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대(別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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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전쟁을 치르거나 기존 군대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군영에 신설한 군대.

개설

별대는 원래 『경국대전』 등 법전에는 거의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전쟁을 치르거나 기존 군대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중앙과 지방의 군영에 새로 설치하였다. 별대가 임진왜란 중에 처음 설치되었다는 것은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으로 죽은 역졸(驛卒)을 대신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의 명령 문서인 유지(有旨)를 각 도에 전달하기 위해 금군 40명 등 80명을 따로 선발하여 별대라고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별대라고 호칭하지는 않았지만 1594년 항복한 일본군으로 편성된 투순군(投順軍)도 사실상 별대라는 기록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별대는 훈련도감·금위영·친군영 등 중앙 군영과 1624년(인조 2) 충청감사 친병 280명 및 1758년 영종진 별대군 8초(哨)에서 알 수 있듯이 감영·병영·진(鎭) 등 지방 군영에도 설치되었다. 별대는 전쟁을 치르거나 대비하는 역할은 물론이고 어가의 호위·산성의 수축(修築)·사신의 접대 등의 임무도 담당하였다.

1669년(현종 10) 설치된 훈련별대의 경우 정군 6,655명은 처음에는 5년에 1번 상번(上番)하여 2개월 복무하였으며, 3명의 보(保)에게서 각각 쌀 12두(斗)를 징수하여 여비·서울에 머무를 때의 비용·2개월의 급료 등으로 활용하였다.

별대는 전쟁기에 일시적으로 존속하거나, 조선후기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나 정원 등이 변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군영에 설치되었던 별대는 1894년 갑오개혁과 이듬해 을미개혁 때 조선후기에 창설된 중앙군과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별대는 전쟁을 치르거나 대비하는 역할은 물론이고 궁궐의 수호·어가의 호위·산성과 왕릉의 수축·사신의 접대 등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 항복한 일본군으로 편성된 투순군을 별대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정부에서는 그들의 창·검·조총 등의 기예를 활용하여 토적(土賊) 진압에 이용하였다. 이듬해 설치된 금군 등으로 구성된 80명의 별대는 전쟁 때 죽은 역졸을 대신하여 승정원의 유지를 각 도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을 경험한 직후에는 무학(武學)·출신(出身)이나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자로서 포술·검술에 능한 자를 별대로 편성하여 후금(後金)과의 전쟁을 대비하려 하였다.

아울러 훈련도감 소속이었다가 청탁을 하여 겸사복·수문장·충찬위 등으로 이속된 55명을 1609년(광해군 1) 환속시켜 만든 훈련도감의 별대는, 1617년 별무사와 교대로 대궐문 밖을 지켰다. 이어 1669년 설치된 훈련별대는 1674년 현종이 정릉에 거둥할 때 어영군과 함께 어가를 호위하였고(『현종실록』15년 1월 23일), 1676년(숙종 2) 훈련별대 5,000명이 송도(松都)에 위치한 대흥산성을 쌓는 데에 동원되었다(『숙종실록』2년 4월 25일). 1677년에는 별대 7초가 어영군 5초 등과 함께 현종의 능인 숭릉(崇陵)을 개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숙종실록』3년 2월 28일).

그 밖에 송도의 별대는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도 수행하였고, 마상별대는 1636년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에 포함되었다.

변천

별대는 전쟁기에 일시적으로 존속하거나,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될 때 장별대(壯別隊) 1초가 사복시(司僕寺)로 이속된 것처럼 소속처가 달라지거나, 정원이 달라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한 예로 훈련별대의 변천을 살펴보면, 1669년 국가 재정이 고갈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훈련도감 군인을 축소하되, 그로 인한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어영청처럼 번상병제(番上兵制)로 운영되는 훈련별대가 창설되었다. 훈련별대의 설치는 남인계의 허적과 유혁연이 주도하였지만 현종의 중앙군 개편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고, 각 도의 한정(閑丁) 중에서 선발한 6,655명을 13번으로 나누어 약 521명씩 번상(番上)하도록 하였다(『현종실록』10년 2월 5일). 그 후 정군·보인을 계속 충원하여 숙종 초에는 정군 13,700명이 4부(部) 13사(司)로 편제되고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사 1,300여 명이 교대로 2개월씩 번상하였으며 보(保)의 수도 41,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1680년(숙종 6) 서인이 집권하자 재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1682년 훈련도감 5,707명 중 707명을 줄여 별대로 보내는 조치가 취해지는 가운데, 훈련별대는 정초청과 합하여 새로 창설된 금위영에 소속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의 군영에 설치되었던 별대는 1894년 갑오개혁과 이듬해 을미개혁 때 조선후기에 창설되었던 중앙과 지방의 각 군영과 감·병영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혜안, 2003.
  • 노영구, 「5군영제의 확립과 군영체제의 정비」, 『한국군사사』7-조선후기Ⅰ, 육군본부, 2012.
  • 이태진, 「중앙 오군영제의 성립과정」,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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