일본의 침략이라는 전시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이후 국난 극복 때마다 분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것 같다. 때문에 인조대 여진족의 침략을 받자 다시 분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남도영, 「임진왜란시 광해군의 활동 연구」, 『국사관논총』9, 국사편찬위원회, 1989.
  • 성당제, 「정묘호란시 소현분조와 세자의 역할-『소현분조일기』를 중심으로-」, 『규장각』31,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손종성, 「임진왜란시 분조에 관한 소고」, 『계촌민병하교수정년기념 사학론총』, 계촌민병하교수정년기념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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