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정(崔漢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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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한정 |
한글표제 | 최한정 |
한자표제 | 崔漢禎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조~성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자경(子慶)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27년(세종 9) |
사망 | 1486년(성종 17) 7월 28일 |
본관 | 화순(和順) |
주거지 | 황해도 장단(長湍) |
묘소소재지 | 황해도 장단부 산리동(酸梨洞) |
증조부 | 최자하(崔自河) |
조부 | 최안선(崔安善) |
부 | 최사로(崔士老) |
모_외조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순(權循)의 딸, |
형제 | (동생) 최한보(崔漢輔), 최한량(崔漢良) |
처_장인 | (첫째부인)영산신씨(靈山辛氏): 신석조(辛碩祖)의 딸 →(자녀)2남 (둘째부인)경주이씨(慶州李氏): 이익(李翊)의 딸 →(자녀)5남 2녀 |
자녀 | (1자)최중청(崔重淸) (2자)최중온(崔重溫) (3자)최중홍(崔重洪) (4자)최중심(崔重深) (5자)최중연(崔重演) (6자)최중순(崔重淳) (7자)최중윤(崔重潤) (1녀)최봉손(崔奉孫)의 처 (2녀)이자화(李自華)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한정(崔漢禎) |
총론
[1427년(세종 9)∼1486년(성종 17) = 60세]. 조선 초기 세조~성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참의(參議)이고, 증직(贈職)은 예조 참판(參判)이다. 자는 자경(子慶)이고, 본관은 화순(和順), 주거지는 황해도 장단(長湍)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최사로(崔士老)인데, 최원로(崔元老)라고도 한다.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권순(權循)의 딸이다. 증조부는 제용감(濟用監)부정(副正)최자하(崔自河)이고, 조부는 사복시(司僕寺)정(正)으로 추증된 최안선(崔安善)이다. 이조 좌랑최한보(崔漢輔)와 성균관 사예(司藝)최한량(崔漢良)이, 최한정의 동생들이다.
세조 시대의 활동
1456년(세조 2)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 양과(兩科)에 합격하고, 제릉전직(齊陵殿直)에 임명되었다. 1459년(세조 5)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옮겼는데, 이때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1465년(세조 11)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모두 일을 잘못 처리하여 사직하게 되었는데, 세조가 곧 용서하고 다시 서용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 참고.) 그 뒤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을 거쳐,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용재집(容齋集)』 권10 「증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최공한정비명(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崔公漢禎碑銘)」 참고. 이하 「비명」 약칭함. ) 1469년(예종 1)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황해도 장단에 내려가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喪禮)를 마쳤다.
성종 시대의 활동
1471년(성종 2)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는데, 성종이 이조에 전지하기를, “대간(臺諫)은 나의 이목(耳目)이 되니, 즉위한 이래로 여러 번 봉사(封事)를 올려서, 시폐(時弊)를 극진히 진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를 보익(輔翼)하였다. 대사헌(大司憲)한치형(韓致亨) 등과 대사간(大司諫)김수녕(金壽寧) 등에게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최한정도 종3품하 중훈대부(中訓大夫)로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 참고.) 그 뒤에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어 지제교(知製敎)와 경연(經筵)시독관(侍讀官)과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우부승지임사홍(任士洪)이 성종의 신임을 받는 최한정을 시기한 나머지, ‘예문관에 재직하고 있는 자 가운데 학문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최한정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그 학식보다 그 덕행을 중시하여, 오히려 최한정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대사간에 발탁하였는데, 품계를 뛰어넘어 임명하였기 때문에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1476년(성종 7) 대사간최한정이 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의 처(妻)와 첩(妾)의 소송사건을 판결하였는데, 그가 황효원에게 오래된 혐의가 있어 공평하게 청리(聽理)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보다 앞서 최한정의 아우 최한보가 후사가 없이 일찍 죽었다. 최한보의 장인 조안효(趙安孝)의 부탁을 들은 황효원에게 최한정이 그 아버지의 노비를 제수(弟嫂)에게 주지 않았다고 크게 책망을 들은 적이 있었다.(『성종실록』 참고.) 1477년(성종 8)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고향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례(喪禮)를 마치자, 1480년(성종 11)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에 임명되었는데, 근무 태만으로 파면되었다. 그때 성종이 좌승지(左承旨)채수(蔡壽)와 내관(內官)조진(曹疹)을 장례원에 보내어 결송(決訟)의 근만(勤慢)을 규찰(糾察)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몹시 추워서 판결사최한정이 채수와 함께 내관 조진이 가지고 온 술을 마시고 취하여 근무를 소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성종실록』 참고.) 1482년(성종 13) 성종이 이조와 병조에 전지하여, 최한정 등을·서용(敍用)하게 하여 1485년(성종 16)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예조 참의로 옮겼다.(『성종실록』 참고.) 1486년(성종 17) 7월 28일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이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최한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며, 행실은 온화하고 평탄하였다. 일은 깨끗하고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행동은 항상 검소하고 청렴하였다. 그는 세가(世家)에서 태어나 예절을 아는 집안에서 자랐으므로, 예법이 귀에 젖고 눈에 익어서 함양된 예절의 소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라서도 예학(禮學)을 힘써 배우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비명」 참고.)
1475년(성종 6) 11월 성종이 야대(夜對)에 나아가서, 좌승지유권(柳眷)에게 말하기를, “전에 우부승지임사홍이 말하기를, ‘예문관에 재직하고 있는 자 가운데 학문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써서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런데 오늘 예문관 교리최한정 등이 사직할 것을 청하였다. 사람이 비록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덕행(德行)이 없으면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유권이 대답하기를, “경연에 시강(侍講)하는 사람은 그 글재주뿐만 아니라 마땅히 그 행실도 보아야 합니다. 최한정은 그 사람됨이 노성(老成)하니, 비록 글 짓는 재주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경서(經書)를 익히 읽은 사람입니다.” 하였다. 1476년(성종 7) 2월 성종은 최한정을 정3품상 통정대부로 초자(超資)하여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하였다. 그때 사헌부 장령(掌令)이숙문(李淑文)이 아뢰기를, “최한정을 관품(官品)을 뛰어넘어 대사간에 임명한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성종이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참고.)
1469년(예종 1) 2월 대사헌양성지(梁誠之) 등이 상소하기를, “실직(實職)의 3계자(階資)를 건너뛰어 승품(陞品)하는 것은 대현(大賢)이나 대공(大功)이면 가능합니다. 지금 이영희(李永禧)는 일개 무사(武士)인데, 훈련원(訓鍊院) 5품 판관(判官)으로서 훈련원 3품 부정을 초수(超受)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한정은 또한 문신인데, 봉상시 5품 판관으로서 예조 5품 정랑을 도로 제수받았으니, 이것은 5품으로서 5품에 천전(遷轉)된 것이고, 그는 지난 6년 동안 받은 녹봉(祿俸)이 모두 5품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영희는 5품으로서 3품에 천전되면 그 녹봉이 어찌 배수(倍數)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들 두 사람은 그 자급을 상고하면 모두 같고, 근무 개월(箇月)을 따지더라도 임기가 찼으며, 그 어질고 불초(不肖)한 면도 또한 그리 심하게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 천전된 관직의 고하(高下)가 이와 같이 차이가 나는 것은, 권세가 있고 없고, 정실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불과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3품을 건너뛰어 승품하는 예(例)는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성종실록』 참고.) 부사이영희의 배경을 보면, 세조 시대 권신 길창군(吉昌君)권람(權擥)이 그의 이모부였을 뿐만 아니라, 또 서원군(西原君)한계희(韓繼禧)가 그의 장인이었다. 그러므로 양성지 같은 대학자가 아니면, 이영희의 3품을 초자하여 전직(轉職)된 것을 비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한정의 집안도 아버지 최사로가 세조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낼 정도로 세가였으나, 청렴하여 엽관(獵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장단의 남쪽 산리동(酸梨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용재(容齋)이행(李荇)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다.(『용재집(容齋集)』 권10 「증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최공한정비명(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崔公漢禎碑銘)」)
첫째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신석조(辛碩祖)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고, 둘째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병조 참지(參知)이익(李翊)의 딸인데, 자녀는 5남 2녀를 낳았다. 3남 최중홍(崔重洪)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지냈고, 5남 최중연(崔重演)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냈고, 차녀는 관찰사(觀察使)이자화(李自華)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재집(容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점필재집(佔畢齋集)』
- 『명곡집(明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