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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윤비경은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경억 등과 함께 윤선도의 상소에 음흉한 의도가 있다며 맹렬히 공격하면서, 윤선도를 파면시키고 귀양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두 명의 대신들이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윤비경은 그 대신들도 아울러 배척하였다. 현종이 매우 노하여 특별히 엄하게 윤비경을 처벌하라고 명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집요한 구원에 힘입어 견책을 당하는 정도에서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에 현종이 [[경연(經筵)]]에서 말하기를, “윤비경의 말이 정직한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가 대신들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대신의 체면도 아울러 생각했을 뿐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윤비경은 서인의 극렬한 논객으로 인식되어 사헌부의 관직에 여러 번 추천되었으나, 끝내 현종의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윤비경비명」] | 이때 윤비경은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경억 등과 함께 윤선도의 상소에 음흉한 의도가 있다며 맹렬히 공격하면서, 윤선도를 파면시키고 귀양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두 명의 대신들이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윤비경은 그 대신들도 아울러 배척하였다. 현종이 매우 노하여 특별히 엄하게 윤비경을 처벌하라고 명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집요한 구원에 힘입어 견책을 당하는 정도에서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에 현종이 [[경연(經筵)]]에서 말하기를, “윤비경의 말이 정직한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가 대신들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대신의 체면도 아울러 생각했을 뿐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윤비경은 서인의 극렬한 논객으로 인식되어 사헌부의 관직에 여러 번 추천되었으나, 끝내 현종의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윤비경비명」] | ||
− | 제 2차 예송 논쟁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며느리의 상례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다. 이때 서인 송시열·김수항( | + | 제 2차 예송 논쟁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며느리의 상례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다. 이때 서인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은 8개월 상복을 입는 대공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허적·윤휴 등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은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복을 채택하고 서인 김수항 등을 귀양 보냈다. 그 결과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축출되었으며, 이것을 갑인예송이라고도 부른다. |
갑인예송 때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제 1차 예송 논쟁인 기해예송 때 귀양을 갔다가 죽은 윤선도를 신원하고, 그를 비난하거나 탄핵한 서인의 인사들을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1676년(숙종 2) 3월 승정원에서 기해예송 당시 윤선도를 체포하여 국문하기를 청한 대관 가운데 가장 극렬하게 윤선도를 비방한 윤비경과 이경억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심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03005_004 『숙종실록』 2년 3월 5일]) 이때 윤비경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정권을 잡은 남인 중에서 전에 대간에서 윤비경과 함께 일한 자들이 그의 정직함을 알고 적극 변호하여 주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윤비경비명」]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복제 문제로 인한 당쟁은 끊이지 않았으므로, 1679년(숙종 5) 3월 숙종은 예론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을 역률(逆律)로써 엄격히 금지하면서 예송논쟁은 끝이 났다. | 갑인예송 때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제 1차 예송 논쟁인 기해예송 때 귀양을 갔다가 죽은 윤선도를 신원하고, 그를 비난하거나 탄핵한 서인의 인사들을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1676년(숙종 2) 3월 승정원에서 기해예송 당시 윤선도를 체포하여 국문하기를 청한 대관 가운데 가장 극렬하게 윤선도를 비방한 윤비경과 이경억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심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03005_004 『숙종실록』 2년 3월 5일]) 이때 윤비경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정권을 잡은 남인 중에서 전에 대간에서 윤비경과 함께 일한 자들이 그의 정직함을 알고 적극 변호하여 주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윤비경비명」]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복제 문제로 인한 당쟁은 끊이지 않았으므로, 1679년(숙종 5) 3월 숙종은 예론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을 역률(逆律)로써 엄격히 금지하면서 예송논쟁은 끝이 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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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소정(昭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고곡리(古谷里)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비경비명」] |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고곡리(古谷里)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비경비명」] | ||
− | 부인 한산 이씨( | + |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좌랑이구연(李九淵)의 딸이다. 1665년(현종 6) 1월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장례를 치르기 전에 집에 불이 나면서 빈소에까지 불이 번졌다. 그의 아내가 불길을 무릅쓰고 뛰어 들어가서 시어머니의 관을 구했으나,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하루 만에 죽었다. 한성부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자, 현종이 쌀과 베를 내려주어 그 장례를 돕게 하였고, 이듬해 정문(旌門)을 세워 윤비경의 아내를 표창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0601007_004 『현종실록』 6년 1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ra_10712026_001 『현종실록』 7년 12월 26일]) |
− |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명우(尹明遇)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고, 차남 [[윤명운(尹明運)]]은 신녕현감(新寧縣監)을 지냈으며, 삼남은 이명원( | + |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명우(尹明遇)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고, 차남 [[윤명운(尹明運)]]은 신녕현감(新寧縣監)을 지냈으며, 삼남은 이명원(李明遠)이다. 딸은 찰방송기학(宋基學)에게 시집갔다.[「윤비경비명」] 신녕현감을 지낸 차남 윤명운은 그 업적이 뛰어나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으나, 숙종이 수령관의 생사당을 금지하면서 이를 허물었다. 그러나 38년 뒤에 노론의 중진들이 그 자리에 다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가 지방관으로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였다. 그는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에 제일가는 수령관이었다. 한편 윤명운의 아들인 윤봉구(尹鳳九)와 윤봉오(尹鳳五)는 각각 공조 [[판서(判書)]]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지냈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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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비경 |
한글표제 | 윤비경 |
한자표제 | 尹飛卿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숙종 |
집필자 | 최양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비경(尹飛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즉위년 7월 14일, 『현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현종개수실록』 1년 4월 21일, 『현종개수실록』 1년 5월 28일, 『현종실록』 1년 9월 3일, 『현종실록』 1년 11월 22일, 『현종개수실록』 2년 윤7월 8일, 『현종실록』 2년 윤7월 10일, 『현종개수실록』 3년 1월 15일, 『현종실록』 5년 7월 4일, 『현종개수실록』 9년 1월 10일, 『현종개수실록』 9년 6월 17일, 『현종실록』 10년 8월 15일, 『현종개수실록』 11년 8월 29일, 『숙종실록』 2년 3월 5일, 『숙종실록』 2년 3월 5일, 『현종개수실록』 1년 5월 28일, 『현종실록』 6년 1월 7일, 『현종실록』 7년 12월 26일 |
총론
[1607년(선조 40)∼1680년(숙종 6) = 74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때의 문신. 호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자는 충거(冲擧)이며, 파원군(坡原君)에 봉해졌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윤유건(尹惟健)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직장(直長)권급(權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지낸 윤홍립(尹弘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형조 참판(參判)을 지낸 윤인함(尹仁涵)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집안이 가난하여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이민구를 찾아가 글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고 문음(門蔭)으로 순릉(順陵) 재랑(齋郞)이 되었으나, 얼마 후 사직하고 돌아왔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9 「호조참판윤공신도비명(戶曹參判尹公神道碑銘)」 이하 「윤비경비명」으로 약칭] 1650년(효종 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4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한 공로로, 저작(著作)을 거쳐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 외직으로 나가서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가 되었다가 교체되어 들어온 후에는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또 외직으로 나가서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윤비경비명」] 이듬해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을 때 남인(南人) 재상의 첩실 집안에서 횡포를 부리자, 그가 대간(臺諫)에서 발론(發論)하여 그들을 체포한 후 죄를 다스렸다. 이때부터 윤비경(尹飛卿)은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의 양사(兩司)를 떠나지 않고 주로 대간으로 활동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서인(西人)을 지지하였으므로, 서인의 입장을 앞장서서 대변하였다. 이때 그는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한 땅을 혁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윤비경비명」]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7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그해 8월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현종실록』 즉위년 7월 14일),(『현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이때 세상을 떠난 효종(孝宗)의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복제(服制) 문제를 놓고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불리는 <제 1차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의 서인은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 등의 남인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윤비경은 남인 윤선도에 대하여 “예론(禮論)을 거짓으로 핑계대고 서인을 타도하려는 흉계입니다”라고 극론하며, 그를 체포하여 국문하고 귀양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현종개수실록』 1년 4월 21일) 결국 영의정정태화(鄭太和)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시왕지제(時王之制)」에 있는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母爲子服朞]’는 조문에 따라 기년복을 채택하였다. 그러면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귀양을 갔다.
1660년(현종 1) 5월 윤비경이 사헌부 장령으로서 남원부사(南原府使)홍주일(洪柱一)을 탄핵하고자 사헌부 지평심재(沈梓)와 의논하였다. 그러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두 사람이 모두 인피(引避)하였는데,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채유후(蔡裕後)의 건의로 윤비경과 심재 두 사람 모두 파면되었다.(『현종개수실록』 1년 5월 28일) 이것은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해 8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11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현종실록』 1년 9월 3일),(『현종실록』 1년 11월 22일) 1661년(현종 2) 윤7월 효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에 윤비경은 독축관(讀祝官)에 임명되어 부묘도감(祔廟都監)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이 일이 모두 끝난 후 제관(祭官)들을 포상할 때, 제10실 대축(大祝)이었던 윤비경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현종개수실록』 2년 윤7월 8일),(『현종실록』 2년 윤7월 10일)
1662년(현종 3) 1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664년(현종 5) 7월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다.(『현종개수실록』 3년 1월 15일),(『현종실록』 5년 7월 4일) 이후 노환 중인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외직을 자원하여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으나, 1665년(현종 6) 1월 모친상을 당하면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여막을 짓고 죽을 먹으며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 대로 따르다가, 건강을 많이 해쳐서 죽을 뻔하였다. 1668년(현종 9) 1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고, 그해 6월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 되었다.(『현종개수실록』 9년 1월 10일),(『현종개수실록』 9년 6월 17일) 1669년(현종 10) 8월 남인의 영수 좌의정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병조 참의윤비경이 간리(奸吏)들의 속임수에 빠져서 유생들을 포보(砲保)에서 빼주게 하였습니다. 엄중한 형벌로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현종(顯宗)이 그를 파면하였다.(『현종실록』 10년 8월 15일) 그러나 곧 다시 소환되어, 1670년(현종 11) 공조 참의가 되었다.(『현종개수실록』 11년 8월 29일)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회양은 지역이 궁벽하여 조용하게 벼슬살이를 할 만하다고 여겨 마침내 부임하였다.[「윤비경비명」]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송시열 등의 서인들은 8개월간 상복을 입는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윤선도 등의 남인들은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대립하였다. 결국 남인의 기년복이 채택되면서 남인이 집권하고 서인이 숙청되었는데, 이것이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 불리는 <제 2차 예송 논쟁>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하였는데, 회양부사였던 윤비경은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왔다. 제 2차 예송 논쟁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의 윤휴·허적 등은 제 1차 예송 논쟁 당시 서인 송시열과 격론을 벌이다가 패배한 후, 귀양을 가서 죽은 윤선도의 죄명을 벗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높은 관직을 추증하였다. 그리고 1676년(숙종 2) 3월에는 승정원에서 제 1차 예송 논쟁 때 대관 가운데 가장 극렬하게 윤선도를 비방한 윤비경과 이경억(李慶億)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심문하였다.(『숙종실록』 2년 3월 5일) 그러나 남인의 영수 허목(許穆)과 허적 등은 서인의 송시열처럼 고집스럽게 반대파를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비경은 파직만 당하고 무사할 수 있었다.[「윤비경비명」]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면서 영의정허적 등이 죽음을 당하였고, 남인들도 모조리 추방되면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당시 숙종은 서인들을 모아서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윤비경이 윤인함(尹仁涵)의 적장손이라고 하여 파원군(坡原君)에 봉하였다. 그러면서 윤비경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랜 칩거 생활 동안 집안은 궁핍해지고 몸이 이미 쇠약해지는 바람에, 그해 12월 29일 지병으로 서울 본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4세였다.[「윤비경비명」]
예송논쟁과 노론 윤비경
제 1차 예송 논쟁은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이 즉위한 후, 효종의 상례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복제 문제를 놓고 일어난 논쟁이다. 당시 서인 송시열·송준길 등은 1년 상복을 입는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윤선도·윤휴 등은 3년 상복을 입는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송시열의 의견을 따라 기년복을 채택하면서, 남인 윤선도를 삼수로 귀양 보냈다. 그 결과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축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기해예송이다.
기해예송 때 윤선도가 상소하여 송시열을 비난하기를, “종통(宗統)이 명확하지 못하고 군지(群志)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고 극언하였다. 이것은 송시열의 기년복에 대한 주장을 종법의 왕위 계승권과 연결시키면, 효종의 종통이 애매하게 되면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그의 자손들만이 적통이 되므로,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의 3왕자 중에서 아직 살아 있던 셋째 아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송시열의 기년복에 대한 주장이 자칫 효종의 왕위 계승이 종법상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자, 서인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윤선도의 이론을 극력 배척하였다.
이때 윤비경은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경억 등과 함께 윤선도의 상소에 음흉한 의도가 있다며 맹렬히 공격하면서, 윤선도를 파면시키고 귀양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두 명의 대신들이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윤비경은 그 대신들도 아울러 배척하였다. 현종이 매우 노하여 특별히 엄하게 윤비경을 처벌하라고 명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집요한 구원에 힘입어 견책을 당하는 정도에서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 뒤에 현종이 경연(經筵)에서 말하기를, “윤비경의 말이 정직한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가 대신들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대신의 체면도 아울러 생각했을 뿐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윤비경은 서인의 극렬한 논객으로 인식되어 사헌부의 관직에 여러 번 추천되었으나, 끝내 현종의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윤비경비명」]
제 2차 예송 논쟁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며느리의 상례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다. 이때 서인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은 8개월 상복을 입는 대공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허적·윤휴 등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은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복을 채택하고 서인 김수항 등을 귀양 보냈다. 그 결과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축출되었으며, 이것을 갑인예송이라고도 부른다.
갑인예송 때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제 1차 예송 논쟁인 기해예송 때 귀양을 갔다가 죽은 윤선도를 신원하고, 그를 비난하거나 탄핵한 서인의 인사들을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1676년(숙종 2) 3월 승정원에서 기해예송 당시 윤선도를 체포하여 국문하기를 청한 대관 가운데 가장 극렬하게 윤선도를 비방한 윤비경과 이경억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심문하였다.(『숙종실록』 2년 3월 5일) 이때 윤비경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정권을 잡은 남인 중에서 전에 대간에서 윤비경과 함께 일한 자들이 그의 정직함을 알고 적극 변호하여 주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윤비경비명」]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복제 문제로 인한 당쟁은 끊이지 않았으므로, 1679년(숙종 5) 3월 숙종은 예론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을 역률(逆律)로써 엄격히 금지하면서 예송논쟁은 끝이 났다.
예송논쟁은 종법의 적용 범위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일어난 논쟁으로 결국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종법은 성리학의 기본사상이고 왕위계승의 원칙이었다. 그러므로 송시열·송준길 등의 정통 주자학파는 주자학의 근간을 이루는 종법을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하는 예절의 불변성을 강조하였으나, 윤선도·윤휴 등의 주자학 비판론자들은 천명(天命)을 받은 국왕의 왕권을 예외로 인정하는 예절의 가변성(可變性)을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의 사상적 배경을 본질적으로 논하면, 서인은 신하들의 신권(臣權)을 강조하였으나, 남인은 국왕의 왕권(王權)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종 때에는 청(淸)나라로부터 송시열의 권위가 왕권을 제압한다는 비판까지 받았는데, 이에 분개한 숙종이 즉위 후 왕권을 주장하는 남인과 손을 잡고 마침내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다.
성품과 일화
윤비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유명한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일찍이 영예(英譽)를 드날렸으나, 성품이 담박하고 스스로 정의를 지키면서 남과 교유(交遊)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벼슬에 등용되었다가, 초야에 버려졌다가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윤비경비명」]
어렸을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장차 윤씨 가문을 크게 빛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부지런히 글공부를 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하였으므로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지으며 공부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민구를 찾아가서 글을 배웠으므로, 이민구의 아버지 이수광을 자주 만났는데, 이수광은 어린 윤비경을 사랑하여 글을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윤비경이 글을 지을 때마다 이수광이 옆에서 글을 읽어보고 무릎을 치면서, “기재(奇才)로다. 정말 기재로다” 하고, 감탄하기를 거듭하였다고 한다.[「윤비경비명」]
1660년(현종 1) 5월 윤비경이 사헌부 장령으로서 남원부사홍주일을 탄핵하기 위하여 사헌부 지평심재에게 서찰을 보내 탄핵 문제를 의논하니, 심재가 대답하기를, “대사헌과 서로 만나서 상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논해서 조처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찰을 왕래한 것이 두서너 번이나 되었으나 심재가 자꾸 미루자, 장령윤비경은 하관(下官)에게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여 인피하였고, 심재도 뒤따라 인피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채유후가 처치하기를, “홍주일이 청로(淸路)에 저지당하였으나, 이재(吏才)는 아깝습니다. 그가 부임한 뒤에 논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논하는 방도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도리이기는 하지만, 동료가 서찰로 통보하였는데도 억지로 지연시키면서 기다리게 한 것도 모두 잘못한 처사이니, 모두 체차(遞差)시키소서” 하니, 현종이 윤비경과 심재를 모두 파면하였다.(『현종개수실록』 1년 5월 28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고곡리(古谷里)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비경비명」]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좌랑이구연(李九淵)의 딸이다. 1665년(현종 6) 1월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장례를 치르기 전에 집에 불이 나면서 빈소에까지 불이 번졌다. 그의 아내가 불길을 무릅쓰고 뛰어 들어가서 시어머니의 관을 구했으나,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하루 만에 죽었다. 한성부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자, 현종이 쌀과 베를 내려주어 그 장례를 돕게 하였고, 이듬해 정문(旌門)을 세워 윤비경의 아내를 표창하였다.(『현종실록』 6년 1월 7일),(『현종실록』 7년 12월 26일)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명우(尹明遇)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고, 차남 윤명운(尹明運)은 신녕현감(新寧縣監)을 지냈으며, 삼남은 이명원(李明遠)이다. 딸은 찰방송기학(宋基學)에게 시집갔다.[「윤비경비명」] 신녕현감을 지낸 차남 윤명운은 그 업적이 뛰어나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으나, 숙종이 수령관의 생사당을 금지하면서 이를 허물었다. 그러나 38년 뒤에 노론의 중진들이 그 자리에 다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가 지방관으로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였다. 그는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에 제일가는 수령관이었다. 한편 윤명운의 아들인 윤봉구(尹鳳九)와 윤봉오(尹鳳五)는 각각 공조 판서(判書)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지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시남집(市南集)』
- 『식암유고(息庵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