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보(砲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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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훈련도감의 운영을 위하여 설정한 군보.

개설

조선전기 중앙의 군사제도인 오위제(五衛制)가 임진왜란으로 그 취약성이 드러남에 따라 새로운 군사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이미 병사들에게 각종 화포 및 방패·전차·창검 등을 익히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총포를 사용하는 포수(砲手), 활을 쓰는 사수(射手), 창검을 쓰는 살수(殺手)와 같은 전문 군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이들 삼수(三手)는 급료를 받으며 장기적으로 번을 서는 전문 군병이었다. 이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삼수량(三手糧)이라는 토지세가 추가로 생겨났다. 또 포보(砲保)·향보(餉保) 등을 설정해 군포를 수취하여 훈련도감 운영 경비에 충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포보는 광해군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포보가 설정되었고, 초기에는 한 해에 1보당 포 3필을 거두었다. 그러나 포보가 다른 보인보다 역이 무겁다는 이유로 1662년(현종 3)에 2필로 줄여 주었고, 영조대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다시 1필을 감해 주었다.

포보는 당해 10월 이내에 목(木)·포(布)·전(錢)의 형태로 가포(價布)를 상납하였다. 포보가 납부한 가포는 대개 삼수병의 의복 비용으로 쓰였다. 포보가 상납한 목·포·전의 총수는 목 712동(同) 20필(匹), 포 25동, 전 72,160냥이었다. 포 1필이 감해진 뒤의 부족액은 균역청에서 대신 지급하였다.

삼수병의 수는 유사당상(有司堂上)이덕형(李德馨)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000명 내외였던 것 같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포수는 2,440명, 살수는 73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포보는 1662년에 19,690여 명이었던 것이, 1732년(영조 8)에는 36,82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때에 37,000명으로 수를 제한하였다. 실제로 『만기요람』에 나타난 포보의 수를 집계해 보면, 경기 2,746명, 해서 8,710명, 호서 6,672명, 호남 8,773명, 영남 7,040명, 관동 3,253명 등 총 37,194명으로 책정되었다.

변천

포보는 훈련도감의 재정 부족을 호소하면서 거론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호조가 훈련도감의 삼수량으로 1년에 받아들이는 것이 28,000여 석인데, 그해 재정이 완전히 바닥이 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훈련도감의 비용을 호조에 지속적으로 떠넘기는 것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재원 마련을 위하여 호조가 삼도(三道)의 삼수량을 토지 매 1결마다 쌀 3승 혹은 2승을 더 거두어 지출에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방책을 건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훈련도감의 둔전을 설치하고 혹 차인(差人)을 시켜 무판(貿販)하게 한 것은 이러한 때의 수용(需用)을 위한 것이니 결코 민결(民結)에서 더 거두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 8월 25일 5번째기사]. 1665년(현종 6)에는 포보 상납액 3필 중 1필을 줄여 주고, 그에 따라 모자라는 액수를 호조에서 대신 지급하도록 청하였다(『현종실록』 6년 10월 23일).

한편, 훈련도감 소속 군병의 증액에도 포보가 동원되었다. 1674년(현종 15)에는 훈련대장유혁연(柳赫然)의 건의에 따라 경기의 포보 중 건장한 자들을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로 편입시켜 8초(哨)를 만들고 관에서 조총을 지급하였다(『현종실록』 15년 3월 25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훈국등록(訓局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차문섭,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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