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趙顯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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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4년(인조12)∼1685년(숙종11) = 52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자는 양경(楊卿), 호는 일봉(一峰)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마전군수(麻田郡守)조시형(趙時馨)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심정양(沈廷揚)의 딸이다. 약정(樂正)조희진(趙希進)의 손자이고,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조성기(趙聖期)의 중형이다. 우의정(右議政)김석주(金錫胄)의 자부(姊夫)이고, 춘소(春沼)신최(申最)의 문인이다.

효종~숙종 시대 활동

그의 할아버지 조희진(趙希進) · 조희일(趙希逸) 형제가 유명한 학자로서 잠곡(潛谷)김육(金堉)과 친교가 있었으므로, 그는 김육의 아들 병조 판서김좌명(金左明)의 외동딸과 혼인하였다. 김좌명의 외아들 김석주(金錫冑)와 함께 신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두 사람은 동갑이었으나, 그는 김석주의 자형(姊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진사시(進士試)에 나란히 합격하였으나, 식암(息庵)김석주는 문과에 급제하여 나중에 우의정까지 오른 것과 달리,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직(蔭職)으로 빙고(氷庫)별검(別檢)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러다가 처남 김석주(金錫冑)가 높은 벼슬로 진출하면서, 김석주는 그의 음사(蔭仕)의 배경이 되었다.

1654년(효종5)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대체로 군덕(君德)의 입지(立志)와 단본(端本)을 비롯하여, 내정(內政)을 닦고 외침을 물리치는 일, 현인(賢人)을 초빙하고 선비를 양성하며 세금을 균등하게 매기고 공물(貢物)을 개정(改正)하는 일, 군대를 훈련하고 장수를 선택하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조목마다 상세하게 이론을 전개하는 동시에, 그 폐단을 진술하면서 그것을 구제하는 방도까지 제시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21세였다. 이것이 이른바 ‘갑오만언소(甲午萬言疏)’인데, 선조 때의 ‘율곡(栗谷)이이(李珥)의 만언소’를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위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1668년(현종9) 그 동생 조창기(趙昌期)가 사헌부 감찰(監察)로 있을 때 올린 ‘만언소 17조목’이 그 당시 절실한 정치 문제를 거론하였으므로, 현종과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1674년(현종15)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시대 때 <3번(藩)의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오삼계(吳三桂)가 운남성(雲南省)을 점령하고 대만(臺灣)에서 정성공(鄭成功)이 이에 호응하여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도 청나라에 반기를 들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복수하자고 상소하였는데, 이것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무모한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강희제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힘이 강하고 문화적으로도 황금시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尹鑴)가 일찍이 그를 천거하면서, “고을을 맡길 인재가 아니니, 언관(言官)으로 등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1679년(숙종5) 온양군수(溫陽郡守)로 추천되었다. 이때 윤휴가 아뢰기를, “신이 근래에 비로소 그 사람을 만나보았더니, 언관으로 등용하기에 매우 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니, 숙종이 묻기를, “이 자가 바로 빙고 별검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이무렵 처남 김석주는 서인의 한당(漢黨)으로서 남인 윤휴(尹鑴)와 밀착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인 허적(許積)과 손을 잡고 서인의 노론 송시열(宋時烈) · 김수항(金壽恒)을 숙청하고 도승지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1680년(숙종6) 남인 허적(許積)이 어용 장막(帳幕)을 사적으로 남용한 <허적의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허적은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이어 이조 판서가 된 김석주는 남인을 조정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송시열의 산당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복창군(福昌君) 등과 모반(謀叛)의 대역(大逆)을 하였다고 고변(告變)하게 하여 남인의 잔여 세력을 박멸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러한 김석주의 과격한 행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송시열과 윤휴의 갈등으로 갈라져 있던 서인이 이 사건을 겪으며 결정적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조현기는 김석주의 친구이고 처남매부 사이였으나, 김석주의 과격한 행동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윤휴의 추천대로 언관(言官)의 청요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자원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갔다. 이후 온양군수로 나갔다가 서산군수(瑞山郡守)를 거쳐,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을 지냈다. 인천부사(仁川府使)로 나가서 재임하다가, 1685년(숙종11)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2세였다.

저서로는 『일봉집(一峰集)』 7권이 있다.

조정시 옥사 사건

1680년(숙종6) 윤8월 <조정시(趙挺時)의 무고(誣告) 사건>이 일어났다. 국청(鞫廳)에서 최만열(崔晩說) · 이원정(李元禎)을 잡아오기를 청하니,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또 신종화(申宗華) · 조현기를 잡아오기를 청하니, 숙종은 “신종화는 역적 이남(李柟)과 겉으로는 정의가 가까운 것처럼 꾸몄으나, 안으로는 밀계(密計)를 탐지하여 일일이 병조 판서에게 와서 고하였다. 조현기는 비단 이름을 지적하지도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긴히 나올 만한 일도 없으니, 아울러 잡아오지 말라.” 대답하였다. 국청에서 다시 계청(啓請)하였으나,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 조현기는 곧 조정시의 처형(妻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였기 때문이다.(『숙종실록』)

조정시는 조성(趙䃏)의 아들이었다. 부자가 허적과 윤휴에게 아부하였는데, 조정시는 또 거짓으로 김석주와 절친한 체하면서 서로 왕래하였다. 조정시는 세 차례의 신장(訊杖)압슬(壓膝)을 당한 후에, 비로소 자복하기를, “일찍이 선혜청(宣惠廳) 낭관(郞官)으로서 허적의 집에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곧 초당(草堂)에서 허견(許堅)을 만나보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지금 체찰사부(體察使府)를 다시 설치하는 것은 비단 외우(外憂) 때문만이 아니라, 성상께서 저사(儲嗣: 세자)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후일 계책을 정하는 데는 마땅히 병권(兵權)을 맡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이 말씀은 두렵지만, 그 계책은 진실로 좋다.’고 하니, 허견이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지금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셨으나, 늙고 혼미(昏迷)하여 일을 그르칠까봐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적합한 인물을 의논하였는데, 과연 누가 이를 맡을지를 물었더니, 김석주 · 윤휴 · 이원정(李元禎)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모두 삼망(參望)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조정시가 복주(伏誅)될 적에 조정시가 또 신종화(申宗華)와 조현기를 죄 안에 끌어들였으나, 숙종이 명하여 잡아들이지 말게 하였다. 이리하여 1680년(숙종6) 윤8월 조정시(趙挺時)는 복주당하였으나, 숙종의 보호로 김석주와 조현기는 무사할 수 있었다.

성품과 일화

조현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모습이 의젓하고 점잖았으며, 형제 중에서 문격(文格)이 가장 높았다. 그가 젊었을 때 처남 김석주와 함께 신최의 문하에서 문장(文章)을 배웠는데, 두 사람이 모두 스승에게 칭찬을 받았으나, 이치를 위주로 하는 글과 문사(文詞)를 위주로 하는 글에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그는 식암김석주에게 글을 보내 근본을 따지면서 모방하여 흉내내고 치장하여 글을 쓰는 버릇을 논박하고 배척하였다. 그는 문(文)과 도(道)가 둘로 나뉘어질까 걱정한 것이다. 다른 잡문(雜文)과 구어(句語)들도 모두 남을 깨우치는 호탕하고 통쾌한 글들이었다. 그러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을 보면, 그의 반대파 사관(史官)들이 “조창기의 형인 사인(士人)조현기는 성질이 편벽되어 한때 어질고 바른 인사들을 모두 질시하였기 때문에 사류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조창기도 역시 성품이 추하고 단정치 못해서, 일찍이 그의 형과 함께 사론(士論)을 배척하였으며, 망령되게 자신들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가 있다고 하였으나, 식자들은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라며 비난하였다.

1678년(숙종4) 1월 숙종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고, 별검조현기 등을 발탁하여 6품 관직을 제수하였다. 윤휴가 조현기의 재주를 칭찬하고 천거하자, 숙종이 영의정허목에게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그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글에 능하고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므로 신이 일찍이 기억하여 알고 있습니다. ‘갑인년(1674년)의 봉사(封事)’를 읽어보았더니, 그 설시(設施)한 것이 과연 견식이 있고, 말만 크게 하고 실상이 없는 자와 비유할 바이 아니니, 진실로 탁용(擢用)하기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조현기를 6품의 관직에 임명하였던 것이다.(『숙종실록』) 1680년(숙종6) 2월 온양군수조현기가 하직(下直) 인사를 올리자, 숙종이 인견하고 유시하기를, “그대의 뛰어난 재주는 자주 특별히 천거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선 한 고을을 맡겨서 그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니, 그대는 직무에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조현기가 아뢰기를,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조정을 바르게 하고 사방(四方)을 바르게 하고 만민(萬民)을 바르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상께서는 능히 편벽되고 사사로운 것을 물리치고 옳고 그른 것을 밝게 살피어서, 비록 죄인의 명부에 기재되어 있더라도 진실로 그 사람됨이 어질면 불러다 쓰고, 비록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진실로 그 사람됨이 간사하면 배척하여 물러가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하고, 이어서 ‘인재(人才)를 찾아내고 변방의 수비에 힘을 들이며 군포(軍布)의 법을 폐지(廢止)하고, 호포(戶布)의 정사를 시행할 것’ 등의 두어 가지 일을 진술(陳述)하였다.(『숙종실록』)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진잠(鎭岑) 가수촌(嘉壽村)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는 병조 판서김좌명(金佐明)의 딸이고 우의정김석주(金錫胄)의 누이이다. 자녀는 6남 7녀를 두었으니, 장남 조정위(趙正緯)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냈고, 차남 조정신(趙正紳)은 현령을 지냈으며, 3남 조정서(趙正緖)는 부여현감(夫餘縣監)을 지냈다. 또한 4남 조정강(趙正綱)은 좌랑(佐郞)을 지냈고, 6남 조정순(趙正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필선(弼善)을 지냈다. 장녀는 군수김노득(金魯得)의 아내가 되었고, 3녀는 관찰사이인엽(李寅燁)의 아내가 되었으며, 5녀는 세자 보덕(輔德)유명웅(兪命雄)의 아내가 되었다. 손자 가운데 장남 조정위의 아들 조명택(趙明澤)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3남 조정서의 아들 조명리(趙明履)는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를 지냈다. 4남 조정서의 아들 조명건(趙明健)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應敎)를 지냈고, 조정강의 아들 조명겸(趙明謙)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고, 6남 조정순의 아들 조명정(趙明鼎)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다. 임천조씨(林川趙氏) 집안 중에서 그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일봉집(一峰集)』
  • 『유암집(幽菴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용주유고(龍洲遺稿)』
  • 『동주집(東州集)』
  • 『백헌집(白軒集)』
  • 『귀계유고(歸溪遺稿)』
  • 『식암유고(息庵遺稿)』
  • 『간재집(艮齋集)』
  • 『농암집(農巖集)』
  • 『지촌집(芝村集)』
  • 『소재집(疎齋集)』